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은행강도 혁명가 == ||[[파일:ZiemeLc.jpg|width=100%]]|| || 1902년, 젊은 시절의 스탈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lin%27s_Mug_Shot.jpg|width=100%]]|| ||1911년에 찍은 [[머그샷]]. || 스탈린은 자퇴 후 1899년 10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친구 바노 케츠호벨리(ვანო კეცხოველი, Vano Ketskhoveli)가 일하고 있던 [[트빌리시|티플리스]] 물리 관측소[* Тифлисская физическая обсерватория. 트빌리시에 있던 천문, 기상, 자기 관측소였다.]에서 일했는데,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기록이었다. 한 달에 20루블을 받고 밤에 일했는데, 근무 중에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00년 5월 1일, 스탈린은 티플리스 위쪽의 산속에서 500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불법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세 달 동안 티플리스의 여러 공장과 철도 회사에서 [[파업]]이 발발한 파업에서 스탈린은 주요한 [[선동]]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티플리스에서는 2,000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진압됐다. 6개월 후인 11월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초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바투미|바툼]]으로 파견되었고, 1902년 2월 그 도시의 주요 공장들에서 11개의 비밀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다음 해인 1902년 2월 29일에 정유 공장의 6,000명의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행진했다. 물론 이것도 군대가 발포하여 15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스탈린 본인도 체포되어 4월까지 투옥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형벌)|유형]] 3년을 선고받았다. 물론 탈출하여 1904년 2월에 티플리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사회주의]] [[혁명가]]로써 시작한 첫 번째 [[유형(형벌)|유형]] 생활이었다.''' 이미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하고 감명받아 1903년 레닌이 이끌던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인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당시 혁명 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맡은 일은 '''[[자금]] 조달'''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자금 조달이고, 실상은 [[강도죄|강도질]]이였으며 위험하고 범죄였기에 누구 하나 맡으려 하지 않았다.[* [[멘셰비키]]는 이를 이유로 볼셰비키를 '''범죄 집단'''이라 비난했고, 훗날 레닌은 자금줄이 안정화되는 대로 이 일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금 조달에 자원했다.[* 당시 [[조지아]]에서는 [[부르주아]]를 털어먹는 건 도둑질이 아닌 [[의적]]이라 칭송했기에 스탈린도 자신의 행위는 도둑이 아니라 의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스탈린은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현금 수송차를 털거나, 인질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거나, 파업을 선동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고, 스탈린도 이를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했는지 이때의 행적은 잘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일 [[레프 트로츠키]]에게 '우리가 혁명하는 동안 놀고 먹던 [[잉여#s-2]]'라는 투의 비난을 받았고, 최근까지 정설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자들에 의해 조지아 문서 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스탈린의 젊은 시절 활약들이 밝혀졌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 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 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의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는 엄밀히 말하면 레닌파에 속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작지만 독립적인 정파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1905년 혁명으로 [[두마]]가 수립되고 제한적인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시기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까지 러시아의 정치무대는 [[틀:러시아 제국의 주요 정당|다양한 정당들과 이 정당들이 다시 좌우로 나뉜 정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중 가장 급진 좌익 노선에 있던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노동당]] 역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율리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의 두 거대 파벌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 양대 파벌 이외에도 [[레프 트로츠키]]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같이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지대의 유력인사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볼셰비키에 가까웠지만, 개인적인 관계등으로 인해 오히려 몐세비키와 자주 보조를 맞추는 인사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일단 차르 정부가 전복되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케렌스키]] 정부가 들어선 뒤, 또 한번의 혁명으로 권력을 독점하려 시도하던 볼셰비키와 [[카데츠]](입헌민주당 및 이에 합류한 우파)+[[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주류+멘셰비키 우파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고 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당 내의 소수계파였던 트로츠키파(그리고 그 지도자인 트로츠키)는 레닌파 볼셰비키의 편에 섰을 뿐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의 수도 역할을 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던 트로츠키가 수도 장악을 주도하는 등 레닌의 러닝파트너 역할을 한 것이다. 반면 레닌파(볼셰비키)의 핵심 간부급이었던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이 봉기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반대했고, 그나마 스탈린은 레닌의 뜻이 완강하자 "레닌님이 까라면 까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돌리기라도 했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아예 당 밖으로 봉기 계획을 폭로해버렸다가 레닌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것이다. 