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스탈린그라드 전투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독일군의 항복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독일 제6군 항복 포로 병사들.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항복 이후 [[포로|{{{#fff 포로}}}]]로 끌려가는 독일 제6군 장병들 || >"'''[[아돌프 히틀러|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 >----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1943년 2월 3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움이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파울루스 원수의 뛰어난 통솔 아래에 있던 충성스러운 제6군은 적의 우세와 나쁜 형세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운명은 [[루프트바페]]의 대공사단, 두 개의 루마니아 사단, 그리고 크로아티아 연대 하나가 함께했습니다. 그들 또한 충성스러운 전우로서 육군과 할 수 있는 데까지 의무를 다했습니다. 마지막 싸움은 [[스바스티카]] 깃발 아래서 벌어졌는데,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속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멀리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장군, 장교, 부사관과 병들 모두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함께 싸웠습니다. 제6군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죽어서, 그래서 독일은 살아간다!'''" >---- >1943년 2월 3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알리는 독일 라디오 방송 제6군은 굶주림과 추위에 전투 의지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었고 실탄마저 떨어지기 시작했고, [[겨울폭풍 작전]]마저 보급과 전력 차이로 실패하면서, 1943년 1월부터 소련군은 제6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대영의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에선 소련군이 빵을 들고 찾아와 항복을 권했다는 서술이 있으나 [[도시전설]]이다. 공식 항복 이전에 개별적으로 항복한 병사는 매우 적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RD5Ue.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동계 위장복을 입고 철통 같은 포위망을 구성한 소련군 병사들[* 반대로 헐벗고 굶주린 6군의 병사들은 실탄은커녕 움직일 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 소련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과 [[레오니트 고보로프]] 대장의 공동 명의로 독일군에 공식적으로 항복 권유 문서를 전달하고, 수만 장 인쇄하여 전선에도 뿌렸다. 이 항복 권유서는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과 환자에 대한 의료 지원, 정규 식량 지급 등 소련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지켜지진 않았다. 수용소에 집어넣고 일부러 죽일 목적으로 심하게 굴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게 소련식 안전 보장이었고, 의료지원과 식량배급은 애초에 줄 물자가 없었다. 어쩌다가 물자가 가더라도 경비병이나 민간인들이 빼앗아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1월 12일 소련군은 [[콜초 작전|고립된 독일군에 대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제6군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질병과 추위,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부상병들은 방치되었다. 1월 16일에는 제295보병사단의 1개 대대가 소련군에게 투항하는 등 개별적인 항복이 점차 늘어갔다. 1월 18일 파울루스는 연료와 탄약이 바닥났기 때문에 6군이 앞으로 며칠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으나 1월 22일 히틀러의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있을 수 없다.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싸운다. 가능할 경우, 여전히 전투를 할 수 있는 병사들로 축소된 요새를 사수하라. 서방문명을 구하고 요새를 지킨 장병들의 용기와 끈기는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제6군은 독일의 역사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길 만한 역사적 공헌을 했다. 1월 27일에 이르러 상황은 심각하게 변해갔다. 휘하 장군들과 고급장교들이 개별적 항복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파울루스는 이를 만류했지만 이미 부대 단위의 항복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참모장 슈미트는 항복을 협상하는 장교들을 군법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1월 30일에 이르러 그는 파울루스의 암묵적 허락 하에 소련군과의 협상을 허락했다. 1월 30일, 제6군은 히틀러 집권 10주년을 칭송하는 문서를 본국으로 보냈고 히틀러는 대단히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나의 파울루스 상급대장! >이미 오늘 모든 독일인들이 이 도시를 깊은 감정 속에서 우러러 보고 있소. 세계 역사상 늘 그러했듯이 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오.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산이 마침내 완성되었소. 독일 민족은 이제 이 전투의 고난을 이해하고 가장 위대한 희생을 하게 될 것이오. 그대와 그대의 병사들에게 감사를! >그대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된 날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계급)|원수]]로 진급시켰다. 