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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 레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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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병원 퇴원 이후 그리고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 === 3월 초 그가 풀려난 뒤에도 주변 음악가들과 친구들은 예고르와 얽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상태였기에 예고르는 1인 밴드로 혼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며 앨범 "전체주의"(Тоталитаризм),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쥐덫"(Мышеловка), "아주 좋소!!!"(Хорошо!!), "빨간 앨범"(Красный Альбом) 등 5개의 앨범을 제작하고 여러 크바르티르니크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녹음 중 일부는 훗날 "돼지 앞에서의 유리알 유희"(Игра в бисер перед свиньями), "허공 속으로 향하는 노래들"(Песни в пустоту) 등의 앨범으로 발매된다.] 흔히 민방위 하면 상당히 비판적이고 날것인 가사 그리고 노이즈가 주를 이루는 락/펑크 스타일의 노래를 떠올리지만[* 이는 단순히 열악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방위 특유의 이념적, 음악적 무기로도 기능하였다. 이후 레토프는 1989년 세르게이 피르소프의 소개로 레닌그라드에서 밴드 [[아우크치온]]의 고품질 음악 장비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는데 해당 장비들을 사용해 본 뒤 이런 고품질 녹음 장비는 자신의 음악에 있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없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피르소프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일했는데 레토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의 이름을 알리고 [[빅토르 초이]]의 그 유명한 캄차트카 보일러실 취직을 도와주는 등 80년대 러시아 락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시절까지 레토프의 노래는 컬트스러운 가사와 웅웅거리는 듯한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1987년 이후 몇몇 노래들을 제외하면 라이브에서는 점차 듣기 힘들게 된다. 이 시절에도 레토프는 정부 당국과 지속적인 마찰을 빚어 왔다. 1986년 옴스크의 지방 언론인 "베체르니 옴스크"(Вечерний Омск)의 사설 "[[https://grob-hroniki.org/article/1986/art_1986-05-30a.html|다른 이의 목소리대로(С Чужого Голоса)]]"[* "С Чужого Голоса"는 앵무새처럼 남의 목소리를 따라하기만 할 뿐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숙어이다. 즉, 이 제목은 (당국의 입맛에 맞는) 러시아식 음악 대신 (불건전한) 서구 음악을 맹목적으로 따라하기만 할 뿐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지역 공산당이 사실상 강요한 사설이나 다름없다. 여담으로 [[데데테]] 또한 우파에 거주하던 시절 우파 지역의 일간지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설로 공격당한 일이 있다.]이 대표적인 사례로, 해당 사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기할 사항으로, 해당 사설에서는 당시 "썩어빠진 젊은이" 작업에 참여한 민방위의 멤버로 셋을 언급하며 이들을 각자 가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고리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Летов)는 올레크 스베토프(Олег Светов)가 되었고, 안드레이 "쿠르트" 바신(Андрей Васин)은 알렉세이 바긴(Алексей Вагин), 콘스탄틴 "백치 쿠자"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는 니콜라이 로가초프(Николай Рогачёв), 안드레이 "존 더블" 바벤코(Андрей Бабенко)는 안드레이 디덴코(Андрей Диденко)가 되었다. 보면 알겠지만, 고의적인지는 몰라도 실제 성씨와 비슷하게 비틀었다.][* 이후 이 가명들은 일부 마그니티즈다트에 실제 이름 대신 올라가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cFhHaiWCM|#]] ] "쥐덫" 앨범에 실린 노래 "황색 언론"(Желтая пресса)은 이에 대한 레토프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이 노래는 1986-87년 사이 일부 공연에서 등장한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사실상 묻혔다. 그러나 1998년 (뜬금없이?) 한 공연에서 레토프가 선보인 바 있다.][* [[https://omskgazzeta.ru/all-news/13-let-bez-egora-letova/|문제의 기사가 작성되고 33년이 지난 뒤 작성된 베체르니 옴스크의 또 다른 기사.]] 2019년 작성된 이 기사는 레토프를 "뛰어난 러시아의 락 뮤지션이자 시인"(выдающийся российский рок-музыкант и поэт)이라 기리고 있어 시대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외 아파트에서 앨범을 작업하거나 공연을 열던 중 경찰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86년 여름 예고르는 올렉 및 예브게니 리셴코(Олег/Евгений Лищенко) 형제의 락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 1979년 리셴코 형제가 옴스크에서 창설한 밴드. 