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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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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그리스도교]] == 18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국가 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교]]는 시민 혁명과 과학 혁명, 세속주의의 성장과 교권의 약화 등 다양한 사건과 요인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권위와 권력을 잃어갔다. [[성직자]]들은 모든 계층에서 선발했지만, 대체로 [[귀족]]이거나 지배층에 속했으므로 시민 혁명이 일어나거나 개혁을 시행할 때면 적폐나 개혁 대상으로 간주받았다. 러시아사 전반에 걸쳐 속권과 교권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본래 러시아 교회의 수장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은 비잔티움 황제를 세상에 '유일한 기독교인의 군주’로 표현했으며, 러시아 또한 [[키예프 루스]]가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비잔티움 황제에 (명목상의) 대한 복종을 강조받았다.[* 소위 [[타타르의 멍에]]가 킵차크 칸국이 루스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식으로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다. 그 당시 정교회는 여러 루스 공국들을 통합시키는 유일한 행정 조직이었으며, 그 수장은 엄연히 세계총대주교였다. 비잔티움이 친타타르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거의 대부분 그리스인이거나, 그리스화된 불가리아인이었던) 키예프 관구장주교는 이러한 비잔티움 정책의 지랫대로 사용되었다. 특히 모스크바와 리투아니아 대공들은 비잔티움에도 조공을 바치길 강요받았다. 비잔티니스트들은 이를 '비잔티움 연방'이라는 초국가적 공동체로 묘사하지만, 반대로 제정 시대의 역사학자, 교회학자들이 그 시기를 몽골-타타르가 아닌 그리스인들이 루스를 지배하던 굴욕적인 시대, 그리스인의 멍에, 압제 등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국 비잔티움 교회의 주류가 되어 러시아 교회에 깊은 영향을 준 헤시카스트들은 비잔티움 황제를 교회의 주인이 아닌 보호자이자 후원자로 보았다. 황제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 복종을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수용되었다. 그리고 결국 몰락해가는 비잔티움이 동서 교회 통합을 요구하자, 러시아는 앞서 언급한 논리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비잔티움 황제가 더 이상 ‘유일한 기독교인의 군주’가 될 수 없다면, 실질적으로 독립된 유일한 정교 국가의 군주였던 모스크바 대공이 자연스럽게 그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잔티움으로부터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서, [[제3의 로마]]라는 이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러시아의 차르 역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비잔티움 황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충성을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로마 황제', '제3의 로마' 등의 관념은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자신들이 '''죄를 짓는다면 (비잔티움 국가와 황제가 그랬듯이) 몰락할 것이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자면 가짜 드미트리, 에밀리안 푸가초프 등 '차르'를 참칭한 이들조차 기독교적 역성혁명에 기반한 '로마 황제'임을 자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속권과 교권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표트르 1세는 영국 성공회를 본떠 러시아 정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종무청을 설립해 종교 전반을 국가 통제 하에 두었다. 교회는 독립성을 상실하고,‘모스크바 유수’로 상징되는 억압 속에서 세속화가 심화되었다. 정교회 내부에서는 표트르 1세를 ‘적그리스도’로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속권을 지지하는 측은 ‘황제교황주의자’로, 교권을 지지하는 측은 ‘교황주의자’로 서로 비난했으며, 지식인과 대중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조롱하고 경멸했다. 레프 톨스토이[* 그는 모든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기에, 현대 기준으로도 정교회는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 기준에서도 이단으로 간주된다.]나 니콜라이 고골과 같은 문호들은 부정적인 성직자 캐릭터를 창작하여 교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니콜라이 2세 통치 말기,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의 복원을 둘러싸고 정치·종교계에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04년, 장관위원회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구장주교 안토니는 ‘국가화된 교회’의 현실을 비판했고, 이는 장관위원회 의장이었던 [[세르게이 비테]]의 지지를 받았으나, 종무원장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종무원은 가능한 한 빠른 모스크바 공의회 소집, 총대주교좌 복원, 종무원 자체 구조 개편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1906년에는 안토니를 의장으로 각 지방 주교, 학자, 사회 활동가들이 참여한 특별 부서가 황제의 승인을 받아 창설되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교회는 교회의 자치권 확대 · 총대주교좌의 복원 · 주교 회의의 교회 운영 · 성직자의 젬스트보, 국가 평의회 참여 · 사목구와 개별 교회에 독자적인 재정권과 성직자 선출권 부여 · 교회 성직자 - 신도 협의체 구성 · 교회법과 교육 기관 개혁 · 각 교구와 관구의 증설과 재조정 · 일반 사제들에 대한 지원과 사목 활동 개선 · 성직자 자녀들에 대한 처우와 사회적 인식 개선 · 평신도 대표와 평신도 단체들의 역할 증대 등 다종 다양한 현안과 개혁안들을 논의하고 추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혁명으로 제정 자체가 붕괴되며 중단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소수 보수파를 제외한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혁명과 임시정부의 출범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차르의 '보호'로부터 '해방'된 것을 '축하'했다. 심지어 노브고로드의 주교는 '차르 전제정이 종무원을 세운 이래로, 러시아 정교회는 200년 동안 노예였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바레이스키 주교이자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는 주교 일라리온 트로이츠키의 연설이 잘 보여준다. "서유럽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표트르 전제정의 독수리는 러시아 정교회의 심장을 파먹었다. 성물을 모독하고 불경건한 표트르의 손이 루스의 최고 성직자를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우스펜스키 성당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일련의 '해방' 선언 이후, 종무원과 차르의 압제에서 벗어난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총대주교좌를 복원하고 미국 교구에서 활동하며 그 능력을 입증한 대주교 티혼을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러시아 정교회는 존속했으며[* 소련 내의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 정교회와 구분되어 ‘살아있는 교회’라 불렸다], 볼셰비키 정부는 정교회를 제국의 지배 이념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탄압했다. 