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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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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테제」 발표 이후 국제레닌대학이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마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당재건운동에 개입했다. 모스크바에서는 1929년 [[김단야]] · 조두원 · 김정하를 조선에 파견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21&cid=62049&categoryId=62049&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 김단야·[[권오직(1906)|권오직]] 등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울·평양·부산을 ‘트로이카’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국 8개 지역에 조직가를 확보하는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연락원이 체포되자, 1929년 12월 김단야는 국내를 벗어나 1930년 2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단야의 망명 이후 준비위원회는 권오직·채규항(蔡奎恒)·박민영(朴珉英)이 맡았다. 준비위원회는 1930년 1월 조선공산당 경성구 조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 1930년 3·1 운동 11주년 기념 격문으로 인해 대부분 체포되었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2700&code=kc_age_40|출처]] 한편 모스크바로 간 김단야는 9월에 다시 상하이로 가서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박헌영]]도 여기 참여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는 이를 지원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신의주를 통해 『콤뮤니스트』를 국내로 반입했으며, 국내에서 김형선이 일부 인쇄하기도 했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국내에 9개의 공장 세포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콤뮤니스트』를 배포했다. 또 각 지역에서 따로 『볼셰비키』, 『노동자』 등의 기관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 그룹의 조직은 1932년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체포되기 시작했다. 국내 연결자인 김형선이 먼저 체포되었고, 상하이에서 박헌영까지 붙잡히자 활동이 어려워졌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21&cid=62049&categoryId=62049&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출처: 박찬승]] 김단야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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