역대 독일 육군 원수 중 적에게 포로가 된 원수는 없었기에 파울루스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킨 것은 자결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암묵적인 명령인 셈이었다. 또한 같은 날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는 독일 제6군의 처절한 상황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군대의 상황과 비유하는 라디오 연설을 방송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6군을 '아시아의 위협'(나치나 히틀러의 망상에 의하면 [[유대교]]나 볼셰비즘을 아시아적 비문명으로 간주했다.)에 맞서 유럽 문명을 지키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파르타 300명의 용사로 만들어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 순간이 지옥과도 같던 제6군 장병들에게 그런 연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보고 죽으라는 거냐며 냉랭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한편 파울루스가 항복하려는 장병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선 부대를 찾아갔을 때 장교들은 성난 목소리로 "히틀러는 범죄자입니다!", "우리가 속은 것처럼 독일 국민들은 계속 속을 것이고 라디오와 뉴스는 우리가 여기서 겪은 재앙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괴벨스가 우리의 패배를 영광화할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는 사태에 치달았다. 1월 30일, 로스케 장군이 백화점 지척까지 소련군이 접근했으며 더 이상 휘하 병력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파울루스는 로스케에게 그간의 분투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문서와 남은 훈장 등을 파기했다. 다음날인 1월 31일, 오전 7시부터 소련군이 백화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사령부는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백화점으로부터 맹렬한 총격이 날아오자 소련군은 독일군의 항복을 종용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독일 측에서 먼저 소련군 정치장교인 일첸코 중위에게 항복협상을 요청하면서 로코솝스키를 대신하여 협상할 수 있는 장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정치장교인 비노쿠르 대령과 예고로프 소령이 차를 타고 백화점에 도착, 독일군의 항복을 접수하였다. 독일군은 비노쿠르 대령이 정말로 로코솝스키 직속 정치장교인지 의심을 표했으나 비노쿠르가 강하게 나오자 곧 납득하였다. 비노쿠르 대령은 백화점에 들어서서 거대한 라디오와 발전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독일군은 그에게 파울루스가 있는 깊은 지하실로 안내했고, 4명의 기관단총 사수와 일첸코 중위가 비노쿠르를 따라서 파울루스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작은 방에서 로스케 장군과 슈미트 장군이 비노쿠르 대령을 독일식으로 일어나서 맞이했고, 이들은 비노쿠르 대령이 입고 있던 양가죽 코트를 벗을 것을 제안했지만 비노쿠르 대령은 지하실이 그리 따뜻한 것 같지 않다고 이를 거절했다. 로스케 장군은 비노쿠르에게 사실 그들이 파울루스의 의사에 따라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바깥에서 이러한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라디오를 통해서 파울루스에게 원수 승진 메시지가 도착했다. 파울루스는 슈미트로부터 그 보고를 받고 씹어뱉었다. >이건 나보고 자살하라는 명령이군. 하지만 난 그 기쁨을 줄 생각이 없네. 그리고 슈미트 참모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러시아인들이 바깥에 있다고 보고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슈미트가 문을 열자 비노쿠르 대령이 통역사를 대동하고 들이닥쳐서 파울루스가 64군의 포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파울루스 이하 참모진들은 총기를 버렸고 소련군은 이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라고 통고했다. 비노쿠르 대령은 파울루스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파울루스의 방은 어두웠다. 오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파울루스는 내가 들어서자 일어섰다. 그는 수주간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였고, 패배감에 차 보였다. "원수님이 몇살이신 것 같습니까?" 로스케가 묻자 내가 대답했다. "58세 정도로 보이는군요." "아닙니다. 53세이십니다." 나는 사과했다. 파울루스의 방은 더러웠다. 그는 내가 들어갔을 때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 바로 일어섰는데 누워있을 때 코트와 모자를 그대로 입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는 그의 권총을 로스케에게 넘겨주었는데 이게 바로 내가 나중에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동지가 왔을 때 넘겨준 그 총이었다. 협상은 로스케가 주도했고, 슈미트는 로스케와 파울루스 사이를 오가면서 협상 진행 상황을 알렸다. 파울루스는 자신은 항복한 것이 아니며, 우연히 소련군에 잡힌 것이라 주장했고, 남아있는 중부와 북부 방어선의 책임자가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항복 명령을 내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협상이 끝난 후 비노쿠르는 슈미트와 로스케에게 모두 무기를 넘기라고 요구했고 로스케가 세 장군의 권총을 모두 비노쿠르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서 웃긴 일도 벌어졌는데 협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총격전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공격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예하 부대들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 정치장교 부하로프에게 독일 측이 차량을 제공하고 이동했으나, 소련군은 독일군이 자기네 정치장교를 포로로 잡은 줄 알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를 집중공격하여 당황한 부하로프가 병사들을 멈추게 해야 했다. 