동시에 정부는 2월 혁명 이후 활발해진 교회 개혁 운동을 어용화하여 ‘살아있는 교회 운동’을 내세우고, 이를 명분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독립성이 강하거나 반소적 성향을 지닌 성직자들을 제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정 시대와 달리 소련 시기의 정교회는 외형상이라도 공산당에 일정 수준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명목상의 순응으로, 교회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현상이다. 현대의 로마 교황청조차 독재국가들과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려 한다. 어떤 면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모체인 비잔티움 교회와 유사한 행보로 볼 수 있다. 기독교 제국 시절 세계총대주교좌는 황제를 비판하고 치열한 신학 논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후에는 세속 권력에 대한 순응을 교리적으로 정당화하며 이를 신의 징벌로 받아들였다.] 정리하자면,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기의 종교 탄압은 성격이 서로 달랐다. 제정 시대에는 겉보기에는 물리적 탄압이 거의 없었지만[* 실제로는 18세기 초까지 교회 재산의 국유화, 체제 비판적 성직자 체포 등이 자주 있었고, 결국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더 이상의 탄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대신 정교회를 조롱하거나 그 교리를 부정하려 했다. 반면 소련 시기에는 ‘살아있는 교회’를 내세워 티혼 총대주교를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비롯해, 물리적 탄압이 전면에 나섰다.[* 신학교 정책에서도 이 차이는 분명하다. 소련은 신학교를 강제 폐쇄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제정 러시아는 외국의 그리스, 라틴 신학자를 초빙해 서구식 혹은 그리스식 학문 베이스의 수업을 강제하고 러시아 학자를 배제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시대의 종교적 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련 시기에는 종교가 더 이상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에, 단순히 종교 조직만 선별적으로 탄압할 수 있었다. 반면 전근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전통을 형성하는 중심 축이었기에, 종교 단체를 억압하려면 그 사상과 교리까지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했다. 따라서 많은 경우 러시아 황제들은 종교적 신념에 기반해 통치했지만, 정작 종교 ‘단체’로서의 정교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직자 입장에서 공산당의 핍박은 ‘순교’ 또는 ‘고난’으로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지만, 차르 정부의 교리 간섭이나 교회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소련 시기의 정교회는 명목상으로는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예배와 고해 성사, 각종 예식을 제한받았으며 무수히 많은 교회와 기독교 유물, 성지들이 파괴당했다. 교회 인사들은 대규모 고해 성사, 야외 예배, 지하 교회 운영 등 다양한 방안을 써서 연방 정부의 탄압을 버텨내려 애썼지만, 스탈린 정권 내내 교회의 여건은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를 부흥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고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선 소련 정권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탄압을 일시 중단하고 애국심 고취와 저항 의지 강화를 위해 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 덕분에 러시아 정교회는 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더 많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 [[http://m.pressian.com/m/m_article/?no=178119#08gq|기사]]][*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ommunism/communismhistory-07102018135141.html|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인터뷰]]]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종교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정교회는 러시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소련 말기 기준으로 연방 전체 인구의 종교는 [[무신론]] 60%, 러시아 [[정교회]] 20%, [[이슬람]] 10%, [[개신교]] 7%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으로 응답한 인구의 상당수가 [[정교회]] 신자였다. 한 예시로 소련 비밀 경찰 [[KGB]] 간부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사실 정교회 교인이었고 수많은 [[소련 공산당]] 출신 정치인이 [[러시아 연방]] 건국 이후 정교회 신자임을 어필하며 정교회 신앙을 회복하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결국 [[소련 붕괴]] 후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와 주류 기득권이 주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거의 준 [[국교]]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푸틴에 대한 반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선 타 유럽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이탈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가톨릭]]이나 [[루터교]] 같은 개신교 교단 또한 마찬가지로 탄압받았다. 특히 소련 당국은 서방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서유럽 기독교의 영향 확산을 철저하게 경계하여 국내 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역에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선교 활동을 통제하고 관련 인사들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같이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이 강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인민들은 이런 반종교 정책을 민족 고유 전통과 역사를 말살하려는 시도로 여겨 소련과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당장 폴란드에서는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점으로 가톨릭 신앙을 탄압하던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정부 투쟁이 탄력을 얻었고[* 소련이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유에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동독]]에서는 [[루터교]] 신자들이 [[동유럽 혁명]] 당시 앞장서서 반체제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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