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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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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6군의 성공적 철수는 가능했는가? === 사실 현대인들은 '6군이 만약 성공적으로 후퇴했다면' 등의 IF 시나리오를 상상해볼 수 있지만, 우라누스 작전 당일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라누스 작전 발동 이후 독일군이 어떠한 의사결정을 해도 6군의 전멸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라누스 작전 발동 당일, 6군 사령관이었던 파울루스는 군단장 자이틀리츠와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어떤 '건물'을 점령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독일 6군은 돈좌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령관과 군단장이 모여앉아 이런 사소한 의사결정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울루스는 제대로 된 전투부대가 없어 비전투부대의 인력을 빼서 전투부대에 충원하고, 6군 예하 부대 공병들을 차출하여 여단급 부대를 편성해 따로 훈련시킨 뒤, 시가전에 투입해보는 등 인력부족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전선에서 건초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독일군 기동력의 주축인 말들은 대부분 후방으로 보내야 했다. 당시 6군은 전투병력, 기동력 모든 것이 부족한 앉음뱅이 부대였다. 그리고 우라누스 작전 첫날, 소련군은 최종 목표인 6군 부대들을 공격하는 대신 좌익(서측)과 우익(남측) 동맹국 부대들을 공격하였다. 6군 지휘부는 자신들의 전투지경선 바깥의 위험을 알아차릴 수 없어 우라누스 공세 첫날 포위를 막기 위한 어떠한 의사결정도 할 수 없었다. 독일 육군 사령부는 칼라치 방향 철도를 노리는 제한적 소련군 공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거대한 양익포위작전이 실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 6군 사령부가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6군의 관심은 시가지 점령과 14기갑군단을 끊임없이 북쪽에서 공격해 반포위된 스탈린그라드를 해방하려는 소련군이었다. 우라누스 작전 발동 2일차에야 파울루스는 6군의 서측면이 위험에 처했음을 B집단군을 통해 통보받았다. 루마니아군 대다수가 포위되었고, 돈 만곡부의 예비대였던 루마니아 1기갑사단과 약체화된 독일 22기갑사단은 적을 막기는커녕, 포위를 피해 사투를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파울루스는 빠르게 대응했다. 급히 6군 예하 부대에서 병력과 연료를 박박 긁어 6군의 목숨줄인 칼라치 교량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전투단을 구성해 파견하였다. 이들은 칼라치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나, 소련군이 조금 더 빨리 핵심 지역에 도착했고 칼라치 사수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6군이 가능한 모든 기동부대를 서쪽으로 투입한 시점, 설상가상으로 남쪽 측면에도 거대한 돌파구가 생겼다. 이 지역은 껍데기만 남았던 4 기갑군이 약체화된 루마니아 사단으로 방어중인 구역이었다. 남측면을 방어하던 핵심 기동부대인 29차량화보병사단은 소련군의 전선군급 공세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3일만에 과거 4기갑군의 주력까지 포함한 6군 대부분 포위되고 만다. 사실 이정도도 기적이었다. 포위망 남쪽의 전선 형성에 실패할지 모르는 위기상황을 포위 정도로 막았기 때문이다. 파울루스는 포위망 외각 전선 형성조차 어렵다고 판단했는지,'전선 형성에 실패하면' 행동의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사실 포위 초반에 이미 군 전체의 전투서열이 붕괴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는 의미이다. 파울루스는 포위 당한 직후, 포위망 돌파 부대 조직에 나흘이 걸린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소련군이 작전 개시 뒤 칼라치에서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인 3일보다 긴 시간이다. 달리 말하면, 19일 아침 파울루스가 신내림을 받아 바로 부대 '퇴각'을 위해 재정비를 시작한다고 해도, 6군은 아군 지역 내의 철군이 아닌 포위망 돌파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파울루스가 후퇴를 시작할 시점에는 이미 칼라치 교량은 소련군의 손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포위를 피할 방법이 사실상 없으니, 항공보급은 성공하건 실패하건 실시되어야 했다. 사실 독일군은 블라우 작전 내내 보급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에, 포위당하지 않은 부대들도 항공보급을 사용중이었다. 