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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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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이룩한 공업화 ===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중공업 위주 발전이라는 선택의 대가로 인한 농업 관련 산업의 약화와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덩샤오핑|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 네프만(NEPman)/[[쿨라크]]][*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얼마나 가난했으면--(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를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1932년~33년 기근은 절정에 달해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였다. 1937년 소련의 공식 인구 집계는 1억 5,600만명이었는데 경악한 담당자 쿠르만은 사망자, 군인, 탈소련자들의 통계를 갖다붙혀 1억 6,830만으로 허위보고했다. 그리고 그 조작된 자료를 보고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 8,800만명이 넘어야 되는데 [[죽음|2,000만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500만명 이상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다.[*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자주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재앙의 최초 신호는 소련 경제에서 가장 불우한 부문인 농업으로부터 왔다. 소련 농촌은 불균형한 경제 정책과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부담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체제 하에서 농업은 침체되었고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축산업]]의 상황은 특히 나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로 보아도 1953년 초 전국의 가축 두수는 1939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이는 1928년보다 3분의 1이 더 적은 수였다. 1953년의 돼지 수는 1928년과 동일했다. 전국의 농촌에서 모스크바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외침 중의 일부는 스탈린의 귀에까지 닿았다. 1952년 10월과 11월에 접수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된 편지 중에는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 집단 농장의 고초를 토로한 불만들이 담겨 있다. 수의사인 홀로도프는 사실상 무보수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복돋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농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호밀 수확량이 보잘 것 없습니다. 추수 과정에서 막대한 낭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어느 정도 수확되었지만, 과연 감자 수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 감자를 캡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평소 임금의 50퍼센트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 일에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에 감자를 빠짐없이 캐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맨 위에 있는 것들만 대충 걷어낼 뿐입니다. 이제 축산업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창피스럽습니다 연간 우유 생산량은 사료를 먹인 젖소 한 마리당 1,200~1,400리터를 넘기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스울 뿐입니다. 이는 보통 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입니다. >----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 「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03p~504p >불만이 만연한 근본 원인은 소련의 낮은 생활수준이었다. 집단화로 생산성이 심하게 저하된 농업은 위기와 침체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스탈린 정부는 1931년~1933년과 1946년~1947년처럼 국토의 상당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특정 지역이 기근이나 식량 곤란을 겪고 있음을 매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가장 호시절에도 평균 식사량이 빈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빵과 감자에 의존해 살았다. 스탈린 사망 직전에 소련 시민은 주로 밀가루 음식(주로 빵) 약 500g, 소량의 곡물, 감자 약 400~600g, 우유나 유제품 약 200~400g을 소비했다. 이 식품들이 전형적인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이외의 식품, 특히 고기는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인당 육류 및 육가공품 소비량은 하루 평균 40~70g, 지방(동물성, 식물성 기름, 마가린, 돼지비계) 소비량은 15~20g이었고 여기에 설탕 몇 티스푼과 약간의 생선을 더하면 끝이었다. 평균적인 시민은 달걀을 6일마다 1개꼴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식단은 수용소 수감자의 표준 식단과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통계국에서 산출한 기관인데 이 기관은 항상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착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로 소련인들의 식사량은 풍족해져서 1960년대에는 매일같이 고기를 먹는 나라가 되었지만 1990년대에 경제가 막장화되는 바람에 고기 소비량이 크게 줄고 빵이나 감자로 끼니를 대강 때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스탈린때의 식단을 다시 재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내용이지만,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기준 1년 1인당 소련의 육류 소비량은 최소 40kg이었고, 1970,80년대 소련의 평균 저숙련 노동자 임금(약 200루블)으로는 쇠고기(1kg당 약 2루블)의 거의 100kg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적어도 1960년대부터는 소련사람들도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즐겼다는 것이다. 이 기준이 감이 안온다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이 1년 1인당 육류 소비량이 51.4kg이었고, 중국이 47kg 그리고 일본이 35.6kg임을 생각하면 된다.][* 반면 [[안드레이 란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근이 덮쳤을 때도 최소 1주일에 한번은 소련 사람들이 고기를 섭취했다고 주장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ommunism/communismhistory-11122019093717.html?fbclid=IwAR31QPUnKuX-dLdY7JrH0X8uYBEinDjTN1cK600wQHTF7i_R8N92LBQONEg#.YiLNLthIMMk.facebook|흐르쇼프 통치하의 소비생활]] ][* 하지만 흘레브뉵의 이런 주장은 다소 악의적인 측면도 강하다. 스탈린 시절 소비재는 1차 5개년 계획 도중 하락했지만, 그 이후 실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말 소비재의 생산량은 80% 증가했으며, 1910년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이 2,100 칼로리였다면 네프 시기에는 2,500 칼로리(kcal)로 상승했다. 