개러지 락/포크, 포크 락, 하드 락, 사이키델릭 락 등의 장르에서 활동했다. 1990년 예브게니 리셴코가 폐암으로 사망한 뒤에는 클락손 감(Клаксон Гам)으로 이름을 바꾸어 올렉 리셴코가 중심이 되어 1인 밴드로 존속했고, 타 음악과들과 협업하며 활동하다가 2004년 올렉 리셴코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었다.]에 참여하여 드러머로 활동했다.[* [[얀카 댜길레바]]의 앨범에서 보이듯 레토프는 많은 음악가들과 협업했으나 이들의 음악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충분히 가미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피크 클락손 시절은 예외로 이 시절 노래들은 전부 피크 클락손의 스타일을 잘 담고 있다. ~~사실 당시 레토프의 스타일과 리셴코 형제의 스타일이 여러 부분에서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 피크 클락손은 앨범 "잉여 녹음들"(Лишние Звуки)을 녹음하던 중이었는데 이에 지쳐 기분 전환할 겸 프로젝트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아돌프 히틀러]]의 러시아식 표기. 러시아어에는 /h/ 발음이 없어서 현대에는 이를 Х(kh)로 전사하지만 과거에는 Г(g)로 전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크라이나어]] 같은 경우 아예 Г가 유성음 /h/로 발음되는 등의 영향도 있고 해서 러시아권 사람들은 Х보다는 Г가 /h/에 더 가깝다고 인식했다. 지금도 독일어권 인명/지명은 여전히 Г로 표기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를 발족했다.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며 예브게니 리셴코는 소련 말기의 체제의 부조리함을 나치 체제에 비유한 노래를 여럿 작곡했고, 이들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레토프는 가사에 매우 흡족해 했다. 이후 이 셋은 리셴코 형제의 아파트에서 짧은 리허설 후 3시간 만에 20분짜리 "반파시스트적, 반고프닉적 의도를 담은"(Программа задумывалась антифашистской и анти-гопнической) 앨범 "병원"(Лечебница)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1986년 옴스크 라이브"(Live in Omsk 1986)라는 제목으로도 유통되었다. 녹음 당시 괴성과 고함을 질러대며 녹음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류베르치|류베르]]의 어그로를 끌어 싸울 뻔했다고 한다.] > Принципом написания песен стало доведение до откровенного и поражающего абсурда воззрений нацистской идеологии, в котором — словно в зеркале — отображалась бы другая идеология: зверство советского тоталитаризма. > ---- > 노래 작곡의 원칙은 나치 이념의 시선을 솔직하고 또 충격적으로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마치 거울처럼 또다른 체제를 반사시켜 보는 것이었다. 바로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잔혹함 말이다. (올렉 리셴코의 증언) 1987년 4월 12일 노보시비르스크의 치칼로프 문화궁전(ДК Чкалов)에서 제1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해당 페스티벌은 관제 페스티벌이긴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을 받아 열린 노보시비르스크 최초의 락 페스티벌이었다. 당시 페스티벌 참가 예정이었던 즈부키 무[* Звуки Му('무' 소리). 1983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인디 밴드로 얼터네이티브 락, 포스트 펑크, 아방가르드 락 음악을 선보였다. 몇 차례 활동 중단을 거치면서도 계속 활동해 왔으나, 2021년 밴드의 리더였던 표트르 마모노프(Пётр Мамонов)가 코로나19로 사망하면서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및 [[아우크치온]]이 당국의 검열 문제 및 '사상적 이유'로 참가가 거부되었고, 옴스크의 3인조는 이 페스티벌의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항상 크바르티르니크나 비공개 소규모 라이브만 전진해 왔던 예고르 레토프에게 있어 첫 공식 무대의 데뷔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고, 사회자는 이들을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пай-мальчики из Омска)이라고 소개했다.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은 "병원"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다수와[* Mein Kampf(나의 투쟁), Эй, брат любер!(어이, 류베르 형제!), Тридцать доводов(서른 가지 이유), Железный карантин(강철의 격리), Третий рейх(제3제국), Сядем на танки(우린 탱크에 앉아)] 레토프가 작곡한 곡[* Тоталитаризм(전체주의), Я бесполезен(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Зоопарк(동물원), Страна дураков(바보들의 나라). 