6군에 항공보급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만슈타인의 구원부대 선봉인 6기갑사단이 포위 완료 뒤 3주 뒤에나 도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6 기갑사단은 남유럽으로의 이동을 위해 이미 열차에 탑승중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빨리 배치된 것이다), 포위 완료 직후 돌파는 포위망 바깥의 도움 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전은 기존에 만든 북쪽의 방어 진지를 포기하고, 부대 기동력의 핵심이었던 말 대부분이 없는 상태로, 포위 완료 전에도 때때로 급양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스탈린그라드의 포위 이후에 독일군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굶주림이 너무나 유명해 가려진 사실이지만, 6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도중에도 보급의 난맥상으로 인해 병사들이 끼니를 굶어야하는 일이 잦았다. 이미 부족한 급양으로 인해 체중이 줄어있던 독일군 병사들에게 포위 이후의 식량난은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 부대들을 긁어모아 진행해야 한다.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62군조차 전멸시키지 못했던 6군이 무슨 수로 우라누스 공세 선봉이었던 완편에 가까운 소련 전차군단, 기병군단과 상대하면서 동시에 보병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이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퇴각 결정은 위에서 언급한 두 시나리오 중 후자(패주)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6군은 포위망 돌파가 아닌, 포위망 축소를 위해 8군단을 돈강 만곡부에서 스탈린그라드 쪽 방어에 용이한 지역으로 옮기는 것 조차 어려워했다. 포위당하기 전에도 불구에 가까웠던 6군 전체를 포위 상태에서 공세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더욱 큰 모험임을 짐작할 수 있다. 파울루스에게는 질 나쁜 선택지 두 개 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획을 막기 위해 기동 불가능한 모든 장비는 파기하고, 남쪽으로 빠르게 돌파구를 여는 가능성 낮은 작전을 즉시 실시(실패시 남부 전선 붕괴)하거나, 항공보급이 개선되어 6군의 전투 준비상태가 개선됨과 동시에 만슈타인이 충분한 기동부대를 신속하게 돈강에 배치하길 기다려 보거나. 포위 이후 독일군의 능력부족은 더욱 크게 드러났다. 만슈타인은 사실상 6기갑사단 1개와 반토막난 루마니아 보병사단을 이용해 스탈린그라드까지 돌파해야 했다. 문제는 포위망 바깥에 있던 이 작은 부대들조차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략적 식견의 부족도 극명히 드러났다. 만슈타인은 22기갑사단과 16 차량화보병사단까지 할당해 달라는 생떼를 부렸다. 22기갑사단은 로스토프 방면을 방어중인 이탈리아 군의 예비대였고, 16 차량화보병사단은 A집단군 좌익의 수백킬로미터 전선을 지키는 유일한 부대였다. 결국 OKH는 22기갑사단을 겨울폭풍작전을 위해 내주었다. 문제는 소토성 작전이 개시되어 이탈리아 군이 붕괴했는데, 만슈타인은 22기갑사단을 받았음에도 6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얻은 것은 없고, 이탈리아군의 붕괴로 돈 집단군과 A 집단군 모두가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 참사의 결과로 만슈타인은 겨울폭풍작전을 진행중이던 6 기갑사단까지 돈강 측면 방어를 위해 차출해야 했다. 2개 집단군의 운명이 걸린 이상, 6군 구원 시도는 사치였다. 6 기갑사단이 철수하자, 6군의 운명은 결정되고 만다. 밀히 원수가 항공보급 효율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었으나, 포위망 내부 붕괴 직전인 독일군의 손실을 메꿀 수는 없었다. 참고로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2년뒤 카메네츠-포돌스크 포위전이 발생한다. 당시 포위되었던 1기갑군 사령관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군단장으로 경험했던 후베 장군이었다. 그는 부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포위망을 탈출하였고, 덕분에 이 전투는 포위망 탈출의 정석으로 불린다. '정석'적 탈출을 했음에도, 탈출한 독일 기갑사단들은 가용 전차가 1자리수로 떨어지는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1942년 말 기동력도 훨씬 떨어지고, 기계화율도 낮았으며, 대규모 포위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증원 부대가 3주 뒤에나 도착하게 되는 독일 6군이 정말 문제없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일군은 중요한 군사정보를 무시했고,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6군은 돈좌상태였으며 육군사령부는 3주간 고작 2개의 기갑사단만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원 소모가 극심했다. 독일 동방정보국이 우라누스 공세를 위해 집결하는 소련 병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6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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