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이오시프 스탈린/평가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부정적 입장과 평가 === ||[youtube(UqUrhwdMi8Y)]|| || 폴 켄고르 정치학 교수의 스탈린 비판 (출처: [[PragerU]]) ||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대숙청|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면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 '''스탈린이 악한이라는 표지는 그가 마음대로 도덕을 전복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권악징선|선이 악이 되었고, 악이 선으로 둔갑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 모든 진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인민의 행복, 정의, 인권은 물론 올바른 선악 관념까지 팽개치고 철저히 자신의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기준으로 펼친 스탈린의 억압적 철혈 통치를 비판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스탈린과는 반대노선을 달리며 자유주의적 개혁을 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더이상 없지만, 아버지의 그늘은 아직도 우리 곁에 드리워져 우리에게 자주 명령하며, 우리는 아직도 자주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중, 1967년) >'''사이코패스와 스탈린을 연결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권력|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숙청|사람의 목숨을 도구로 쓴다.]] 이런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입니다.''' >---- >[[권일용]][[https://m.youtube.com/watch?v=x_AZkOhZiIg|#]]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늬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단단하다...' 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때문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리는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 >-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빨치산]] 연락병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바의 증언. 뒤의 성은 증언자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잘라냈다. 그의 남편 바네치카는 전쟁 발발 직후 스몰렌스크에서 독일에 포로로 잡혀 죽을 고생을 하다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독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이 돌아오자 공식적으로 현역 복귀하여 여러 차례 수훈을 받았다. 그러나 종전 직후 그의 포로 이력을 문제삼은 [[NKVD]]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7년간 시베리아의 [[콜리마]] 굴라그에 수용되었다. 그동안 아내 발렌티나와 그의 아들은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전쟁 전 교사였던 발렌티나는 자신들에게 지워진 부당한 평가로 인해 직업을 잃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날라야 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07-508p]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대의 라이벌인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가장 자주 언급되며, 소련의 초강대국화와 경제개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집권기 극악한 학정을 저질렀다. 그는 스탈린주의와 관료제로 소련을 초강대국화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대숙청]], [[카틴 학살]], [[홀로도모르]] 등의 대학살을 저질렀으며 소련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비견되는 역사상 최악의 권위주의 국가로 운영했던 데다가 그의 유산들이 인류의 절반 가량을 장기간의 고통 속에 빠트렸다는 점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타국에서는 히틀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상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 중 하나라는 평가가 가장 일반적이다. 전례가 없는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공적을 널리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로 불린다는 점에서 그가 집권기간동안 얼마나 권위주의적이고 악랄한 통치를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면, 스탈린은 38도선 [[분단]]을 주도하고[* 물론 38도선 분단은 미국이 소련에게 제안한 게 발단이 되었지만, 이를 이용해 38도선 이북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방침을 먼저 정한 자는 스탈린이다.],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어 일조하고 지원한 인물이며, 결국 [[마오쩌뚱]][* 6.25 전쟁 직전에 [[조선의용군]]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켜 북한군의 전력을 증강시키는 데 일조했고, 이들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진격전에 최선봉에 선 주역들이다. 거기에 북진통일을 이루기 직전 [[인민해방군]]을 대규모로 파병해 결국 한반도의 정전 및 분단상태를 고착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과 더불어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정전 및 분단상태로 있게 한 주범이자 전범이다. 여러 창작물이나 매체에서는 악랄한 독재자 이미지의 전형으로 히틀러와 더불어 스탈린이 제시된다. [[폴 포트]]의 사망 당시 그를 풍자하는 만평에서조차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지옥에서 불타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스탈린은 방법이 어찌되었든 자국을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렸는데, 자국을 완전히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폴 포트]]나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스탈린의 악명과 그가 역사에 남긴 상흔은 엄청나다. 홀로도모르, 대숙청, 굴라그 건설, 독소전쟁 당시 인명 갈아넣기 등 하나만 저질러도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을 만한 짓을 수차례 저질렀으며 라이벌인 나치 독일마냥 국가 전체를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하고 반대파들이나 반대파로 의심되는 이들을 마치 고장난 부품을 폐기하듯 숙청했기에 인권적 면에서는 유대인 등 특정 계층을 지구상에서 말살하려 했던 히틀러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이를 넘어 '인명의 경시' 내지 '국민의 도구화'의 관점에서는 스탈린을 따라올 독재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http://news.bbc.co.uk/2/hi/europe/8334009.stm|<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의 옹호자들을 비난하다(Medvedev blasts Stalin defenders)>]]]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 다만, 메드베데프는 당선 직후 푸틴에게 통수권을 넘겨받으면서 72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남겼는데, 이는 스탈린의 대숙청 직전이던 [[1936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치 독일]] 시절부터 통수권 위임식이 시작된 독일에서 만일 총리가 비슷한 '''[[나치즘|전통]]의 기념''' 운운한다면 세계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생각하라.] 이외에도 대다수의 러시아 진보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서 한 동안 스탈린이 묻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멸칭]]까지 나올 정도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을 네 권 썼는데, 스베틀라나는 책에서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으며,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을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스탈린 장남의 아들로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했던 것. 만약 장남 야코프가 살아있었다면 야코프와 함께 아버지를 디스했을 것이라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스탈린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소송을 제기한것을 보면...(물론 야코프랑 예브게니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그리고 야코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스탈린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이 아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관계가 소원해 보였지만, 둘이 부모자식으로써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주코프에게 비밀리 명령을 하달하고, 아들도 아버지를 위해 적에게 투항해서 편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포로로 살다가 죽은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2916179|<스탈린 손자, 조부 명예훼손 소송 패소>]]] 심지어 스탈린 치하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에서 스탈린의 이름은 사실상 말해서는 안 될 자 취급을 받았다. 당 차원에서 스탈린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지만, 대조국전쟁이나 경제발전에 대한 업적들을 제외하면 결코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재임기에 수상을 지닌 알렉세이 코시긴 역시 이 시절을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으며, [[안드로포프]] 역시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렇듯 '''소련의 국가적인 입장조차도 스탈린을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국가적 쇠퇴와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민중을 탄압했던 스탈린이 되려 공산주의의 아이콘이자 조국의 수호자로 찬양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뒤로 집권한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로니, 안드로포프는 겉으로는 전임에 비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스탈린을 평가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흐루쇼프가 독선적이고 도전적인 통치를 일삼다가 실각한 것도,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브레즈네프가 차기 지도자로 집권한 것도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정치를 공산당 스스로가 어떻게든 막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수슬로프나 그로미코등을 비롯한 온건파들과 우스티노프, 안드로포프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이 좀 다르긴 했지만 공산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같은 관료계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 수행과 공업화에서만큼은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했지만, 결코 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레닌을 아직도 존경하고, 스탈린은 소련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며 비판했고,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