이후 중부 방어선의 책임자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Walter_Heitz|발터 하이츠]] 상급대장은 같은 날 오후에 항복했고, 북부 방어선 책임자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Karl_Strecker|카를 슈트레커]] 대장은 이틀 뒤인 2월 2일에 항복했다. 그의 참모와 함께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는 통신을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휘하의 모든 방어선 책임자들이 항복하자 파울루스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즉, 파울루스가 바로 항복한 것은 아니며, 파울루스 문서에도 나와 있는 유명한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라는 말과 함께 항복한 장면은 2월 2일 이후 모든 독일군이 항복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한편 파울루스의 사령부에서는 여자들을 포함한 소련인 포로들도 여럿 나왔는데 이들은 즉시 NKVD가 반역자로 체포했다. 파울루스를 인수한 제38 차량화 소총여단장 이반 부르마코프 장군은 파울루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보였다. 그는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행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말랐고, 수염도 깎지 못했으며, 한심한 차람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방은 더러웠다. 로스케의 방도 비슷한 꼴이었다. (...) 파울루스의 방을 포함해서 지하실은 오물 천지였다. 마당은 악몽 수준이었다. 우리는 그걸 다 치워야 했다. 나는 로스케가 그런 고위 사령부를 똥오줌 천지로 만든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왜 그렇게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뭐라고 떠들었는데 우리 통역가가 다음과 같이 통역했다. "당신네 카츄사들과 야포들이 우리가 주중에 나갈 수 없게 만들었소. 우리는 '생리기능'을 지하실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소. 그걸 치우는 것은 밤에만 가능했는데, 밤에도 다들 나가는 걸 두려워했소."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항복 후 포로.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항복 후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이렇게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 남아있던 독일 제6군은 대부분 항복한다. 30만에 이르던 대병력은 이제 기력을 잃고 죽어가는 9만 1,000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포로 수용소로 후송되는 동안 1만 7천 명이 죽었고, 많은 수가 영양 실조로 인한 장기 손상 등으로 사망하였다. 1943년에는 장티푸스가 돌면서 많이 죽었다. 최종적으로는 파울루스를 포함하여 5%인 6천 명만이 10년 뒤 독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독소전 초반 소련군에 잡힌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30%에 달했으나, 이때를 기점으로 10% 이하로 떨어지며 전후 최종 독일군 포로의 생환율은 귀국 기준 85%이다.] 천왕성 작전으로 제6군은 남과 북으로 완전히 부대가 단절되어 있었고 본부가 있던 남쪽은 먼저 항복하였으나, 북쪽에서는 전투를 이어 갔고 남쪽에서도 항전이 일부 계속되었다. 이들은 제6군 사령부가 항복한 뒤에도 무장 해제하지 않았으며, 파울루스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지속적으로 방송한 끝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최소 7,000명에서 11,000명 정도의 군사들은 끝까지 저항한 끝에 진압되었다.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던 그들은 남부 집단군의 후퇴와 재정비를 도왔다. 그리고 독일 본토에서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제6군의 성스러운 저항이 단 하나의 겁쟁이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면서, 이후로 그 누구도 [[원수(계급)|원수]]로 승진하지 못한다고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캅카스로 진격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포위망에 갇힐 뻔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A집단군 사령관은 포위망을 탈출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후퇴 작전의 성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독일군에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최소한 [[일본군]]처럼 아예 참패를 감추지는 않았다. 독일에서는 3일 동안 극장과 식당 등의 문을 닫게 하고, 괴벨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총력전 연설]](스폴트팔라스트 연설)로서 도리어 국민들의 임전 의식을 고취시키고 독일을 차츰 전시경제 체제로 바꾸어 나가기에 이른다. 한편 수십만의 독일군 전사자 대부분은 전장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그렇듯이 한 곳에 모아 놓은 다음 [[화장(장례)|화장]]한 뒤 잔해를 그대로 매장했다. 소련군이 적군과 아군 유해를 모두 챙겨줄 여력도 안 됐을 뿐더러, 당시에는 땅이 얼어 붙어서 시신을 일일이 매장도 하기 힘들었고 치명적인 [[티푸스]][* [[장티푸스]]보다 훨씬 무섭고 치사율이 훨씬 높다.]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기 시작하면 식수마저 오염시켜 [[수인성 전염병]]까지 돌기 때문이다.[* 독일군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련군 시신도 똑같이 처리됐다.] 그 광경을 목격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한번 가 봤지만 다시는 가 보고 싶지 않았다" 고 그 처참한 광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남겼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