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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주가슈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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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의 두 아들도 모두 전선에 나갔다.[* 바실리는 Il-2의 파일럿으로 26번 출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초반은 제공권이 독일공군에게 있었고 Il-2는 손실율이 엄청난 폭격기였기 때문에, 바실리가 전쟁 당시 편안히 지냈다고 보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전방부대에 있었던 야코프는 그대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개전 당시 해당 전선 사령관인 [[이반 코네프]]가 야코프의 부대도 곧 최전선에 투입될 예정이니 야코프를 후방으로 전근시켜도 되겠느냐고 넌지시 건의할 정도로 신경을 써주긴 했으나, 스탈린에게서 "그따위 쓸데없는 아첨을 하려들지 말라"는 회신이 날아오자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코네프와 군 쪽에서 스탈린의 화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일로, 원래 스탈린은 체면을 매우 중시했던 만큼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하면서 뒤에서 부하들이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의 부하들이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와 아첨으로 점철된 전기를 만들어 발행하려 하자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찬 이런 전기는 발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스탈린이 직접 한 말을 발언을 거스르며(?) 그의 전기를 무려 100만 부나 찍어 전국에 뿌린 부하들은 오히려 중용되었고, 스탈린의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스탈린이 교사들에게 아들을 엄하게 다스리라고 지시했지만 방탕한 스탈린의 아들을 조금이라도 엄하게 대했던 교사들은 모조리 숙청당하면서 학교가 거의 무너질 정도로 보복당했다. 따라서 스탈린이 코네프에게 퉁명스러운 일갈을 했을 때도 속으로는 알아서 야코프를 재배치해 주기를 바랐겠으나, 육군 수뇌부는 스탈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는 야코프를 전선에 내보내 버렸다. 평시였다면 육군 수뇌부가 숙청되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당시는 스탈린으로서도 상황이 너무 다급했기 때문에 숙청 없이 넘어갔다. 한편 전쟁 발발 후 야코프의 가족들은 스베틀라나와 함께 [[소치]]로 피난 갔다. ||[[파일:야콮.jpg|width=100%]]|| || 포로가 되어 [[독일 공군(나치 독일)|독일 공군]] [[장교]]들과 함께 촬영한 야코프. 독일군은 이 사진을 삐라로 만들어 [[모스크바]]에 살포했다. || 스탈린은 아들의 부대가 최전선에서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를 지속적인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여 만인 7월 야코프는 [[스몰렌스크 전투(1941)|스몰렌스크 전투]] 중에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고 소련군도 8월에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실 오랫동안 야코프가 독일에 자진 투항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이에 대한 진실은 불분명하다. 한편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스탈린은 소치에 피난갔던 야코프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하였고, 스탈린은 유대인인 며느리가 독일에 야코프를 팔아넘긴 게 아닌가 의심하여 270호 명령에 따라 즉시 며느리를 포함한 장남 일가를 수용소에 투옥시켜 버렸다. 야코프를 포로로 잡은 독일군은 야코프에게 스탈린의 약점을 캘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심문을 계속했다. 독일은 야코프와 아버지의 불화를 이용하여 그를 전향시키려고 시도하며 독일의 거대한 군수 공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야코프는 독일이 스탈린의 장남인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전쟁이 끝나든 끝나지 않든 간에 언젠가는 결국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고 괴로워했다. 며칠 동안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불러 같이 잤다. 소련의 모든 지도층은 감히 스탈린 앞에서 야코프의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안부와 더불어 구출작전의 실행 여부를 묻자 스탈린은 이를 허락하면서도 아들이 살아오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식사 자리에서 스탈린은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밀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야코프는 모국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요. [[독소전쟁|전쟁]]은 정말 끔찍해! 얼마나 많은 우리 인민의 생명을 앗아갔소! 틀림없이 가족과 친척 가운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을 것이오." 스탈린의 말처럼 야코프는 아버지를 믿으며 [[나치 독일]]에게 전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야코프의 바람과 달리 그를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독일 측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로 지목되는 독일군 장군과 야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고 스탈린은 교환 제안을 듣고선 "어떻게 원수와 중위를 교환할 수 있냐?"고 거부했다고 하지만, 독일 측이 그러한 제안을 해왔다는 문서 따위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1943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는데, 야코프가 43년 4월에 죽었고 파울루스의 항복은 2월 직전이라 2개월 정도 시간이 있기는 하고,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 스탈린으로부터 독일 측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독일군이 야코프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긴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파울루스 외에도 [[히틀러]]의 조카 레오 라우발 또는 하인츠 히틀러([[아돌프 히틀러/가족 관계]] 문서 참고)처럼 야코프와 교환될 만한 포로가 있기는 있었다. 1943년 4월 야코프는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특급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아 수많은 썰이 난무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경계병이 쏜 총에 사망하였다는 썰, 끈질긴 탈옥 시도에 독일군이 수용소를 둘러싸고 전기가 흐르는 담장을 설치하였으나 그 사실을 알고도 담에 뛰어들어 감전사했다는 썰 등이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야코프가 포로수용소에서 화장실 사용 문제를 놓고 같이 수용된 영국 장교와 싸움을 벌였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고압 철조망에 돌진해 죽었다는 야사가 나온다.] 자세한 정황은 불분명하나, 훗날 기밀 해제된 러시아의 자료 등에 따르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경계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하니 적어도 러시아 쪽에서 파악한, 그리고 스탈린이 보고받은 사인은 사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야코프의 죽음을 알게 된 스탈린은 겉으로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은 했어도 속으로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부하들에게 자식의 최후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몸이 떨리도록 놀라면서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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