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마오쩌둥]] == || [[파일:스탈린 70회 생일 기념식.jpg|width=100%]] || ||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 || 공산주의 원조국이자 전후 양강으로 떠오른 [[소련]]의 위세 때문에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교황이었고 각국의 공산주의자는 아무리 자국에서 독재를 펼쳐도 스탈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는 중국에서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렸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혁명관의 차이를 보였으며,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게 보여도 혁명 노선을 둘러싸고 둘은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소련 및 소련이 조종하는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건립 직후부터 [[중국국민당]]을 원조했다. [[중국국민당]]은 원래 남방으로 도피해온 [[쑨원]]의 개인 사조직에 가까웠으나, 소련 및 [[코민테른]]이 제국주의의 포위망을 돌파할 동맹자로 국민당을 선택함에 따라서 소련의 전폭적인 정치군사적인 지원으로 혁명정당으로 탈바꿈하며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고 [[국민당의 1차 북벌|북벌]]을 성공시키고 중국을 느슨하게나마 부분 통일하였다. 당시 갓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해 이중당적을 갖고 국민당에 협력한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세력확대를 경계한데다가, 국민당내 공산당 세력을 경계하던 자본가들과 해외 열강들은 장제스를 부추켜 북벌 도중인 1927년 4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장제스의 배신으로 공산당은 70% 이상의 당원이 학살당한다. 장제스의 이런 기습에 코민테른과 공산당은 어쩔 줄 모르고 몇달간 우왕좌왕했고, 장제스는 [[난징시|난징]]에 정부를 세우고 국민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런 장제스의 움직임에 겨우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통해 러시아의 예를 쫓아 도시폭동을 일으키라고 중국공산당에 지령하였고, [[저우언라이]]에게는 8월에 [[난창 폭동]], 난창폭동이 실패한 이후에는 12월에게 [[리리싼]]에게 지령하여 [[광저우 폭동]]등의 여러 봉기를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되고 중국공산당은 수많은 당원을 잃는다. 마오쩌둥도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자신의 고향에서 가까운 [[창사]]에서 9월 [[추수폭동]]을 일으키지만, 역시 진압된다. 마오쩌둥은 코민테른의 전략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그동안 자신이 내세웠던 농촌중심의 혁명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가 농촌을 근거로한 게릴라전을 펴면서 점령지를 넓혀간다. 이는 사실 코민테른의 지원이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개시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소련과의 연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만든 해방구에 코민테른과 연줄이 있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도피해 오면서 오히려 마오쩌둥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마오쩌둥은 자기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는 스탈린이나 코민테른이 굉장히 불쾌했겠지만, 코민테른, 실제로는 코민테른을 조종하는 스탈린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따랐으며, 소련을 "사상의 조국"으로, 스탈린을 "사상적 교황"으로 여겼다. 이러한 코민테른이나 소련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코민테른으로부터 반혁명 수정주의자 집단으로 찍히는 순간 1920~1930년대 모든 공산당원들의 적으로 찍히는 것은 물론이요 활동할 역량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는 판이었다. 실제로 초기 중공 지도자인 [[천두슈]]는 스탈린이 규정한 "이단"인 트로츠키주의자로 찍히면서 당에서 제명되고, 결과적으로 중국 혁명사에서 비중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마오쩌둥의 해방구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라는 국가로 선언하지만, 마오쩌둥은 명목상의 주석에 올랐을 뿐, 실제로는 코민테른(실제로는 스탈린)이 파견한 28인의 볼셰비키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군사작전을 세웠다.[* [[천두슈]]가 당을 이끌던 중국공산당 초기(1920년대 초반)에는 코민테른의 재정 지원이 절대적이었지만 (위에서도 나오지만 이는 광저우시절의 국민당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이 게릴라전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절은 천만 정도의 인구를 보유하던 [[장시성]]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금을 걷을 정도였기 때문에 스스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1930년대)에는 소련도 경제개발 와중에 외화가 부족한데다가, 외교적 고립을 부를 수 있어서 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성립 초기와는 달리 해외 혁명활동에 대한 지원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영역은 해안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소련이 지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오토 브라운]]이 지휘한 [[제5차 초공작전]]에서 괴별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중국 공산당내에서 코민테른 추종세력은 거의 입김이 사라지고, 다시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떠오른다. 