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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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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스탈린그라드 전투 병사 국기.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중앙 광장에서 소련 국기를 흔드는 소련군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A9QBHDtfCQ)]}}}|| ||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의 전황 || '''이 전투로 독일은 동부전선 전체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제6군이 삭제되며 1942년 이래 주전선이 된 남부집단군의 차후 공세 진행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 6군은 독일군 정예 병력으로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 때문에 이후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이로 인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공세 역량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부전선에서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에 붙잡혀 있었고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고 발터 모델의 지휘하 르제프 전역에서 방어전에 일관하고 있었다. 북부와 중부집단군이 공세능력을 상실한 동안 독일의 공세는 남부집단군이 주축이 되었고 그 선봉에는 6군이 있었다. 독일 제6군은 그냥 단일 군사령부가 아니었다. 블라우 작전 직전 남부 집단군 기갑사단들은 중부 집단군 기갑사단들로부터 1개 기갑 대대를 증원받은 상황이었기에, 6군 역시 전투력이 향상된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작전이 진행되면서 6군은 육군사령부 예비 군단을 증원받고, 4기갑군의 기동전력까지 건네받아 그 규모가 일반적 야전군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고 있었다. 그로조이 공격 명령을 받은 리스트가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로 지원이 집중됨에 따라 A집단군은 단독으로 그로조이 공략에 나설수 없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제 6군은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투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핵심 역량을 몰빵받았다. 사실상 B 집단군 그 자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적 물적 손실을 크게 입은 독일군은 이후 물 오른 소련군의 역습을 돌려 막기 급급한 상황으로 전락했다. B집단군의 주력인 6군이 포위섬멸되자 4기갑군은 소수 루마니아 사단만 가진 이름뿐인 기갑군으로 전락했고 6군의 양익을 지키던 루마니아 군은 포위 작전 진행중 십수만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소토성 작전으로 이탈리아군과 헝가리군도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된다. B집단군 예하의 4개 군급 부대가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기갑 장비의 손실도 막대해 최소 1,000대 이상의 전차가 손실되었고 수송기 전력도 480대 이상이 파괴되는 등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A집단군 역시 우라노스 작전 발동과 동시에 몰아치는 소련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밀려났고 후술하겠지만 클라이스트의 신들린 지휘가 아니었다면 6군의 저승길 동무가 될 뻔했다. 이는 독일의 생산능력으로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였다. 사실 우라누스 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독일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포위 전에도 제6군의 보급 상황은 병사들이 '음식이 부족하다'는 수기를 남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6군은 말에게 먹일 먹이가 없어 겨울이 오자 말들을 후방으로 보내야만 했다. 독일 보병부대의 기동력은 말이 책임지고 있었으니, 말을 후방으로 보낸 시점에 6군은 앉음뱅이 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 포위망이 완성되니 더욱 상황은 심각해졌다. 포위망 완성부터 겨울폭풍 작전 시작까지 1달 가까운 기간동안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6군은 제대로 된 공세 기동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군은 29차량화보병사단 하나만을 공세용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탈출 시도는 결국 제6군 전체가 패주하여 전투서열이 붕괴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6군이 소련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캅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 버렸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 패주했다면 A집단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이었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히틀러는 우라노스 작전 발동 초기, A 집단군의 전면적 후퇴에 반대하며 제 6군의 저승길 동지로 A집단군까지 딸려 보낼 뻔했다는 것이다. 만약 스탈린그라드의 분전과 클라이스트의 필사적인 노력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독일군은 제 6군과 A집단군을 세트로 날려먹고 이로 인해 발생할 거대한 전선의 구멍으로 몰려드는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클라이스트는 돈 집단군에 기동 전력이 계속 차출되어 빠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그로즈니부터 로스토프까지의 퇴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물론 클라이스트 입장에서는 로스토프를 통해 1942년, 1943년 두 번이나 탈출하는 씁쓸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편 B집단군이 거의 전멸해 버린 독일군은 남부 [[러시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나, 르제프에서 발터 모델의 방어전 성공과 남부 전역에서 만슈타인의 신들린 기동방어가 성공함으로써 전선을 소강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43년 히틀러가 공세능력을 상실했지만 방어능력은 건재했던 남부집단군을 [[쿠르스크 전투]]에서 날려먹으며 굳건한듯 했던 독일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독소전쟁에서 패배한다.