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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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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화 == >'''Ну, секса у нас... (смешок) секса у нас нет, и мы категорически против этого!''' >'''글쎄, 우리에게 성관계란... (웃음) 우리에게 성관계란 없어요, 우리는 단호하게 이에 반대하니까요!''' >1986년 7월 17일, 미국-소련간 교류방송 프로그램인 "여성이 여성에게 말한다" 중 소련측 참가자의 발언[* 당시 해당 발언의 당사자였던 류드밀라 이바노바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발언이 본의와 다르게 왜곡되었다면서 반박했다.[[https://web.archive.org/web/20080615014123/http://spb.kp.ru.mastertest.ru/2004/10/01/doc36553/print/|출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러시아어)]] 하지만 해당 발언은 당시 소련 사회가 성을 금기시하던 현실을 풍자한 유행어로 소련인들에게 화자되었다. 이후 이바노바의 발언은 '''소련에 성관계는 없다(В СССР секса нет)'''라는 표현으로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가 되었다.] 소련의 성문화는 건국 초창기 [[러시아 내전]]과 [[신경제정책]], [[산업화]]를 겪으며 시대에 따라 급변했다. 혁명 초기 자유 연애에 대해서도 일부는 부르주아적 연애로 비난했고, 일부는 반대로 자유 연애를 강조했으며 콜론타이처럼 혁명적 연애, 사회주의 가족애와 동지애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련 초기의 성문화 형성과 여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여성 운동가들은 혁명적 연애, 육아와 가사의 완전한 사회화, 심지어 [[일부일처제]] 폐지, [[오픈 릴레이션십]]을 방불케 하는 자유 연애와 [[성적 자유주의]]를 주장했으며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이후 소련에서는 [[성 긍정]]이 새로운 성문화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건국 초창기, [[블라디미르 레닌]]을 위시한 대부분의 소련 수뇌부들은 말로는 성평등을 외쳤지만, 러시아의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 영향을 받아 성적 개방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레닌은 콜론타이가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 한 잔을 마시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물 한 잔 이론' 이라 부르면서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레닌은 다른 이들이 콜론타이를 비난할 때 어느 정도 보호해 주었으며 콜론타이의 여성 운동과 다양한 논설 기고, 소설 집필과 발표 활동을 존중해 주었다. 또한 콜론타이의 양성 평등 이론과 성평등과 관련한 법제 정비 노력을 지지했으며 여성이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했다. 다만, 레닌은 이렇게 콜론타이를 보호하고 지지해주면서도 콜론타이가 노동조합과 관련해 자신과 정쟁을 벌이고, 제노텔(여성부)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콜론타이가 아닌 상대적으로 유순한 이네사 아르망을 제노텔의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네사 아르망은 콜론타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을 뿐, 레닌의 최측근으로 오래도록 활동한 고참 볼셰비키로서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경제와 행정 부문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의 중진이었다. 그녀는 여성 인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18년에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카를 라데크 같은 거물 정치인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러시아 여성 노동자 대회를 추진하고 레닌을 연사로 초빙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아르망이 20년에 콜레라로 사망한 뒤, 콜론타이가 제노텔의 수장이 되었고 그녀와의 갈등을 불편해한 소련 지도부는 콜론타이를 경질해 외교관으로 보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이 때문에 콜론타이는 상대적으로 권력과 거리가 먼 노르웨이,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면서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숙청기에 옛 볼셰비키 인사들 대부분이 숙청당했던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스탈린의 정치관과 여러모로 대조되었던 콜론타이가 중앙 부처에 남아있었다면, 숙청을 피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콜론타이 이후에 제노텔의 수장이 된 소피야 스미도비치는 자유 연애에 대해 반대하고 가정에 대해서도 기존의 가정상을 유지하면서 아내와 남편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콜론타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소련 지도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다만, 콜론타이의 후임자들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경질된 이후의 제노텔이 완전하게 순수성을 잃고 소련 여성 운동이 급격하게 쇠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스미도비치 역시 여성 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제노텔의 쇠락은 이러한 지도부의 빠른 교체와 운영 방향 변화 외에도 제노텔이 가정을 파괴하고 부모와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두려워 한 중장년층 이상 여성들의 비협조, 여성혐오적 가치관을 지닌 일부 남성들의 공격, 가장 큰 문제였던 인력과 재원의 부족이 영향을 미쳤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레프 트로츠키]]는 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성적 억압]]을 스탈린을 비판하는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 막 소련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가던 개방주의적 성문화는 크게 쇠퇴하여 도로 보수적인 성문화로 회귀하고 말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부터 러시아 내전기에 이르는 약 10년의 혼란기 속에서 많은 관념들이 하루 아침에 뒤바뀌었다지만, 대중들과 관료들의 정서가 완전하게 변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도시의 청년층들은 개방적인 성 정책을 반겼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문화가 일반적이었고, 관료들과 중장년층들도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랐던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보기에 소련의 성 문화는 너무 퇴폐적으로 변화했던것이었다. 