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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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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조선공산당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BB2649><table bgcolor=#fff,#247a87><tablecolor=#4e6865,#fff><tablewidth=600><width=50%><nopad> [[파일:김철수일제감시대상카드.jpg|width=100%]] ||<nopad> [[파일:김광수일제감시대상카드.jpg|width=100%]] ||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 강달영을 포함한 100여명이 6.10 만세 운동 준비과정에서 체포되어 2차당은 와해됐다. 따라서 1926년 9월경 제2차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이던 김철수를 중심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3차 고려공청도 제2차 고려공청 회원이던 고광수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김철수와 고광수는 조직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청년회계와 통일을 추진한다. 김철수는 상해계였으며 파벌 관념이 적었고, 전선 통일에 적극적이었다. 그에 따라 서울청년회계 신파(조기승 · 이인수 · 김병일 · 신철호 · 한명찬 등)는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또 1926년 여름 안광천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일월회가 대거 귀국하여 국내 운동에 가세함으로써,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이들로부터 인력을 충원 받았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1926년 12월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김철수가 책임비서직을 사임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한 중앙간부진이 새로이 선출되었다. 김철수는 당재건을 보고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후에도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주시를 피하고 당내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진을 자주 교체했다. 책임비서직은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바뀌었다. 고려공청의 책임비서직도 고광수, 양명, 하필원, 김철 등의 순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3차당의 주요 간부진은 한위건 · 최익한 · 권태석 · 조기승 · 김월성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계 신파, 일월회계, 그리고 만주 고려공청파가 합세한 형태를 취했다. 이와 같이 3파가 연합한 이들 그룹을 세간에서는 이른바 ‘ML파’라고 불렀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도 흔히 ‘ML당’이라 불리게 되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3차당은 강원도를 제외한 각도에 도 간부를 두었으며, 국내 야체이카도 약 40개에 달했다. 당원도 200명 정도를 확보했다. 3차당은 만주총국과 상해부를 재건하고 일본부도 설치했다. 특히 일본부의 활동이 활발하여 『대중신문』, 『이론투쟁』, 『현계단』 등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BB2649><table bgcolor=#fff,#247a87><tablecolor=#4e6865,#fff><tablewidth=600><width=50%><nopad> [[파일:박락종.jpg|width=100%]] ||<nopad> [[파일:송언필.jpg|width=100%]] ||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 [[박낙종]]'''||'''독립운동가 [[송언필]]'''|| 3차당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와 [[근우회]]를 조직한 것이다. 1926년 4월 화요회 · 북풍회 · 조선노동당 · 무산자동맹의 4단체는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고 [[정우회(1926)|정우회]]를 조직했다. 정우회는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제휴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제3차 조선공산당 역시 1928년 초 경찰에 발각되어 30여 명의 주요 간부가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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