이 중 Я бесполезен과 Зоопарк는 정신병원 수감 전에 작곡한 노래고 나머지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후 만든 노래이다.]을 불렀지만 사회자의 소개가 무색하게도 이들의 공연은 20분 만에 중단되는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이 때 레토프와 리셴코 형제 말고도 동료 음악가인 올렉 수다코프도 같이 무대에 올랐다. (단 공연에 참가는 하지 않음) 이 때 밴드 멤버들이 자기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뭐라 소개해야 할 지 몰랐던 수다코프가 어물거리다 자신을 "매니저"로 소개하였는데, 레토프가 맞장구를 치면서 수다코프의 예명은 "매니저"(마나게르)로 정착되어 버렸다. [[http://rockvkadre.ru/legendy-otechestvennogo-andegraunda-pik-klakson-klakson-gam/|참고 자료]]] [youtube(xSjW2gF2X40)] 당시 공연. 한동안 부틀랙으로만 유포되다 2016년 불 테리어 레코드(Bull Terrier Records)에서 리마스터링되어 공식 발매되었다. > После первых отыгранных композиций «официальные лица», сидевшие в первых рядах, просто впали в состояние ступора. Сарказм песен был совершенно не понят жюри. Его члены были уверены, что видят перед собой на сцене, самых что ни на есть настоящих фашистов, призывающих молодёжь к идеалам, воспетым Геббельсом. Летовские же песни, включённые в выступление, поразили всех своим неистовым запалом, своей яростной антимилитаристской мощью. Зал, буквально, бесновался и сходил с ума. Но когда Егор стал в исступлении и с диким хохотом кричать на весь дворец культуры: «мне смешно на вас, страна дураков!», это было уже слишком. Аппаратуру отключили и группу фактически согнали со сцены. Так Советский Союз узнал о «Гражданской Обороне», а по стране пошло гулять выражение: «Панк рок существовал в СССР только 20 минут - во время выступления «Обороны» в Новосибирске. Всё остальное — это уже пост-панк!» > ---- > 첫 노래가 연주되자 좌석의 첫 줄에 앉아 있던 "관리"들은 그야말로 마비되어 버렸다. 심사자들은 노래의 풍자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말았다. 장담컨데 이들에게 있어 무대에 선 이들은, 젊은이들을 괴벨스가 불러제끼는 이념으로 끌어들이는, 그 누구보다 가장 극렬한 파시스트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공연 중에 포함된 레토프의 노래들은 모두를 격렬한 분노로 들끓게 했다. 청중은 문자 그대로 미쳐버렸다. 특히 예고르가 거친 웃음과 함께 문화궁전 전체에 "바보들의 나라, 전부 웃기기 그지 없어!"[* 레토프의 노래이자 당시 공연의 마지막 곡이었던 "바보들의 나라"(Страна дураков) 가사.]라고 광란의 외침을 질렀을 때 이들은 너무 나가버린 것이었다. 즉각 장비의 전원이 내려갔고 이들은 무대에서 그대로 쫓겨났다. 그렇게 소비에트 연방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소련에서 펑크 락은 노보시비르스크의 "오보로나"가 공연하던 딱 20분 동안 존재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전부 포스트 펑크이다!"라는 말이 전국에 돌게 되었다. (당시 관련자 증언 1) > Когда группа сыграла первые композиции, в рядах официоза начался столбняк, а зал в полном смысле сходил с ума. Это был дебют Летова и его друзей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и они умудрились устроить в столице Сибири натуральный Пер-Лашез. «Оборона» со своими антисоветскими текстами и грязным гаражным звуком начала крушить все подряд. Охваченный волной дикого кайфа, звукорежиссер «Калинова моста» Александр Кириллов схватил лист бумаги, написал печатными буквами: «Кто литовал?» и пустил эту парфянскую стрелу по рядам в направлении жюри... > ---- > 밴드가 첫 노래를 연주했을 때, 관련자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을 때렸고, 청중은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이 공연은 레토프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 대형 무대 데뷔 공연이었고, 이들은 시베리아의 수도에 페르 라셰즈를 열어버리고야 말았다.[* 노보시비르스크는 러시아 제3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으로, 시베리아의 가장 중심지가 되는 도시이다. 페르 라셰즈는 프랑스의 유명한 공동묘지이다.] "오보로나"의 반소비에트적 가사와 거친 개러지 락의 소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거친 광란의 파도에 휩싸여, 칼리노프 모스트[* Калинов Мост. 1986년 드미트리 레뱌킨(Дмитрий Ревякин) 등이 결성한 노보시비르스크의 락 밴드.