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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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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 작전]]과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FallBlau.pn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청색 작전의 전개도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ucJTYK7_Yo, start=185)]}}}||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독일군의 전체적인 소련 각개격파 계획. [br] 여기서 캅카스를 점령하는 것이 바로 청색 작전이다. || 이런 상황에서 1942년 봄 [[독일 국방군]] 장성들은 모스크바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모스크바 공격을 담당하던 중부집단군이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아돌프 히틀러]] 또한 모스크바를 또 공격하는 것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아돌프 히틀러는 [[남부집단군(나치 독일)|남부집단군]]을 주공으로 삼아 [[캅카스]]의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유전]] 지대를 점령하고 돈강과 볼가강 교통망을 차단하여 소련의 수운을 마비시킴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42년 하계 공세의 방향을 잡고 이를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를 통해 1943년 경에 소련의 경제를 붕괴시키려 하였다. 독일이 계획한 청색 작전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보로네시 전투|보로네시에서 저항하는 소련군을 격파하여]] 진격로 측면의 안전을 확보한다. 2. [[돈강]] 넘은 독일군은 [[칼라치 전투|점점 전선을 밀어버리며]] [[볼가강]]까지 진격한다. 스탈린그라드로의 진격은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3. 위 과정으로 캅카스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이어 독일군은 캅카스 유전 지대와 주요 산업 기반을 탈취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이때 히틀러는 작전이 진행되던 1942년 7월 23일, 공세를 가하던 남부집단군을 A와 B로 나눠버려 A집단군[*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은 캅카스로, B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은 스탈린그라드로 동시에 공세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최고사령부 명령 제45호] 히틀러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한계를 넘어선 보급 상황과 심각한 추축국의 석유 부족 문제 때문이었다. 실제로 B집단군은 1942년 내내 극심한 보급부족에 시달렸는데 여기에 단순히 병력을 더 쏟아붓는 건 안 그래도 힘든 보급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만약 A, B 집단군이 한꺼번에 스탈린그라드와 아스트라한으로 진격했다가는 모조리 보급문제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추축국]]의 석유 갈증은 너무나 심각했는데, [[루마니아]]의 유전 지대를 제외하고는 공급처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점령은 매우 시급했다.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철도 라인 2개 중 하나가 [[캅카스]]를 지나고 있던 점도 주목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이유로 집단군을 둘로 나눠서 먼저 빨리 [[캅카스]]로 내려보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 독일 국방군에게 있어 불가피했던 도박수였고, 때문에 [[OKH]]에서도 총통명령 45호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결국 스탈린그라드 주위에 형성되는 엄청나게 넓은 방어 구역을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나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같은 한 수 아래의 전력을 보유한 동맹국이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 되었고 이는 이후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Battle-SecondKharkov.gif|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하르코프를 향한 소련군의 공세와 독일군의 성공적인 반격[*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 청색 작전이 시작되기 전, 비슷한 곳에서 스탈린이 직접 감독한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먼저 시작되었고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중심으로한 75만 명의 병력이 5월 공세를 시작했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초반에 [[하르키우|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등 선전했으나, 마침 청색 작전 투입이 예정되어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독일군이 기동 방어를 실시하여 소련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7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패주한 병력은 [[볼가강]] 서안으로 도주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두 번 다시 일선 지휘를 맡지 못했다.] 독일군은 이 여세를 몰아서 6월 말에 [[청색 작전]]을 시작했고 이는 대성공이었다. 스텝 초원을 관통하는 독일군을 소련군은 거의 저지하지 못했고 저지선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독일군의 측면 포위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 제대로 된 저지선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하르키우|하르코프]]와 [[로스토프]]에서 포위된 소련군은 궤멸당했고 7월 말이 되자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와중에 섬멸당하거나 포로로 잡힌 소련군만 '수십만'에 달해 소련군은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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