게다가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에 돌입하면서 [[소련군|붉은 군대]]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도 트로츠키였으니 정치인으로써 존재감을 따지면 '''트로츠키는 레닌보다 밀리긴 해도 대충 동급이라고 쳐줄수도 있는 수준'''이었던데 비해 '''스탈린은 레닌의 하급자 내지는 부하로써 나름 확고한 존재감과 실적이 있었다'''는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0월 혁명을 당연히 레닌이(레닌파가) 주도했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레닌파와 트로츠키파가 연합'''해서 케렌스키파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고 여기던 당대인들의 인식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인물은 볼셰비키 정부를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부" 라고 불렀고, 심지어 당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수장인 레닌이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였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 주로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실무'를 주로 담당하는 역할, 특히 그중에서도 지저분하고 위험해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주로 도맡아 처리하는 역할이었기에 레닌의 신임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 스탈린의 맞수들이 스탈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쟁쟁한 인물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조지아 촌놈' 스탈린에 대비하여 '레닌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자 코민테른 의장'이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대회 의장이자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던 [[레프 카메네프]],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자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그 조지아 촌놈이 당시까지는 별로 화려할 것도 없는 '행정사무담당자'로 여겨지던 서기장(총비서)라는 직위에서 담당하던 역할이 딱 봐도 삐까번쩍한 저런 직함들에 전혀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스탈린에 대한 듣보잡 잉여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은 그에 대한 트로츠키의 디스가 워낙 찰졌기 때문인데, 그런 디스를 볼 때는 먼저 비교대상을 트로츠키로 할 경우, 레닌이 아닌 다른 인물은 어차피 잉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좀 우습게 비유하자면 레닌을 1티어,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다른 인물을 2티어라 하면 트로츠키 혼자 1.5티어를 찍고 있는 것이니 스탈린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도 혁명시기의 활약상을 트로츠키와 비교하면 "너 잉여였잖아?" 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스탈린에 대한 트로츠키의 디스는 (트로츠키 개인의 오만한 성격 이전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 분석이나 증언이 아니라 '''정적에 대한 공격''' 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을 이기기 위해, 이후에는 자신을 실각시키고 추방한 스탈린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에게 정치적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 트로츠키의 처지였고, 당 내 장악력과 실무능력에서 우위였던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의 우위는 대중적 지명도 및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활약상에 있었으니 자신이 우위인 부분을 내세워 스탈린이 자신만 못하다고 공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런 정치적 공세를 스탈린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약점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이후 소련의 절대권력자로 자리잡은 스탈린 역시 한때 여러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의 분석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려 이런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해석 역시 종종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런 범죄 행각 때문에 1급 수배자가 된 스탈린은 7번이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방만한 관리와 스탈린의 정치력 덕에[* 죄수들을 선동해 싸움을 붙인다거나 주변 여인과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유형지에서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스탈린은 전부 다 빠져나갔다.[* 스탈린은 집권 후 이때 편의를 봐준 간수와 마차에 태워준 마부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우습게도 스탈린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트로츠키에게도 시베리아 유형 당시의 소소한 일화들이 남아있는데, [[Macho|마초]]적이고 거친 스탈린의 일화와는 달리 트로츠키의 일화는 유형지에서 만난 [[아나키즘]] 계열의 [[정치범]]이 소규모 공동체들의 모임으로 구성되는 탈 중앙집권적 정치체를 예찬하자 "그럼 그 아나키즘 사회에서는 철도는 누가 운영하오?"라고 받아쳐서 1승했다거나, 탈출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안내해주던 사회혁명당 지지 성향의 소년과 대화하다 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이스크라#s-2]] 지)의 기사 내용에 불만을 품은 소년이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를 더 이상 길 안내하지 않겠다고 하자 "당 기관지의 기사 내용에 나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라고 반박하여 계속 길 안내를 하게 만들었다는 등, 대단히 [[키보드 워리어|키워]]스러운 일화가 많다. 인물의 성격 차이가 이런 면에서도 드러나는 모양이다.] 또한 이 7번의 도주 탓에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게 '너 사실 [[러시아 제국]]의 [[프락치]] 아니냐?!'라는 투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실 이 역시 상당 부분은 까기 위해 이유를 찾아낸 정치적 공세라고 봐야 할 것이, 러시아 제국 당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탈출은 현대의 교도소와는 비교하기 무의미할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유형의 목적 자체가 귀찮은 정치범을 정치의 중심인 수도에서 떼어놓는다 + 시베리아 오지의 개발 인력 충당 정도라 별다른 감시가 없었기 때문. 7회면 좀 많은 편이긴 하나 유명 러시아 혁명가치고 시베리아 유형 갔다가 탈출 한두 번 못해본 인물은 드물고, 서너 번쯤 탈출 성공도 찾기 어렵지 않다. 당장 트로츠키 자신도 제정 시기에 시베리아 유형을 2번 가서 2번 다 탈출 성공했다.] 1905년 12월 25일, 스탈린은 [[핀란드 대공국]] 탐페레에서 열린 [[https://ko.wikipedia.org/wiki/러시아_사회민주노동당_제1차_대표자회|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 conference. 대회(congress)와는 다르다.]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대표자회 장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탐페레로 변경된 것을 전달받지 못해서 페트로그라드로 갔다가 탐페레까지 갈 기차표 값이 없어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여비와 식대를 빈대붙었다고 한다.] 이후 스톡홀름의 당대회에 참여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만나 친구가 되었고, 런던에 갔다가 항구 노동자들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던 걸 구해진 계기로 [[막심 리트비노프]]와도 인연이 생긴다.[* 후일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이 자기를 숙청하지 않은 건 그때 자기가 구해줘서 그런 거라는 내용의 농담을 종종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스탈린이 아니고 그냥 주가슈빌리였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 동료인 알레크산드레(알리오샤)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ალიოშა) სვანიძე, [[1886년]] ~ [[1941년]] [[8월 20일]])의 남매인 에카테리나(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1885년]] [[4월 2일]] ~ [[1907년]] [[11월 22일]])와 만나 1906년 결혼도 하여 아들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두었으나, 잦은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결국 카토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 참가한 스탈린은 매우 침울해 했으며, "아내는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 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급기야 스탈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장례식 막바지에 아내의 무덤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함께 묻어버리라고 오열했다. 그 순간 [[오흐라나]][*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첩자#s-1]]들이 [[장례식장]]을 습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스탈린은 금세 감정을 추스른 뒤 달아났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