결국 대장정 중반 시점부터 마오쩌둥은 소련의 영향력을 점점 중국 공산당 내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 [[옌안]]해방구 시절이 되면 마오쩌둥은 당내 [[정풍운동]]을 주도하여 코민테른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든지, 아니면 실각하든지 택일하도록 강요했고, 이들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왕밍]]같은 사람은 당에서 비주류로 찍혀 결국 실권에서 멀어진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차마 스탈린주의자라고 매도할 수 없어서 국공내전 이전에는 "극좌 모험주의자", 집권후에는 "우파 투항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 뿐이므로 이런 규정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가졌던 불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스탈린대로 자신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농촌을 근거로 유격전을 하자는 마오쩌둥을 "[[마가린]](사이비) 사회주의자"라고 매도했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항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중일전쟁 끝날 때까지 오히려 장제스와 더 친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의 배신자로 극렬히 비판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국공내전 말기까지 중공의 완승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중공을 전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현대판 [[남북조 시대]]를 원했는지,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에게 장제스와 휴전하라며 권고하기도 했다. [[https://news.youth.cn/gn/201602/t20160222_7659945.htm|중국청년보]] 1949년 국공내전 도중 [[난징]]이 함락되자 소련 대사관을 [[광저우]]로 이전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영미의 정보 입수를 위한 전략적인 행동이었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오쩌둥은 소련에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하자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전보다 많은 거액의 차관을 제공, 기술고문을 파견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1949년 마오쩌둥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높이며 태세를 전환하였다. 다만 처음에는 마오를 경계하며 만나지 않아 마오쩌둥이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마오쩌둥은 스탈린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스탈린의 지시 하에서 소련은 여러 가지 선진 기술을 중국에 전수했고, 중국은 열심히 이를 배웠다. 예를 들어 1949년에는 중국은 [[프롭기]]도 못 만들었으나, 1955년이 되면 제트기인 [[MiG-17]]을 수백기나 제작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는 공짜는 아니었다. 소련은 기술이전의 댓가는 식량으로 톡톡히 챙겼고, 중국은 [[대약진운동]]에서 엄청난 아사자가 발생하는 와중에서도 계속 식량으로 대금을 결제해야할 정도였지만, 기술 이전 자체가 우방국에 대한 엄청난 호의는 맞기 때문에 마오쩌둥이나 중국 지도부는 이를 고맙게 생각했다. 스탈린 생전에는 중국은 동유럽 위성국처럼 소련에 고분고분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감히 비판을 할 수 없었으나, 스탈린이 사망하고 집권한 [[흐루쇼프]]와 결별하면서 중국은 소련의 꼬붕노릇을 하던 방침을 폐기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스탈린 사후에 쓴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차이를 이유삼아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급격한 산업화로 [[독소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처리를 둘러싼 미국과의 흥정에서 유리하게 패를 가져감으로써 세계의 반을 적화시킨 공로는 마오쩌둥도 인정했기 때문에, [[니키타 흐루쇼프]]처럼 스탈린을 아예 "악당"이나 "사회주의 배신자"라고 격하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스탈린을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남겼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이런 평가를 [[덩샤오핑]]이 훗날 한편으로는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과오라고 비난하며 청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공적을 인정하면서 써먹었다.[* 덩샤오핑 역시 스탈린에 대해서 중국에 모질게 굴었지만 어쨌거나 큰 도움을 준 인물로 높이 평가했으며 반면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약에 쓸려고 해도 쓸모가 없던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덩샤오핑과 그런대로 괜찮은 인터뷰 분위기를 유지했던 [[오리아나 팔라치]]와 덩샤오핑이 격하게 충돌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었는데 팔라치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한 것은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다고 주장하자 덩샤오핑은 손사레를 치면서 서로 의식화교육하지 말자면서 같은 주제로 계속 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표현은 훗날 한국에서도 자주 쓰인다. [[문재인]]도 [[박정희]]를 평가할 때 공칠과삼이라는 말을 써먹었다.[[https://news.tvchosun.com/mobile/svc/osmo_news_detail.html?type=news&contid=2014112190255|#]] ] 중소 관계가 최악이었던[*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국-소련 국경분쟁|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도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는 선두에 나왔을 정도였다. 비록 그 시점에 저 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