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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 레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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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파드, 포세프 및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결성과 강제 해산 === 1980년대 초반에 옴스크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선구자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클리포프(Александр Клипов)가 결성한 프로젝트성 밴드 자파드(ЗападЪ)에서 활동하였다. 클리포프는 70년대 서구에서 유행하던 락과 뉴웨이브 장르를 바탕으로 활동하였으며 자파드도 마찬가지로 추정된다. 자파드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파드는 클리포프와 레토프의 불화로 해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포세프 및 극초창기 민방위 앨범에 실린 노래 중 "이 밤에"(В эту ночь)는 확실히 클리포프와 레토프가 같이 만든 자파드 시절의 곡이다. 하지만 다른 곡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술할 언더그라운드 음악계 탄압 당시 클리포프도 강제로 입대당했으며, 1987년 제대하였다. 이후 클리포프는 "이반 모르크와 새로운 유럽인들"(Иван Морг и Новые Европейцы)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였다. 여기서 "이반 모르크"는 클리포프의 예명으로 "모르크"는 영어 단어 morgue(시체 안치소)에서 가지고 온 이름이 맞다.] 1982년 레토프는 자신의 친구인 안드레이 바벤코(Андрей Бабенко)와 함께 개러지/하드/사이키델릭 락 밴드 '포세프(Посев)'[* 한국어로 '파종', '파종한 종자' 등을 의미로 러시아의 반사회주의 집단이던 НТС(Национально Трудовой Союз, 러시아 사회 연대주의자들의 연합)의 공식 잡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잡지는 지금도 간행되고 있다. 여담으로 현대 러시아 인터넷에서는 포세프를 '포스베'(Посве)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오타에서 유래한 일종의 밈이다.][* 2023년 나탈리야 추마코바가 밝힌 바에 따르면 남아있는 자료에서 'POSEV', 'POSSEV' 등 다양한 철자를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2023년 비르고로트 재발매본에서는 그래서 밴드 이름이 'THE POSSEV'로 되어 있다. 훗날 알려지게 되는 그롭 스튜디오(GrOb studio) 명의 이전 1980년대 극초기 자료에서는 '마이단 레코드'(Maidan Records)라는 이름도 등장하는 것이 밝혀졌는데, 추마코바나 생존하고 있는 타 동료들도 이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라고 밝힌 바 있다. 일단 '마이단'은 [[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을 의미하는데, 레토프의 모친에 우크라이나계 혈통이 섞여 있어 레토프는 우크라이나어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사료된다.]를 결성하였다. 바벤코가 일렉 기타를 맡았고, 예고르가 보컬, 드럼[* 제대로 된 드럼이 없어 피오네르용 장난감 드럼부터 서류가방, 쇳덩어리(...)까지 별의별 걸 가지고 두들겼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제대로 된 드럼의 부재는 포세프부터 초기 민방위 시절까지 이어지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전기 민방위 시절 공연에서는 레토프가 기타를 잡는 일이 잘 없었다. 보통 랴비노프 같은 타 멤버들이 기타를 맡았고 레토프는 보컬~~과 기괴한 춤동작~~을 맡았다.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공연에서 레토프가 리드 기타까지 잡는 경우가 많아졌다.], 베이스를 맡았다. 1982년 포세프는 두 개의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으나[* 당연히 제대로 된 스튜디오 취입은 아니라 그냥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등으로 집에서 대충 녹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당시 환경에서 포세프 본인들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지만.] 이 둘은 현재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유실된 상태이다. 1983년에도 "전략과 전술(Стратегия и тактика)", "프놈펜(Пномпень)", "머나먼 도시 옴스크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а в далекий город Омск)" 등 세 개의 앨범을 녹음하였으나 이 셋은 제목을 빼고 다수 유실된 상태이다.[* 2024년 11월 나탈리야 추마코바는 [[https://www.youtube.com/watch?v=CaYkzq74tPw|Письма в далекий город Омск의 첫 번째 트랙을 업로드하였다.]] 완전히 유실되지는 않았거나, 온전히 남아 있는데 그 전까지 실물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년 뒤인 1984년 예브게니 데예프(Евгений Деев, 베이스)가 합류하였고, 밴드는 추가로 두 개의 앨범 "갖가지 풍경들(Всякие картинки)" 및 "병영에 내리는 비(Дождь В Казарме)"을 취입하였다. 8월에는 올렉 이바노프스키(베이스, 어쿠스틱 기타)가 합류하였고, 두 개의 앨범 "늙은 사환의 이야기(Сказки Старого Юнги)"와 "사랑의 음악(Музыка Любви)"을 녹음하였다. 