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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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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 소련에서는 이슬람 신학교를 딱 두 개만 운영했으며 이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보급하고 역사적 상징성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소련의 영토 중에는 중세 초에 [[하디스]] 분류학이 발전했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역사|우즈베키스탄]] 일대[* 원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는 [[불교]]나 [[마니교]]도들이 운영하던 종교 시설 겸 학교들이 많았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면서 원래 있던 종교 기관과 학교들이 중세 이슬람 학교로 개조되었다. 그것 때문에 하디스 분류학이 [[아라비아반도]]나 [[바그다드]] 같은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힛 알 부카리"[* 이슬람 순니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디스 편집본]가 편찬된 [[부하라]]에는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전시용으로 "미르 아랍 마드라사"라는 7년제 이슬람 신학 대학교를 운영했고 [[투르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타슈켄트]]에도 이슬람 신학교를 운영했다. 연방 정부가 이슬람 신학교들을 운영한 목적은 소련 무슬림들의 불만을 달래주고 [[제3세계]]의 [[이슬람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세력, 소련의 무슬림 학자들 간의 교류를 지원하고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소련의 대 이슬람 유화 정책은 무슬림 인구가 밀집한 [[중앙아시아]]나 [[캅카스|북캅카스]], [[아제르바이잔]], [[타타르스탄|볼가 강 일대]]에 한정되었고 무슬림 인구 비율이 소수라서 봉기할 가능성이 적었던 지역[* 이를테면 [[립카 타타르]]인들이 사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에서는 정교회처럼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으며 가장 협력할 가능성이 큰 이슬람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탄압과 유화책을 반복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국외의 이슬람 사회주의는 중동으로의 진출을 위해 지원하거나 국내의 이슬람 사회주의자들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성장을 유도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슬람 사회주의도 탄압하거나 통제하에 놓았다. 대숙청 시기에 다수의 이슬람 사회주의자들이 숙청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한 게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심지어 레닌을 광적으로 추종하던 볼셰비키로서 러시아 내전 때, 소련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인 알리비 잔길딘조차 대숙청 시기에 강제로 은퇴를 당했다.] [* 알리비 잔길딘은 러시아 내전 시기에 초원과 황무지, 사막으로 이뤄진 수천 킬로미터의 땅을 이동하며 중앙아시아의 소련군에게 보급을 해주었고 내전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의 정치과 행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탈린도 잔길딘을 중용했으나, 이후 쓸모가 다했다고 여겼는지 대숙청 시기에 강제로 은퇴를 시켰다. 그나마, 공을 인정받은 덕에 다른 이들처럼 총살당하지는 않았다.] 지역적으로 따지면 카자흐는 [[텡그리 신앙|텡그리즘]]의 전통이 강해 17세기까지도 명목상으로만 이슬람화된 곳이었다. 심지어는 17 ~ 18세기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카자흐 부족들이 단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이란 종교를 이용했을 정도로 이슬람화의 정도가 낮았다. 한편, 제정 러시아 말기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이자 [[크림 타타르]] 민족주의 운동가였던 이스마일 가스피랄리는 무슬림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일대의 [[립카 타타르]] 무슬림 집단이며 가장 낙후되고 뒤떨어진 집단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일대의 낙슈반디야 교단[* 탈레반보다 좀 더 경직된 교리 해석을 가지고 있는데, 보코 하람처럼 현대 의학을 완전히 부정하고 하디스에 나온 민간 요법만을 인정했다.]이라며 강경하게 비판했던 바 있다. 당대 [[부하라]]와 [[히바]], [[코칸드]] 등 중앙아시아 국가의 지주층들은 대부분 이슬람 율법학자로서 이른바 카디미스트(알 까디미야)[* 오래된 것을 의미하는 아랍어 어휘 까딤(قديم)에서 비롯되었으며, 특별 종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후술하는 자디드주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냥 자신들과 대립하는 보수파 전체를 아울러 이렇게 지칭했다.[[https://research.birmingham.ac.uk/en/publications/the-jadid-qadimist-debate-and-the-russian-revolution-of-1905-07|#]]]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후반부터 태동한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겸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주의가 정치 세력화한 뒤, 그중 일부는 소련과 손잡고 중앙아시아 정치의 핵심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련에서 튀르크계 무슬림 민족들이 민족어를 표기할 때, 일시적으로 [[키릴 문자]] 대신 튀르키예식 로마자 표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자디드주의가 영향을 미친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기존의 이슬람 유화책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카디미스트들이나 자디드 운동가들의 구분을 두지 않고 모조리 숙청했다. 스탈린은 민족주의는 물론,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는 정치 세력이라면 모조리 없애버려서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자라날 토대를 없애 버렸지만, 씨앗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련 내부의 민족주의는 스탈린 사후부터 성장이 가시화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 카자흐 젤토크산 항거 등 대규모 봉기로 분화했다. 한국의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를 비롯해,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반이슬람 정책과 대숙청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뿌리 뽑았다고 칭송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유사한 결과론적 시각이다. 