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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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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러시아 영화)] 소련에서는 [[영화]] 관련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이 영화를 이념선전의 도구로써 삼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초기까지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교육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활자매체보다 영상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상매체가 이념을 설파하는데 적격으로 여겨졌다.[* [[러시아 영화]] 항목에도 나와있듯, 소련 영화는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TV와 라디오가 없었던 시절에는 뉴스도 영화로 소련 당국에게 더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문맹이 퇴치되면서 신문과 잡지에도 크게 신경쓰게 되었고, 동시에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는 게 가능한 라디오와 TV가 보급됨에 따라 선전 역할은 이들 매체로 넘어갔고, 영화는 일반인들에게 순전히 오락용으로써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소련말기까지도 선전기능으로써 역할이 완전히 없어진것은 아니라서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내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과 영웅에 대한 영화가 주기적으로 제작되거나 해외에서 소련인들이 활약을 펼치는 오락영화로 수행되었다. 소련은 영화 제작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신경을 썼다. 소련의 모든 도시에는 영화관이 한두곳 정도는 갖추어져 있었으며, 작은 시골마을에도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흔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TV가 대중화된 1970년대에도 연간 영화관람객수가 '''40억명대'''에 달했고, 소련 말기에도 관람객수가 연 30억명대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 만큼 영화관 수가 많았던 데다가 표값도 쌌기 때문에[* 1982년 기준 영화표 한 장은 50코페이카였다.] 부담없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인기를 누렸고, 흥행한 영화들은 기본 수천만 단위의 엄청난 관객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로 영화관들이 경제난으로 인한 지원 중단과 수익성 악화로 문을 닫으면서 이러한 기반시설이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 추세가 반전되었지만 아직도 소련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소련 영화계 또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등 가라성 같은 영화인을 배출했으며, [[몽타주(영상편집)|몽타주 기법]]의 선구자로 불린 [[전함 포템킨]] (1925), 소련 영화사 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전쟁과 평화]] (1967), 소련 SF의 걸작으로 불리는 [[솔라리스]] (1972), [[스토커]] (1979)등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다양한 명작을 배출했다. 당시 소련 영화 감독들은 국가에서 전액 지원받아 운영되었기에 흥행보다는 작품성과 예술성에 신경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당대 소련의 영화 가운데 철학적이거나 시적인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 예술성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러한 점때문에 소련 영화 가운데 서구권에서 인기를 끈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주로 북한이나 베트남, 중국,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 등 공산권에서 인기를 끈 편이었다. 소련 역시 각 공화국별로 지역영화도 발달되었다. 특히 러시아 뿐만 아니라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영화 중에서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https://en.wikipedia.org/wiki/The_Legend_of_Suram_Fortress|수람 요새의 전설 (ამბავი სურამის ციხისა, 1985)]]이나 [[https://en.wikipedia.org/wiki/The_Color_of_Pomegranates|석류의 빛깔 (Նռան գույնը, 1969)]]처럼 해외에서까지 주목받은 작품도 있었다. 다만 소련 정부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문화적으로 보수화되면서 지역색이 강한 작품은 [[https://en.wikipedia.org/wiki/Four_White_Shirts|네 개의 와이셔츠 (Četri balti krekli, 1967)]][* 제작 당시에는 검열 때문에 약 20년 가량 개봉하지 못하다가 1986년 5월에서야 첫 시사회를 가졌다.]처럼 탄압받기도 했다. 소련에서 외국 영화 최고흥행기록을 달성한 영화는 [[멕시코 영화]] [[https://en.wikipedia.org/wiki/Yesenia_(film)|예세니아 (Yesenia, 1971)]]였다. 이외에도 [[인도 영화]]도 많이 수입해 높은 흥행기록을 올렸으며, 타 유럽권 국가 영화나 여러 제3세계 국가 영화작품도 수입해서 개봉했다. 미국영화도 드물게 수입하여 상영되기도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영작이 많지 않아 많은 미국 영화들이 한참뒤에 개봉되거나 개봉조차 되지 않아서 불법복제 필름 혹은 비디오로 시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소련 초창기에는 수입제한이 없었지만, 1927년에 수입제한이 생기면서 이때부터 미국영화를 보는데 지장이 많았다. 예외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대한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영화를 상영했으나, 전후에는 냉전이 시작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쉽게 관람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데탕트 시기에 일시적으로 미국영화의 상영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 또한 반짝 특수 정도에 그쳤다.] 소련내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접급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것은 고르바초프 시대인 1980년대 중반이었다. 외국문화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고, 개인사업이 활성화된데다가 아직 비디오 레코더의 보급률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서구산 비디오영화들을 틀어주는 비디오 상영관이 소련 전역에 속속 들어섰던것이었다.(당시 소련에서는 이를 비디오 살롱이라고 한다.) 이 비디오 상영관에서 틀어주는 영화들의 번역과 더빙수준이 날림 수준인것이 많았고, 영화 관람비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2배는 더 비쌌지만 그간 수입안된 영화들이 어떤영화였는지 궁금했던 소련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해서 짭짤한 산업이 되어갔다. 이후로 이 비디오 상영관들은 비디오 레코더 보급률이 좀 더 높아짐에 비디오 대여점으로 전화되었으며 소련 해체기 이후로 영화관들이 폐쇄되거나 표값을 올리면서 영화관에 갈돈이 없던 러시아인들의 문화공간이 되어갔다. 영화 뿐만 아니라 [[연극]], [[발레]] 등과 같은 '무대예술'의 초강대국 중 하나였으며 지금의 러시아까지 이어진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안톤 체호프]] 등 전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은 위인들이 많이 있으며[* 다만, [[안톤 체호프]]는 [[소련]] 체제가 출범하기 한참 이전인, 1904년에 사망했다.], 현재에도 연극 관련 교육과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다. 발레 또한 소련 시절부터 현재 러시아까지 발레단들 하면 세계구급 발레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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