9월에는 포세프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이자, 훗날 레토프가 "포세프의 앨범 중 최고"라고 평가한 "레게, 펑크 그리고 락앤롤(Reggae, punk & rock’n’roll)"이 나왔다.[* "펑크와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과는 다르다. 이 앨범은 "레게, 펑크 그리고 락앤롤"의 일부 트랙을 기반으로 한 포세프 시절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한동안 두 앨범은 혼동되어 유통되었지만, 2023년 11월 30일 비르고로트에서 진짜 "Reggae, Punk & Rock’n’Roll"을 리마스터링해 발매하면서 이제 두 앨범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후 포세프에 콘스탄틴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 흔히 별명인 '쿠지마(Кузьма: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 때에 따라서는 악마를 의미하기도 한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일화에서도 등장하는 존재)' 혹은 '백치 쿠자(Кузя УО: 'УО'는 옛 소련 속어로 [[지체장애]](умственно отсталый)의 두문자어이며 '쿠자'는 '쿠지마'의 다른 이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랴비노프는 앞서 언급한 클리포프의 첫 번째 밴드였던 "아폴론 신자들과 펑크의 악신"(Аполлоники и Зловещий Бог Панков)에서 활동하였고, 이를 계기로 레토프와 인연을 쌓았다. 랴비노프는 오랜 기간 민방위의 멤버로 활동하다 1990년대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위해 민방위에서 최종적으로 탈퇴했고, 이후에도 레토프 사후 기념 공연에 참가하는 등 활동하다가 2020년 3월 심장 문제로 사망하였다.]가 합류하면서 1984년 11월 8일 그 유명한 그라지단스카야 오브로나[* 러시아어로 "민방위"를 의미한다. 줄여서 '그롭(ГрОб)' 아니면 '게오/고(ГО)'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 '그롭'은 의도적으로 지은 [[역두문자어]]인데, 러시아어로 관짝을 의미한다. 당시 레토프의 앨범에 인쇄되어 나오던 스튜디오 이름도 '그롭 레코드(GrOb Records)'였다.]를 결성하게 되었다. 1985년 8월, 이바노프스키를 제외한 3명(레토프, 바벤코, 랴비노프)이 "스스로 해라(Сделай сам)"를 낸 것을 마지막으로 포세프의 역사가 마무리된다.[* 여담으로 이 시절 앨범들을 들어보면 속도와 피치가 빠른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레코딩용 테이프마저 부족하던 80년대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음악을 녹음하려던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눈물겨운 산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za8WWiDsks|오리지널 앨범]]과 [[https://www.youtube.com/watch?v=LsMvK5vUwXo|속도 조정+리마스터링을 거친 앨범]]을 비교해보자.] || [youtube(QKBxznxLe9U)] || [youtube(NAa1h8U-m-g)] || || 썩어빠진 젊은이(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 1985) || 낙천주이(Оптимизьм, 1985)[* "낙천주의(Оптимизм)"의 오자가 아니다. 레토프 본인이 만든 트랙리스트에 실제로 저렇게 적혀 있다. 의도된 오자로 추정된다.] || ||<-2> 위의 두 앨범은 1988년 재발매된 동명의 앨범들과는 다르다. 1988년본은 모든 곡들을 다시 재녹음한 것이고, 트랙리스트도 상당히 다르다. [br] ~~가사가 상당히 혼란스럽다. 참고로 번역은 제대로 된 것이다.~~ || 포세프와 초기 민방위는 공식 무대에 선 적이 없으며 단순 락 지망생들의 "홈 밴드"에 가까웠다. 허나 여러 라이브 공연을 통해 그롭은 점차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고[*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자신들의 추종자는 물론이요 자신들을 다루는 팬 잡지까지 있었다고 한다.] 1985년 그롭의 첫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가 예고르의 집에서 제작되어 [[사미즈다트|마그니티즈다트]] 형식으로 유포되었다.[* 정확히 말해 당시에는 앞서 언급한 45분짜리 두 앨범이 "썩어빠진 젊은이"라는 이름 아래 90분짜리 사미즈다트로 유통되었다. 1986년 레토프가 이 제작물을 리믹싱할 때 현재처럼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 두 개로 나누었다. 이는 앨범 한 개의 길이가 45분이어야 한다는 당시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레토프는 일부 판본에는 실험 삼아 리버브(reverb) 효과를 넣고 좀 더 '앨범처럼 보이도록, 앨범처럼 들리도록' 내용물을 좀 다듬기도 했다.] 하지만 민방위의 저속하고 반권위스러운 음악은 당시 소련 체제와 공존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민방위의 음악을 들은 바벤코의 모친은 [[소련 공산당]]원이었고, 자신의 아들이 반사회주의적 음악을 한다고 당에 신고했다. 이에 지역 당국은 이 훌륭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민방위 멤버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렇게 '낙천주이' 앨범을 녹음하고 있던 민방위는 "테러적 행위"를 조직한 죄로 줄줄히 잡혀 들어갔다. 같이 활동하던 다른 음악가들과 일가친척에게 가해진 협박은 덤이었다. 전기 민방위(1984년 ~ 1990년)의 노래는 소련 당국과 억압적 체제에 대한 분노와 비판, 풍자와 조롱이 섞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포세프부터 극초기 민방위 시절, 즉 1984~85년 무렵 민방위의 노래에서는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나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이즈가 가득 낀 조악하고 조악한 음질, 그리고 '아이들 옹알이를 떠올리는' 가사는 권위적이던 소련 정부에 있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단 것은 자명하다. 