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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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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 급진적인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이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게 꼭 소련만 그런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19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 [[위키피디아]]에 있는 [[http://ko.wikipedia.org/wiki/영국의_농업_혁명|영국의 농업 혁명]]을 보면 알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조선 농민들 역시 저가로 수탈의 고통을 겪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 노동자들이 풍부한 농산물을 누리면서 잘먹고 잘산 것도 아니지만. [[http://soakaeofh.egloos.com/5230184|#]]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브리태니커]]에 "Disguised unemployment"를 검색해도 나오지만, 전근대 농촌의 경작지들에서는 사실상 일손이 남아도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 이들까지 해당 경작지에 소속된 농민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식적으론 실업자가 아니지만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는 인구가 많고 이를 한자어로는 "위장실업"이라 한다.]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여 취재한 바에 따르면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약 70만) 정도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출처-'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를 야기했으나, 당시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절대 망상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도 군비 확충을 위한 공업화를 구상하기는 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무지막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1920년대 초엔 [[소련-폴란드 전쟁|폴란드에 패하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혁명 직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기본적인 무기인 [[소총]]조차 모자라 한때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38식 소총]]을 대거 사와야 했다.]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물론 독일군과의 교환비로 치면 소련군이 거의 항상 열세였기에 아주 부당한 평가는 아니지만 말이다.] 실제로 1920년대에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붉은 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이 때 이루어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농업을 초토화하는 동시에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올인한 투자가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페레스로이카 이후 재발견된 부하린을 지지하는 시각에선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중농을 때려잡는 바람에 급격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고 오히려 이 같은 식량문제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했던 당시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하린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이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급격한 중화학공업추진은 결국 식량문제를 안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부하린식으로 추진했더라도 스탈린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수준의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부하린도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하기도 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은 하되 급격하게는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급격한 공업화로 인하여 가축생산의 공급은 50%가 감소하였으며 곡물생산은 기대보다도 적었다. 부양인구가 줄었으므로 공업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유입은 산업자본 성장을 저해하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간 인민이 필요보다 약 1900만명 이상 이주해버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1920년대 말에 소련경제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남용했다는 것이고, 만일 대안의 정책들이 채택 되었더라면 좀더 큰 산출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자본이 더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Testing Early Soviet Economic Altematives", Slavic Review, Surnmer 1991, pp.251-267., 1920년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부하린적 대안의 문제, 권희영] >레닌은 네프에 대해 국가를 다시 자립하게 만들기 위해 시장에 임시로 양보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했다. 1927년 농가의 절반이 농업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네프의 성공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 결과로 생산성이 꾸준히 상승했다.1926년에 이르러 1913년 수준의 농업 생산량이 회복됐고 1920년대 중반의 수확량은 러시아 농업의 황금기였던 1900년대 당시보다 17퍼센트나 높았다. 레닌이 기획했던 것처럼 네프가 지속됐더라면 그것은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소련 경제는 농업부문의 활황에 힘입어 1921년과 1928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네프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중단됐다. 농업 집단화는 소련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었고 수백만 명의 농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 >- 올랜도 파이지스(조준래 분 옮김)의「혁명의 러시아1891~1991」(어크로스, 2017, pp.205~210) 이런 식으로 닥치고 일단 밀어붙이는 스탈린식 국가주도형 경제정책, [[민주집중제]]의 '집중'을 강화하는 관료제의 강화는 후세의 좌파들에게도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국가성격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현재의 좌파들의 정파가 갈리기도 한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의 급진좌파 중 하나인 [[노동자연대]]등이 주장하는 이 관점은 소련 관료제는 하나의 자본으로서 노동자에게 작용했고, 국제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소련은 엄연히 그 일부였기에 세계공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붕괴는 [[계획경제]]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 자본주의로의 이행일 뿐이라는 것이 그 입장이다. 