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민방위와 접점이 있었으며, 이들의 초기 노래 중에서는 얀카 댜길레바와 협업해 쓴 곡도 있다. 여담으로 한 인터뷰에서 [[빅토르 초이]]는 이들을 언급하며 음악을 칭찬하기도 했다.]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는 종이 한 장을 낚아채 큼직하게 적었다. "지금 누가 노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심사관들이 앉은 열을 향해 파르티잔 샷을 쏘듯 정확하게 종이를 날렸다... (당시 관련자 증언 2) > Тогда это был наш первый концерт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До этого все в подвалах каких-то играли, дома играли, в основном у меня в квартире давали концерты человек на десять-пятнадцать. После фестиваля, когда вернулись в Омск, я две недели записывал свои альбомы — две недели пока шла бумага из Новосибирска в Омск. Бумага от фестиваля — там выступили. Написал кто-то из организаторов, какие-то комсомольцы. Бумага имела хождение в Омске: вызывали всех подряд. Меня сразу же вызвали в психушку и решили там оставить. Т.е. вызвали, сказали что-то про новосибирский фестиваль и добавили, что «сейчас за тобой санитары придут и все». И пошли за санитарами. Тут я дверь открыл и убежал. Сразу «скорая помощь» на дом приехала — меня забирать. У меня с собой было сорок рублей и сумка со свитером. На сорок рублей я купил билет на поезд до Москвы и уехал. В бегах был три или четыре месяца. Начался розыск — это был как раз 1987-й год, все лето. Не помню, виделись мы с тобой тогда или нет? Я был в Симферополе, Киеве, Москве, Ленинграде. Я постоянно ездил. Познакомился с Шевчуком — со всей тусовкой. А потом позвонил домой, мне сказали, что дело прекратили и меня искать перестали. Вернулся с опаской, даже дома сначала не жил. Смотрю: меня никуда уже не вызывают. Всю зиму вообще не работал — никуда не принимали: я, вообще-то, художник. > ---- >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어디 작은 지하실이나 집에서, 내 아파트에서 많아봤자 열에서 열다섯 명 앞에서 연주했다. 공연 이후 옴스크로 돌아와서 나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옴스크까지 소식이 전해질 2주 동안 앨범을 녹음했다. 어떤 콤소몰 조직원이, 해당 페스티벌의 관련자 중 한 사람이, 페스티벌에서 소식을 써서 보냈다. 소식이 옴스크 전체를 돌았고 관련자 모두가 소환당했다. 그들은 즉각 정신병원으로 날 불러 거기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날 불러 노보시비르스크 공연에 대해 뭔가 말했고 "당신에게 병원 간호인이 갈 것이고 그게 전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간호인을 부르러 갔다. 이에 난 문을 열고 바로 튀었다. 그 직후 앰뷸런스가 날 데리러 집에 도착했다. 당시 내 수중에는 40루블과 스웨터 하나가 든 가방이 있었다. 40루블로 난 모스크바행 기차표를 사서 떠났다. 난 한 석 달에서 넉 달 정도 도망쳤다. 수색이 시작되었다. 1987년 초였고 수색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서로를 다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에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심페로폴까지는 거의 4,500km에 달한다.] 난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난 [[데데테|셰프추크]]와 온 관중들을 만났다. 그리고 난 집에 연락했고, 가족들은 사건이 종결되었고 더 이상 날 찾지 않는다고 전해주었다. 난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가 보았다. 처음엔 아예 집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난 둘러보았다. 그 어디서도 날 찾지 않았다. 겨울 내내 일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난 고용되지 않았다. 이제 난 진정한 예술가였다.[* 소련 시절 직업이 없다는 것은 형사 처벌의 사유가 되었으며 모든 인민들에게는 직장이 배정되었다.] (레토프의 증언 1) > Весной 1987-го мы вместе с «Адольфом» наскандалили, дали, что называется, говна на Новосибирском фестивале, на коем я, кстати, и познакомился впервые с Янкой, Чёрным Лукичём и другими, впоследствии героическими личностями. Снова начались гонения и дрязги. Меня попытались снова, запихнуть в психушку, но с благословенной помощью Янки я расторопно «двинул лыжи» и благополучно проездил все лето и осень автостопом по стране, находясь в розыске. > ---- > 1987년 봄 "아돌프"와 함께 우린 거한 사건을 쳤고, 그들의 말마따나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에 똥물을 뿌렸다. 