[* 사실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도 독일군에게는 생명 연장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구데리안의 동부방벽 제안과 발터 모델의 판터-보탄 라인이었다. 하지만 후퇴하면 개거품을 물었던 히틀러는 일찌감치 제안된 구데리안의 동부방벽은 거부해버렸고 쿠르스크에서 깨지고 남부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8월에서야 방벽 건설에 나섰다. 당연히 시간은 매우 부족했고 뒤늦은 후퇴 명령으로 쿠르스크에서 무너진 남부 집단군을 재건할 기회를 날려먹었을 뿐만 아니라 간신히 드네프르강 서안으로 철수한 독일군이 물오른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막기에 방어선은 매우 허술했다. 허술했다고 하지만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을 넘어 독소 전쟁 개시선인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까지 도달하는데 27만명의 병력이 전사 및 실종된 반면 독일군의 전사 및 실종자는 9만명 선에 그쳤다. 만일 독일군이 제대로된 방어선을 드네프르강을 따라 구축했다면 소련군이 전쟁 개시선에 도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병력을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소련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해군 하사와 독일 육군 저격학교 교장 에르빈 쾨니히 육군 산악 소령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러시아에선 바실리의 회고록에서 나온 내용이니 진짜라고 하지만 서방 측은 물론 심지어 독일에서도 바실리가 거물급 저격수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나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란 이름의 저격학교 교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 토르발트 SS 대령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 독일 저격수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들이고, 당시 격전에서 독일군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이체프가 사살한 독일 측의 특급저격수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합군 반격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환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서구 전사학자들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점으로 나치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자체적 역량에 밀리기 시작한데다 소련 측이 무기대여법 효과까지 받는 것으로 전력에서 뒤쳐지게 되면서 점점 동부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서부전선에서도 결국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인해 소련군에게 베를린까지 점령당하는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1941년 독일군은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반복하면서 소련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전비 1:20 수준의 참담한(나치에겐 찬란한) 결과의 원인이 바로 이것. 통상적인 전투는 양군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진 쪽은 물러나며 병력의 20-50% 손실을 입고, 이긴 쪽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적은 피해를 입는 병력 교환, 즉 소모전의 형태를 보인다. 1차대전기의 참호전이 그 전형적인 예시. 그러나 독일은 빠른 기동을 통해 소련군을 포위하고, 소련군은 스탈린의 후퇴 금지령 탓에 망기적거리다 포위망에 갇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부대 자체가 삭제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불과 몇 달만에 모스크바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의 효과도 있었지만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채택한 전과였다.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부터 독일군은 포위기동 대신 단단하게 준비된 방어선에 들이박는 소모전을 강요당했고, 여기서도 독일군이 더 잘 싸웠지만 어쨌든 양측이 멱살잡고 싸우며 독일 측의 손실도 이전에 비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1942년 블라우 작전 개시 이후 독일군의 성공적인 소련군 포위섬멸은 케르치 반도와 크림 반도에서만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던 6군과 4기갑군은 소련 62군의 선봉 이외에는 제대로 포위섬멸 해 보지 못했다. 1941년이었다면 선봉 부대가 전멸한 뒤 패주했을 소련군은 이제 끈질긴 방어 직후 퇴각하여 다시 방어선을 짠 뒤 독일군을 괴롭혔다. 1941년 독일군은 6일만에 비어버린 민스크에 시내에 도달했지만, 독일 6군은 2달간의 소모전을 겪고 나서야 돈 만곡부를 돌파해 누더기 상태로 (같은 누더기 상태지만)소련군이 가득한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가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독일 6군의 보병사단들은 30~70% 수준의 전투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색 작전에서의 소련군의 사상자는 220만명에 달했지만 소련의 초월적인 동원능력과 대규모 공업 생산력,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렌드리스 지원으로 순식간에 전력 회복이 가능한 것이었다. 소련은 전선군이 통째로 삭제되는 참사에서도 꾸역꾸역 새로운 부대를 편성했지만, 독일은 여기서 한번 삭제된 피해를 종전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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