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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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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폭풍 작전]] === 독일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몽상 같았던 보급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고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보급을 요청했지만 독일군 상층부라 한들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B집단군과 협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는 작전의 재량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6군이 겨울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과 남서 방면군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던 B집단군의 잔여 병력마저 섬멸한다면 이미 캅카스에 일부 진출한 A집단군도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95-041-23A%2C_Ostfront%2C_Adolf_Hitler%2C_Erich_v._Manstein.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3월 만슈타인의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 사진 오른편으로부터 제4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공군 원수, 총통 전용기 기장 [[한스 바우어]] [[슈츠슈타펠|SS]] 중장, 만슈타인, 히틀러.] || 이에 히틀러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6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이 돈 집단군이라는 것이 새로 투입된 몇몇 부대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4기갑군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상 패잔병 집단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편제는 거대했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분쇄한다는 임무는 돈 집단군이 감당하기엔 불가능한 임무였다. 새로 편성한 [[헤르만 호트|호트]] 기갑집단과 홀리트 파견군, 루마니아 4군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 끝에 호트 기갑집단의 선도 부대인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50㎞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남서쪽으로 탈출하여 돈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과거 역사가들은 이를 파울루스의 히틀러 맹신 때문으로 분석하고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 시점 독일 제 6군은 공세 역량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다. 많은 문서들이 겨울폭풍 작전이 포위 직후 빠르게 이루어진것처럼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포위망 돌파 시도가 3주 뒤에나 실행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포위망 완성 전에도 식량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던 6군이 이 시점에 더 강해져 있을 리는 없다. 만약 6군이 3주가 지난 시점에도 자력 돌파가 가능할정도로 전투력이 높았다면, 포위망 완성 초기에 치르강 방면으로 돌파를 해 버렸을 것이다. 이미 치르강 방면, 50㎞보다 가까운 거리에 홀리트 분견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겨울폭풍 작전은 6군에게 최단거리 돌파를 한 작전이 아니라, 소련군의 남쪽 허점을 찔러 빠르게 포위망을 돌파해보려는 작전이었다. 기습의 효과가 생각보다 부진하니, 포위망 돌파 부대가 되려 기존 전선 간격보다 먼 거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만슈타인은 6군 입장에서 어떠한 상황 개선도 없음에도 6군에게 돌파해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파울루스는 포위망 돌파를 위해 29차량화보병사단만은 최고 전투력을 유지시키며 아껴두었지만, 파울루스는 이 부대로도 최대 20㎞정도밖에 진격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구출 작전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만슈타인은 6군의 고난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 히틀러에게 6군의 항복을 허가해 줄 것을 탄원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한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와 [[스타프카]]는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힐 작전인 '토성 작전' 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돈 집단군이 겨울폭풍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자 돈 집단군에 대한 반격 계획인 '소(小) 토성 작전'으로 작전을 변경해 돈 집단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소련군 51군을 상대로 분전하던 루마니아 4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2친위군과 5전차군의 공격에 돈 집단군마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예하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6군이 탈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폭풍 작전은 6군을 구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캅카스에 진출한 A집단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 줬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600><tablebordercolor=#FFFFFF,#1f2023><nopad> [[파일:attachment/stalingrad-ende020.jpg|width=100%]] || 독일군은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독일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 장교들만 빼온 것은 아니고, 부상병들, 열등한 슬라브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수모를 막는다며 히틀러가 직접 철수시킬 것을 명한 [[간호사]] 등 여성 보조원들, 도하 작전 지원을 위해 왔다 할 일이 없어진 [[크릭스마리네]] 하천함대 소속 해군 장병 등 일부도 운좋게 철수 행렬에 합류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굼락 비행장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에 대해서 독일 내에서는 [[스탈린그라드(1993)|스탈린그라드]]같은 좌파 영화가 매도한 것이라는 반발도 있었으나 ZDF에서 제작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큐멘터리 및 다수의 참전자 수기를 보면 굼락 비행장은 살기 위한 온갖 수가 동원되는 아비규환이었단 증언들이 많이 나온다. [[https://cafe.naver.com/bitethatbait?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26195433%2526articleid%3D121639|#]] '''현재도 굼락 비행장과 피톰닉 비행장에서는 많은 독일군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고 있다.''' [[https://stalingradfront.com/articles/articles-about-stalingrad-battle/gumrak-airfield/|#]] 아예 사단 예하 부대는 남겨두고 [[사단장]]과 참모장교, 기타 중요 인물 몇몇만 탈출시킨 경우도 있었다. 기병사단에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복에 [[기갑]] 병과를 뜻하는 분홍색이 아닌 기병 병과의 금색 부착물을 단 것으로 유명한 24기갑사단이 대표적이다.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했으나, 참모진 등을 수송기편으로 빼와 후방에서 그들 및 구 24기갑사단 출신 타 부대 전출자나 회복된 부상병 등을 모아 재창설했다. 물론 대다수는 신병들이었다. 하지만 사단장인 [[https://en.wikipedia.org/wiki/Arno_von_Lenski|아르노 폰 렌스키]] 소장은 다른 부하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 후 [[동독]]에 정착해서 [[동독군]] 창설 후 육군 소장으로 임관했고 퇴역 후 동독 의회 의원까지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공중 봉쇄로 이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편마저 사실 안전하지 못했다. 전술된 바와 같은 소련군의 악착같은 공중공세와 대공포화로 인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수송기]] 488대, [[승무원]]은 1천 명 이상을 상실했다. 천신만고 끝에 수송기에 탑승하고서 하늘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독일군 6군의 수중에 있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라크 비행장에서는 1943년 1월 23일, 수송기들이 이륙을 준비하던 중 활주로에 소련군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탑승객들이 마구잡이로 비행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심지어 이륙하던 수송기가 소련군의 전차포에 맞아 격추되는 아비규환과 대혼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날 굼라크 비행장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독일군 장병은 4성장군 파울루스부터 말단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할 길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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