이에 스탈린도 중장년층과 관료들의 여론을 수용해서 성 정책을 다시 보수화했다. 제노텔이 해산되었고 이혼 절차도 어려워졌다. 1936년에 여성의 건강이나 불륜 같은 이유가 아니라면 낙태도 금지시켜서 여성의 낙태권과 이혼권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스탈린이 인구 증대와 안정적인 자녀 양육을 바랬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국가 예산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공영 탁아소를 비롯한 보육 시설과 세탁소 등은 상당 기간 동안 축소되었고, 스탈린 정권은 소련 여성들이 가사와 노동, 육아, 교육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슈퍼 우먼이 되길 바라면서 다양한 프로파간다를 퍼뜨려 여성들을 세뇌했다. 스탈린 정권은 남성 노동자들이 노동 규율의 강화와 노동 조합의 약화, 노동자 권리의 축소에 분노하여 태업과 결근, 이직 등을 일삼고 강경하게 저항하자,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 노동자들이 떠난 빈 자리에 집어 넣었다. 제정 시기의 남성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 반장과 경영진의 폭압에 맞서서 서로 단결하여 대항하거나, 개별적으로 근무 중에 작업 반장의 머리에 담요를 씌우고 망치로 머리를 찍거나, 자빠뜨려서 밟아버리는 식으로 저항했었던 경험이 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단결력이 떨어지고, '완력'도 부족해 작업 반장과 경영진에게 비교적 저항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제정 말기에 노동 운동을 지도한 경험이 있는 스탈린 정권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역군으로 추켜 세우면서 남성 노동자들의 빈 자리를 채웠다.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순종적'이어서 태업이나 결근, 집단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교육 수준과 기술 수준이 남성에 비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어서 임금도 적게 줄 수 있었다. 이렇듯, 스탈린 시대부터 소련의 성문화는 보수화되지만, 동시에 러시아 제국 시대에 비해 개선되었던 것들도 많았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는 그날까지도 러시아 전체 지역에 만연했던 [[악습]]인 [[스노하체스트보]], [[조혼]], [[영아 살해]], [[사생아]]에 대한 인권 유린 및 살해, [[아동 학대]] 및 [[가정폭력]], [[성매매]], 자녀에 대한 [[성매매]] 강요, [[명예살인]], 여성의 교육권 불인정, 극도로 가부장적인 문화, 기타 다양한 악습은 소련 정부 차원에서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근절하는데 성공했다.[* 스노하체스트보는 러시아 농촌 지역에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성폭행하는 악습으로서 조혼과 영아 살해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러시아 농촌에서는 11 ~ 13세 남아와 15 ~ 19세의 여성을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보편적이어서 부부 관계를 맺는 게 최소 2년 이상 불가능했었고, 장정들이 약 3개월 ~ 반년 이상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있는 등, 남편이 아내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악랄한 가장들은 이 기간들을 이용해 며느리를 성폭행했고, 그 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화로나 들판에 던지거나 묻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핵가족이 보편적이고 교육 수준 및 치안이 양호한 도시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자녀에 대한 성매매 강요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부농, 공무원, 군인, 경찰, 손님에게 보내 성적 향응을 제공하고 화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가 자녀들 모두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손님'들에게 화대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 존속 기간 동안, 연방 소속 국가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장려되고, 다양한 분야에 여성들이 진출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소련에서 배출했다. 스탈린 사후로 전후 베이비붐 현상에 따라 낙태가 재합법화되고, 이와 동시에 직장 생활의 자율화, 흐루숍카의 보급이 이뤄져 소련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해 스탈린 정권 시기보다 진보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대중 매체에서 성에 대해 보수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여전해서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까지 성에 대해서 심심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언론 통제가 완화되면서 전에는 물밑에서나 이루어지던 성에 대한 논의가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 이후로는 경제난으로 인해 빈곤층들이 성매매에 뛰어드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성매매가 급속히 늘어나고, 포르노 비디오 시장도 급속히 활성화되었으며, 신문과 방송도 황색 언론화되면서 한 동안 소련 시대와는 천지 차이로 퇴폐적으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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