어쨌든, 난 거기서 [[얀카 댜길레바|얀카]]와 초르니 루키치[* Чёрный Лукич. 바딤 쿠지민(Вадим Кузьмин)이 이끌던 노보시비르스크의 락 밴드. 쿠지민과 레토프는 초르니 루키치의 전신인 밴드 스핀키 멘타(Спинки Мента) 시절 같이 활동했으며, 이후에도 서로의 노래를 커버하는 등 상당히 친했다.] 그리고 다른 영웅적 면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수색과 압류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자들이 날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얀카 일행의 너무나도 고마운 도움과 함께 난 재빨리 챙길 걸 챙겨 수배 명단에 오른 채 여름과 가을 내내 안전하게 히치하이킹을 하며 돌아다녔다. (레토프의 증언 2, 1990년) 사실 첫 곡이었던 "나의 투쟁"(Mein Kampf)부터가 "짝불알 마조히스트 시클그루버 상병은 깜빵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네!" 같은 가사로 이루어져 있긴 했어도 욕설을 자체 검열하는 등[* 예를 들어 마지막 노래인 바보들의 나라(страна дураков)에는 원래 "좆같기 짝이 없다"(какая хуйня)라는 가사가 있지만, 보컬을 맡았던 레토프는 욕설 부분인 좆같다(хуйня) 부분은 일부러 묵음 처리를 했다. ~~근데 썅(бля)은 검열하지 않았다~~] 아돌프 기틀레르의 멤버들도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가히 "스캔들"이라고 할 만했다. 80년대 말까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도 아닌 노보시비르스크와 같은 지방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제대로 퍼지지 않았고, 펑크나 히피나 파시스트나 똑같이 '인민의 적'으로 인식되었다. 한때 한국에서 반체제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았던 역사가 있듯 소련 시절에도 사상적으로 좀 불순하다 싶으면 파시스트 아니면 디시덴트(반동분자)라는 딱지가 달라붙었다. ~~요약: 약 빠는 놈들을 쫓아냈더니 약 빤 놈들이 몰려왔다~~[* 원래라면 공연을 뛰어야 했던 즈부키 무는 과거 [[대마초]]에 손을 댄 전력이 있었다.] > "— Дружок, после тебя еще будут выступать группы. Ты че там? Тебе что, похуй на наш фестиваль, да?" > "Сегодня мы закончили." > "Ты понял меня или нет?" > "Понял." > ---- > "— 여러분, 여러분 뒤에 공연이 예정된 밴드가 여럿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우리 페스티벌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런 겁니까?" > "오늘 우리 공연은 끝났습니다." > "지금 제 말 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까?" > "아 이해했다고요." > ---- > 공연이 중단된 후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와 예고르 레토프 간에 오간 짧은 대화 (위 영상 기준 27:14부터) 그렇게 사고를 친 레토프는 집을 떠나 얀카와 함께 도망길에 올랐다. 반 년 가까이 둘은 보초를 서가며[* 과장이 아니다. KGB의 추적을 우려하여 심할 때는 서로 불침번을 서가며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상당한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며 숨어지냈으나 그 와중에도 자주 크바르티르니크[* 당시 소련의 개인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던 작은 라이브 연주회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 언더그라운드 밴드 등 당시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음악가들 및 밴드들은 크바르티르니크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음악을 알렸다. 참고로 당시 크바르티르니크를 조직하는 행위는 발각될 시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음악가들은 하루 정도 유치장에 구류되는 선에서 끝날 수 있었고, 조직한 사람은 최악의 경우 몇 개월 간 금고를 살 수도 있었다.]에 나타났다. 다행히 1987년 겨울 레토프의 친척들이 손을 써 주었기 때문에 추적이 멈추었고 그렇게 "옴스크의 히피 펑크"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구권 문화에서 "히피"와 "펑크"는 웬만해서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지만, 당시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문화에서는 "공식적이지 않은 이데올로기"들은 전부 섞여 하나로 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주류 문화에 대한 반대적 입장을 취했는데, 그러다 보니 소련 시절에는 반소련을 외치던 밴드들이 [[소련 붕괴]] 이후에는 다시 소련 시절과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가 너무 개판이다 보니 소련에 대한 향수라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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