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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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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 === 소련은 독소전쟁 초반 몇 달만에 수백만의 군대와 모스크바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잃고 마는데 그 원인 중에는 스탈린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1930년대 말에 군대 내에서의 [[대숙청]]으로 쓸만한 지휘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과, 수많은 사전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나치 독일의 침공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무리한 사수명령으로 많은 병력을 포위섬멸작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 관련서적 :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존 루카치 저), "세계사 최대의 전투"(앤드루 나고르스키 저)] 하지만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와 [[세묜 티모셴코]] 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무기대여법]] 지원을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실행해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전 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 능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은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실전에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 단, 불필요한 간섭을 줄인 것이지, 여러 장치를 통해 장교단을 철저히 휘어잡고 있었다.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 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서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한 점이 독소전쟁의 승리를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중략)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 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 >- 1940년 4월 회의 중 스탈린의 발언 [[http://panzerbear.blogspot.kr/2015/12/blog-post_7.html|#]] [[화력덕후|포병덕후]]로도 유명하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대전에 대한 통찰이 탄탄한 근거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뭘 더 제공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눈은 있었던 듯하다.[* 러일전쟁은 독일군의 화력교리를 답습한 일본군의 화력주의에 의해 패배한 전쟁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은 [[엘랑 비탈]]을 대표로 하는 이 시절까지 남아 있던 백병주의를 화력으로 완전히 눌러버린 전쟁이었다. 특히 1차대전의 동부전선은 양측이 수십년전의 구식 화포까지 긁어 모아 상대방에게 화력을 쏟아부으며 적백내전에서는 기병과 타챤카 등이 훗날의 장갑차, 전차의 역할을 맡아 빠르게 기동하며 화력을 쏟아붓는 양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양상 속에서 신생 소련군의 장교들 역시 기동과 화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투하쳅스키가 요구한 수만대의 전차와 비행기 역시 이러한 양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볼 수 있다. 투하쳅스키를 숙청 했음에도 어쨌든 그 요구를 실현 시킨 것을 보면 최소한 투하쳅스키가 상상한 것의 요점을 파악할 군사적인 안목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러일전쟁 무렵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완공되기 전이어서, 러시아가 본국에서 먼 극동에까지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 어려웠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완공되었다.] 이외에도 [[다포탑 전차]]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전차와 기병전차, 나중에는 [[T-34-76|T-34]]를 비롯한 중형전차를 대거 생산하여 붉은 군대는 1940년대 일찍이부터 수천대의 전차를 갖추게 되었고, 보병용 자동화기의 채용을 밀어붙여서 [[그리고리 쿨리크]]가 중단해버린 [[데그탸료프 기관단총|PPD 기관단총]]의 생산을 재개하고 [[SVT-40]] 200만 정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보병의 1/3을 SVT-40으로 무장시키거나, [[공수부대]]를 당대의 모든 국가중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굴리기 시작하기도 했으며[* 이전에도 미국에서 공수부대의 원안이 나오거나 무솔리니, 괴링 등이 시도하긴 했으나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용적이고 제대로 된 공수부대의 시작은 대부분이 소련군으로 인정한다. 물론 소련 공수부대도 매우 시행착오가 많았다. 초기 공수부대는 아예 비행기 기체 날개 위에 매달려 있다가 낙하하기도 했다.] 실패했긴 하지만 탄띠로 급탄하는 DS-39 공랭식 경기관총을 개발해 채용하기도 했다. 기계화 이론가인 투하쳅스키, 야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예고로프]]와 [[예로님 우보레비치|우보레비치]] 등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붉은 군대의 기계화에도 신경을 써서 소련의 기술 때문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GAZ-60 하프트랙 장갑차를 일찍이 채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술에서야 I-180 전투기가 외면당하고 VI-100(후일 [[Pe-2]]가 되는) 중전투기가 급강하 폭격기가 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다른 많은 나라도 항공기술에서는 삽질을 많이 했으므로 스탈린만의 문제라 볼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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