한편 [[아나키즘]]이나 평의회 공산주의 등의 일부 분파는 스탈린 이전 레닌 집권기부터 소련의 붕괴까지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 보기도 한다. 그 다음 주장으로는 스탈린의 정책들을 레닌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스탈린주의자([[PD(정파)|PD]])들 대다수가 가진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 집권 이후부터 소련의 붕괴까지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이었다는 입장이고, 소련 붕괴 이후도 소련의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주의에 근접한 복지국가라는 인식을 가진다. 비주류적인 주장으로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 있다. 노동자국가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 국가를 말한다. 즉 한 사회의 권력이 자본과 지배계급에 존재하는지, 혹은 노동계급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노동자국가 여부가 갈린다.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이러한 노동자국가의 틀은 가졌지만 스탈린에 의한 중앙에의 집권, 사업장과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관료제로 대체해 버린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국가'는 분명히 아니라는 입장이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수성 및 발전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트로츠키는 국방상으로써 '전시지도자'였고 내정에서는 유능했느냐의 문제와 별개로 대숙청 못지않은 [[적색 테러]]를 일삼았다. 특히 적뿐만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정치성향상 아군이 될 수 있는 [[좌익공산주의]]자와 [[아나키즘/분파#s-2.1.4.1|무정부 공산주의]]를 직접 많이 때려잡았다.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이 대표적인 예. 트로츠키가 채 잡아 죽이지 못한 수병반란 생존자들이 후일 트로츠키가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편을 들은 황당한 일화가 있는데, 이는 소련의 권력층 내에서 어쨌든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비슷한 거라도 실현하려 했던 게 트로츠키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보는 의견이 주류이다. 트로츠키가 노농적군을 건설해 1919년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해냈듯이 스탈린은 군대를 뒷받침할 산업을 재편해서 1941년에 소련을 구해내었다. 그의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전지구의 상당부분을 공산화시키지도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승리하지 못하고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만 해도 강경한 중공업화론자였고 방식에 따른 차이만 있었다. 트로츠키파의 주요 경제학자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괜히 스탈린의 중공업정책에 감명받아 스탈린파로 전향한 게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측에서는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차이점만을 부각해 설명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농민을 갈아넣는 중공업화, 군사력의 확대 및 확충 모두 트로츠키의 정책이었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축출 이후 스탈린에게 적대하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자 도리어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물론 이들은 대숙청때 전부 죽었다.] 이는 그것이 트로츠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적백내전|농민을 갈아넣어 만든 자본과 전국적 징집으로 만든 군대로 승리한 전쟁]]의 [[레프 트로츠키|실질적 최고사령관]]이 바로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트로츠키는 허망하게 축출된 토론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레닌 생전에 소련의 실질적 2인자였다. 그런 트로츠키는 포용력이 없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실각했지만, 스탈린은 아무리 잔인하고 혹독할지언정 정치적으로 승리한 다음 계획에만 그친 트로츠키의 중공업화를 실제로 이룩해내어 [[나치 독일|소련이 맞이한 가장 위협적인 적]]을 격퇴해내었고 이는 트로츠키의 군사적 성공에 결코 꿇리지 않는다. 중공업화를 반대한 부하린과 중공업화를 점진적으로 효율적으로 진행하자고 한 트로츠키 모두 1920년대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탈린은 세 명중 가장 강경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몰로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정도까지 유럽에서 전면전, 총력전을 벌일 수 있을 계획으로 산업화를 추진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까지 이 구상에서 시작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15년짜리 계획이 된다. 그것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 1927~1929년에 시작한 계획이었다.[* 실제로 1927년에는 소련-영국 단교로 인해 적백내전 제2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소련 내에 퍼져있었고, [[국공결렬|중국 혁명의 실패]]로 아군이 사라진것 또한 심각한 문제로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실각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그렇다는 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욕과 별개로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말로 소련의 공업국가화, 군사대국화를 1920년대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고 실행에 옮겼다는 결론이 된다.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무능하지 않았고 각자의 비전과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1928년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농업국가인 소련을 15년만에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보유한 국가로 만들 추진력을 가진 게 스탈린이었다. 당대의 평가가 어땠는지,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이 소련을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의 논의에 대해선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결과만 본다면 스탈린은 소련의 구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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