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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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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화 ===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소련 정부는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러시아화(русификация)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1934년 17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지역적 민족주의 성향의 발호를 강하게 비난했으며, 동시에 로마자 사용의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통합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거대한 목표로부터 이탈하려는 소수 민족들의 민족주의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에 레닌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러시아 제국주의|대러시아적 쇼비니즘]]적 시각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에 따라 1930년대 중반부터 로마자를 사용하던 언어들은 [[키릴 문자]]로 전환했다. [[조지아어]]나 [[아르메니아어]]같이 고유의 문어 전통이 있는 언어나 [[독일어]], [[이디시어]] 같은 언어에는 그렇게까지 못 했지만 그외 지역(특히 연방 소속 공화국)에는 키릴 문자를 강요했다. 이런 식의 키릴 문자 강요는 상당수 민족언어에 문제를 일으켰는데, 비슬라브계 언어들의 경우 민족어의 음운구조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키릴 문자로 언어를 표기함으로써 언어 사용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했다.[* 키릴 문자화 당시 같은 음운도 언어에 따라 다른 글자를 할당하여 일부러 이들이 뭉치는 걸 막았다는 썰이 있다.] 또한 기존에 키릴 문자를 사용하던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도 역사적으로 독립적인 언어전통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도록 강요받았다. 가령 [[벨라루스어]] 맞춤법의 경우 20세기 초에 들어 벨라루스 언어학자였던 브라니슬라우 타라시케비치(Branislaŭ Taraškievič)에 의해 확립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벨라루스 공산당은 기존 타라시케비치 맞춤법을 보완한다는 핑계 아래, 1933년 보다 러시아어와 비슷하게 문법을 개정하였다. 우크라이나어 역시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어에서 "g" 발음을 나타내던 문자 Ґ 또한 이 시기에 삭제되었다가 소련 해체 후에야 복원되었다. 1938년에는 비 러시아계 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의무가 되었다. 사실 1938년 쯤이면 민족언어의 보급과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별개로, 이미 [[러시아어]]의 상층언어 지위가 공고해진 상태였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 가정에게 민족어 교육을 의무화하지 않고, 자녀에게 '''러시아어와 민족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하는 정책을 발효했다. 중앙어와 지방어가 병용되는 상황에서는 중앙권력이 강해질수록 중앙어 구사 능력이 계층의 척도가 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러시아 민족이 주류로 있는 소련 정부의 지배를 받는 이상 러시아어 구사 능력 없이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받는 [[청소년]]들이나, 그 청소년의 부모 세대로써는 '''당연히''' 러시아어 교육을 더 중시하게 된다. 전통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조부모세대는 오히려 민족어 교육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어]] 구사자가 실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1968년에는 소련 교육과학 아카데미 산하에 민족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을 위한 연구소가 설립되어, 교과별 단어 수준 선정에서부터 교사 교육에 이르는 광범위한 러시아어 교육 및 교수법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75년에는 모든 중등학교 이상에서 러시아어를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1979년에는 '최소화'라는 슬로건 아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유치원]]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러시아어 사용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어를 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학]]이나 언어 교육의 매개어는 여전히 민족어 비중이 높았고, 민족어 교육 시수도 그렇게 낮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볼가 타타르]]나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스]] 같은 [[튀르크]]계를 주축으로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비동화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사회/경제적 조건이 급변하기 시작하여 비동화그룹의 인구가 차츰 동화그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table align=center> 연도 || UM || UB || AB || AM || || 1970 || 51.0 || 36.7 || 3.1 || 9.2 || || 1979 || 37.6 || 48.8 || 3.5 || 10.1 || || 1989 || 10.1 || 59.0 || 4.3 || 21.3 || || 1994 || 6.0 || 61.6 || 3.5 || 22.0 || 당시 통계를 살펴보면 UM은 비동화 그룹으로 민족어만 사용, UB는 비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민족어를 제 1언어로,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B는 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러시아어를 제 1언어로 민족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M은 동화그룹으로 [[러시아어]]만을 사용한다. 1970년대 이후 민족어만을 사용하는 비동화 그룹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동화그룹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소련]]의 언어 정책은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독립국가연합|구 소련 국가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당국의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만으로 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고, 정치적으로도 민족 정체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예민한 문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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