비록 1차 5개년 계획(1928~1932) 시기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은 혁명 이전 시기의 수준으로 하락했지만, (1929년: 2,030 칼로리, 1932년: 2,022 칼로리) 하루당 칼로리 섭취량은 1930년 말엽에 2,900 칼로리로 증가했다. 1인당 칼로리의 섭취량이 2,000칼로리를 다소 웃도는 수준에서 10년 이내에 3,000 칼로리에 거의 도달할 정도로 성장세를 이룩한 것은 녹색혁명 당시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된다. 가령, 인도에서 1961~63년 당시 1인당 칼로리 섭취량과 1991년의 칼로리 섭취량은 제자리걸음에 있었고, 1988년~1990년에 2,229 칼로리로 상승했을 뿐이었다. 파키스탄에서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같은 시기에 1,802 칼로리에서 2,280칼로리로 증가했다. 인도네시아만이 이들 국가들에 비해 현저한 성장을 거둘 수 있었는데, 1960년대 당시 1816칼로리에서 1990년대 초반에 2,605칼로리로 증가했지만, 이조차도 소련과 다르게 10년이 아니라 30년이 소요됐을 정도다. 즉, 스탈린 시절 소련의 소비재 성장률은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지만, 흘레브뉵은 스탈린 정권에 대해 까기 바빠서 이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맥락적 생략을 보였다. 참고 자료는(Michael Kubi, «Die Sowjetdemokratie und Stalin: Theorie und Praxis in der Sowjetunion 1917-1953», 2008, p.116)을 참조] >----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4p >공산품의 공급 사정 역시 마찬가지로 나빴다. 공장에서 제조한 물건의 가격은 전통적으로 특별히 높게 매겨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물건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52년에 가죽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농민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가장 간단한 신발과 옷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5p >소련 인민의 고난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공업과 농업 부문의 지극히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 물질적 보상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작업장에는 폭압이 만연했다. 노예 노동은 물론 굴라크 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행해졌지만, 자유롭다고 하는 산업 및 농업 노동자들도 흔히 강압적인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부 산업의 작업장, 특히 가장 임금이 낮고 위험한 곳에서는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작업이 수행되었다. 동원을 회피할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약 1700만 명이 지각, 근무지 근무이탈, 동원 회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작업장 규율 위반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소련 노동자들의 이타적 열정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한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한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6p >1930년대처럼 스탈린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빵 부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된 '파괴자들'과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크렘린 지도자에게는 전시에 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비축했던 엄청난 '전략적' 곡물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 곡물을 소비용으로 방출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 외국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금 1500톤도 국고로 갖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나중에 스탈린이 금의 매각을 금지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국제연합의 국제부흥국이 러시아에 보내려 한 식량 지원도 마다했다.[*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 대한 일부 지원은 허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소련 식량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농민들에게 물린 세금은 30% 증가했고, 1950년까지 150% 급증했다. 국가는 또 소련 인민들로부터 '''빌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몰수한 수십억 루블에 이른 전쟁 공채를 상환하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새로운 재건 공채가 생존을 우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163p~164p >베리야가 체포된 후 흐루쇼프는 재빨리 지휘자의 자리로 진입했다. 하지만 말렌코프가 눈에 잘 띄는 직책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후계자로 계속 여겼다. 1953년 8월 8일 최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하면서 말렌코프는 '향후 2-3년' 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급진적으로 개선시킬 깜짝 놀랄 만한 몇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1928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는 군산복합체와 기계제작 부문을 희생하고 농업 및 소비재 관련 경제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기로 약속했다. 말렌코프는 또 농가와 개인 부속지의 크기를 늘릴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농업 세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들은 1년 내에 농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거의 배가시켰다. 심각한 식량 문제가 계속 소련을 괴롭혔으나, 적어도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재산세를 모면하기 위해 과수원을 줄이고 소를 도살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시장에 다시 팔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러시아 전역의 무지크[* 러시아어로 농부, 촌놈을 뜻하는 단어]들이 농촌의 밀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그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등, 레닌 이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241p 이렇듯 집단농장에 종속된 농민들에게 지불되는 극도로 낮은 수매가로는 국가에 생산물이 모조리 몰수되었다는 뜻이다. 농촌을 착취함으로써 중공업과 무기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공업부문 또한 무보수 강제노동이 만연하여 스탈린식 산업화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죽은 즉시 오랫동안 과제로 남아있던 경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축산물에 대한 수매가를 인상하고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의 숨이 트였고 농업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0~22%,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러시아의 흉작으로 인해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다만 소련의 경우 미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농업하기 좋은 풍부한 곡창지대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사실 소련의 밀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가축 사료용으로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했다. 