스탈린은 중앙아시아의 보수적인 이슬람 사상과 이슬람 근본주의는 물론, 진보적인 자디드 운동과 이슬람 사회주의까지 모조리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숙청에 큰 타격을 받았고, 따라서 일각의 주장은 지극히 잘못된 주장이며 역사 왜곡이다. 중앙아시아의 세속화는 대숙청도 영향을 주었지만, 소련의 성공적인 문맹 퇴치 운동과 중앙아시아의 사회 · 경제 발전, 문화 혁명, 이슬람 사회주의의 제한적인 확산, 5개년 계획 시기의 강제 이주와 유목민 정주화 정책, 대숙청 이후, 중앙아시아 권력 집단과 소련 정권 간의 협력 관계 구축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중앙아시아 이슬람 사회의 세속화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변화와 소련 정권의 탄압은 작게나마 소련 공산주의의 대의와 이슬람 사회주의의 이상을 믿는 이슬람 좌파 세력을 보존시켰고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속하고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이슬람 사회주의를 전파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페츠나츠 154 독립 대대처럼 소비에트 연방에 충성하는 중앙아시아인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들이 아프간전과 여러 특수 작전에 투입되어 국가를 위해 헌신하기도 했으며 대조국 전쟁 시기에도 많은 수의 중앙아시아인들이 참전하여 연방을 위해 분전했다. 세속화의 여러 요인 중에서 문맹 퇴치 운동과 교육 사업, 산업 투자는 기초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던 문맹 농민과 유목민들이 소련 체제 하에서 교육과 산업화의 혜택을 받게 해주었고, 중앙아시아 농촌 사회에서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비교하자면 20세기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자마아티 이슬라미|갖가지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문맹 퇴치 운동을 결사반대]]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해당 국가들에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이 만연한 사례와 대조할 수 있다. 또한 연방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장려하고, 성평등 교육과 여성 운동을 전개해 중앙아시아 지역에 만연한 성차별을 완화해 나갔다. 또한 5개년 계획 시기부터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의 고용을 확대하고 교육 접근성도 개선하여 여성의 발언권과 사회적 지위도 높였다. 일부 몰지각한 중앙아시아인 남성과 가장들이 가정 내 여성 구성원의 취업과 사회 활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이를 탄압하거나 억제하려 들었지만, 연방 정부에서 단속에 나서고 중앙아시아의 사회 · 경제가 발전해 나가면서 중앙아시아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삶의 질은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상당수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남녀 공학에 합반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스탈린 사후부터 연방의 이슬람교는 소련의 다른 종교들과 비슷하게 공개적으로 탄압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1943년 소련 당국은 기존 러시아 무슬림 중앙 신앙국을 각 지부로 분리하여 소련 유럽 지역 및 시베리아 무슬림 신앙청,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무슬림 신앙청, 범캅카스 무슬림 신앙청, 북캅카스 무슬림 신앙청으로 분리하여 각 지부 별로 무프티(Mufti)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가 관리하게 하였다. 다만, 소련의 무슬림 인구에 비해 이슬람 관련 기관은 비교적 적은 수였기 때문에 당시 소련에서 신앙청에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성직자였던 "방랑 물라(Бродячие муллы, Wandering Mullahs)"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성직자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산되기도 했다. 소련 당국은 무슬림의 의무였던 [[메카]] [[성지순례]]도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1년에 몇십 명 가량만 허가를 내 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불허에 가까웠다. 따라서 소련 무슬림들은 주로 지역의 무슬림 사원이나 종교 유적지를 참배하는 식으로 성지순례를 대신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으로 인해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 아주 세속적이지만 [[소련 붕괴]]의 충격으로 인해서 [[타지키스탄]]처럼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입되어 큰 진통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던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은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전후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한 후 [[탈레반]]과 합류하고 나서 소모되어 현재는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 이러한 현상은 연방 해체의 충격으로 공산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가, 대숙청과 소련 정권의 탄압으로 이슬람 모더니즘과 세속주의가 대폭 약화된 상황에서 사회적 혼란과 경제 붕괴가 겹쳤고, 이런 사회 · 경제 · 사상적 아노미 현상 속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틈을 비집고 들어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여기서 '자디드 운동을 위시한 이슬람 개혁 운동을 뿌리 뽑은 것이 이슬람의 현대화와 개혁을 막아 버려서 연방 해체 이후에 탈레반을 위시한 근본주의 세력의 준동을 야기했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이 오늘날 튀르키예 에르도안 정권의 이슬람주의 정책의 원인이 되었다.'는 논리적 비약으로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해석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사회주의와 이슬람 모더니즘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사회 · 경제적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을 이용해 급성장한 것이지, 스탈린의 대숙청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이슬람 개혁 운동과 이슬람 사회주의가 탄압받은 것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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