심지어 시기조차 이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잇달아 사망하며 소련 정국이 이른바 "기강잡기"에 들어가 있던 기간이었고, 실제로 이 시절 많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민방위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체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는지) 민방위는 음악 활동을 감추지 않았고, 이는 지역 당국과 [[KGB]]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그나마도 소련 말기니까 끌려가는 정도였지, 스탈린 시절이었으면 밤중에 바로 총살당했을 것이다~~ 대도시였던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였다면 상황이 조금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시베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의 무명 밴드가 탄압받는다고 해서 신경써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쪽은 대도시이기도 했고 좀 더 사람들의 시선이 열린 편이어서 똑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 활동이라도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경찰의 공연 방해나 깡패들의 습격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지방으로 들어가면 탄압 강도가 세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도시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어서 대도시인 [[볼고그라드]]에서 활동하던 [[크루이스]]나 마찬가지로 대도시인 [[우파(러시아)|우파]]에서 활동하던 [[데데테]]가 비슷한 시기 전부 해산 크리를 맞았다. 결국 [[크루이즈]]는 발레리 가이나를 중심으로 멤버를 재결성한 뒤 지역을 옮겨서 몰래몰래 활동해야 했고, 데데테는 한 차례 완전히 해산한 뒤 리더인 유리 셰프추크가 레닌그라드로 이주하여 완전히 새로운 멤버로 재결성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혹자는 당시 레토프가 체제에 위협을 주는 '반동분자'는 절대 아니지만 가사가 원체 그렇고 그런지라 정신병원 입원으로 타협을 본 게 아니냐는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위의 노래 가사들을 보면 절로 수긍하게 된다(...)~~ 심문 중 예고르는 당시 자신들을 심문하던 소령 블라디미르 메시코프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바로 발각당해 목숨을 건진다. 이후 예고르는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끌려가 1985년 12월 8일부터 1986년 3월 7일까지 병실에 감금당하게 되고[* 당시 소련에서는 반체제 인사 등을 죽이기는 좀 그랬으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시키는 방식으로 수감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제로 정체모를 약물을 주입하거나 침대 시트로 전신을 완전히 싸맨 뒤 몇 시간 동안 방치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등 각종 고문을 자행하는 일이 빈번했다. 레토프도 의사들이 자신에게 강제로 여러 종류의 약물을 주입했다고 자서전에서 증언하였다.] 랴비노프는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당한 뒤 군대로, 그것도 격오지로 취급받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끌려갔다.[* 원래는 레토프도 강제로 입대시키려고 했고 실제로 끌려갔으나, 1984년 7월 3일 재차 치러진 병역 판정 검사에서 레토프는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선천적인 허약함과 정신적 문제로 추정) 1984년 6월과 7월 사이 병원에 살며 조사를 받는 와중도 레토프는 스튜디오에서 두 개의 테이크를 녹음하는데, 이 테이크의 존재는 기존에 알려져 있지 않다가 추마코바의 감수 아래 비르고로트에서 포세프 시절 녹음물들을 복각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2023년 11월 30일 "회오리바람. 여름철 녹음물(Смерч. Летние записи)"이라는 이름 하에 발매되었다.][* 다만 최중요시설 중 한 곳이 있는 곳이라서 그렇지 최전방처럼 삭막하고 빡빡한 곳은 아니었다.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 주둔하는 사단들은 한국에 비유하자면 전부 [[사단(군대)#s-5.4|향토 사단]]과 비슷한 사단들이었다.] 당시 이들이 작업하던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는 파기당하고, 암암리에 떠돌던 부틀랙 카세트를 기반으로 2000년 컴필레이션 앨범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이 발매되었다.[* 부틀랙 테이프 기반이라 음질이 좋진 않지만, 당시 열악했던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마스터 테이프의 음질도 그리 좋진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참고로 이 앨범은 비공식 앨범이다. 레토프는 포세프~극초기 민방위 시절을 시절을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재발매를 하거나 공개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지 저 앨범들을 복간하거나 재발매하지는 않았다. 대신 1989년 포세프~극초기 민방위 시절 곡들을 모아 재녹음하거나 손을 좀 본 뒤 컴필레이션 앨범인 "포세프(Посев)"로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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