어쨌든,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되었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부족한 경제력으로 미국과 군비 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 부문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국가가 퇴보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마노프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형편상 정상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불가능했고, 결론은 스탈린의 냉혹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방식밖에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공산국가 가운데 [[북한]]이 제일 유명하여 북한과 자주 비교를 하기는 하나, 사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심각하게 상황이 악화된 것잉었다. 소련은 물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심지어 북한조차도 소련이 건재했던 시기에는 그런 대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당시 소련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다.[* 현재 이러한 무상의료를 그럭저럭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쿠바외에는 없다. 당연하지만 그 무상의료의 질은 여타 선진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또한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잡아, 일반적인 인민대중에게도 안정적인 연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괜히 냉전시대 서구 좌파들이 스탈린을 찬양했던 건 아니다.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노멘클라투라|높으신 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사기업을 비롯한 민간 주체에게 혁신을 고무할 인센티브 체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국가권력이 사회의 각종 자원을 동원해서 더 효율적인 생산단위에 때려박으면 성장하는 요소투입형 경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전후복구까지 끝나자 소련은 이미 고도화된 도시경제였고, 혁신과 창조적 파괴, 생산성 향상이 아니면 성장을 유지할 수가 없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바로 자본가(=기업가)가 사리사욕을 원동력으로 삼아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혁신을 선도한다. 하지만 계획경제적 인센티브를 제외한 효과적 혁신수단을 갖추지 못한 소련은 비효율만 양산했다. 인민들에게 정치권력과 거래로 준 것이나 다름 없던 복지제도는 점점 더 과중한 압박으로 소련 체제를 내리눌렀다. 이를 극복하고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고, 소련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차차 둔화되었다. 문제가 계속 쌓여만 가자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안드로포프 집권기에 들어서서는 성과급 제도를 강화했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업가정신이 부재한 관료집단의 한계는 명확했다. 소련은 전통적으로 계획경제적 인센티브제에 기반하여 경제성장을 했다. 사기업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련에는 '''인센티브제'''가 정착되었고, 소련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먼저 소련의 경제성장과정을 보면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특히 스탈린의 경우 목표량을 초과생산한 동무에는 막대한 포상과 훈장 그리고 혜택을 부여했고, 그러지 않은 동무에게는 징계처벌을 하였다. 생산량이나 근태, 업무실적이 급격히 낮은 경우에는 심한 경우 '''숙청당했다.''' 그래서 대충대충 일한다고 해도 봉급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소련이 망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련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말이나 러시아와 구공산권 국가에서 살면서 경험한 것에 의하면 소련권 사람들이 일은 열심히 한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잘한다는 게 문제이다. 이런 직업관을 표현하는 단적인 일화가 있는데, 한 남자가 소련 말에 놀러갔는데 한 사람은 땅을 파고 한 사람은 그 판 땅을 메꾸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였다. 모든 목표치는 당관료의 손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필요한 물자의 양을 책상에서 결재하면 이 문서가 하달되어 공장에서 해당물자를 생산한다. 자유경제시장처럼 사기업이 마음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목표치를 달성하면 해당 공장과 사기업은 충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니 공장도 딱 그 목표치만 생산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수요량을 예측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정 물자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치에 따른 인센티브제도는 인센티브는 늘어나는데 막상 생산력이 떨어지는 막장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중앙당의 생산량 통제를 폐기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자유경제체제는 옐친이 들여온 것이지 고르바초프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날 하루아침에 폐지 이런식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생산량 통제의 폐지는 당연히 인센티브제도의 폐지로 들어섰다. 중앙당은 각자 공장이 알아서 생산해서 벌어드린 수익으로 인센티브를 받으라고 했다. 당연히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치가 없으니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직접 수익을 내라는데 어떻게 수익을 내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생산량에 있었다. 수십년 간 중앙당이 정해준 목표치만 달성한 기업과 공장에서 알아서 생산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산하겠는가? 수요를 알지도 모르고, 돈을 번다는 개념도 없다보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과거의 생산량을 목표치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센티브도 없으니 의욕은 떨어지고 목표치만 생산하다보니 결국 생산력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자는 적고, 거기에다가 국영상점에다가 헐값에 납품하는 것보다 시장에 파는 것이 몇배 이상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눈치가 재빠르게 돌아가던 기업들이나 업자들은 물자들을 시장에 팔며 이득을 얻는 쪽을 택했다. 그야말로 이것의 악순환이 빅뱅을 일으켜 소련 말 물가폭등을 유발시킨 것이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율 생산, 시장 납품 체계와 인센티브 폐지를 도입했으나 급격하게 이루어진 변화는 소련의 전통적인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 동안만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 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 시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며 많은 러시아인들이 저임금 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으니, 이들은 적어도 '''삶의 질 측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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