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소련/교육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 1956년 흐루쇼프 정권은 여전히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에게 부과하던 수업료를 폐지하여 초 · 중등 교육 과정에서의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현하고 1958년에 7세부터 시작하는 7년 의무 교육 과정을 8년으로 상향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노동 교육 시간을 확장하고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들도 통폐합했다. 흐루쇼프 정권 시기에는 노동 교육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혜택과 교육 과정을 확대했다. 흐루쇼프는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한 신분 이동이나 승진을 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55년에 고등 교육 기관의 입학 규정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2년 이상 생산직에 근무한 노동자들을 위한 별도의 입학 정원을 배당했으며 청년 학교를 증설해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기회와 야간 · 통신 교육 과정을 확대했다. 흐루쇼프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하려는 이들에게 최소 2년 간 생산직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덕분에 노동력 부족 문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이는 간부의 숫자 증가와 청년 노동자들의 낮은 기술력, 경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흐루쇼프가 강조한 노동과 학업의 결합은 일반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학부모들과 [[노멘클라투라]]의 격렬한 불만을 사서,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는 그가 실각한 뒤에 곧바로 없어졌다. 195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는 연간 8 ~ 10%의 초등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이 벌어져 큰 문제가 되었다. 초기에는 교사의 교수법과 수업 방식을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핵심적인 원인은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과 학습 부진을 겪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제대로 선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 교육부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증설하여 장애 학생들을 수용하는 한편 학생이 유급하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러한 조치 덕분에 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은 급감해서 60년대 중반이 되면 초등학교에서의 유급은 전체 학생 수의 2% 이하로, 70년대 후반에는 1% 미만으로 감소했다. 다른 의미로의 특수 교육도 확대했다. 음악 · 예술 · 체육 분야의 전문가 양성 과정과 영재 교육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유아기부터 수학 · 과학 · 음악 · 미술 교과에서 재능을 드러낸 아동들을 위한 특수 학교도 설립했다. 특히 과학 분야의 영재로 선정된 학생들은 의무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에 특별 시험에 응시해 특수 교육 기관에 입학할 기회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련의 학문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으나, 국가의 근본인 평등 교육 사상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도 상당했다. 1964년에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을 산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 조치를 중단하고 의무 교육 과정을 10년으로 상향했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노동 시간과 실습 시간을 단축하고 흐루쇼프 시기에 노동자들이 누렸던 혜택들도 축소시켰다. 예를 들어, 공장 경영진들의 직원 추천 입학 제도를 제한했다. 고등 교육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대학 신입생 전용 예비 교육 과정(8 ~ 10개월)을 시행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하면 8년제 학교를 마친 학생의 80%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7백만 명의 전문가 양성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센서스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의 75%, 농촌의 50%가 중등 교육 과정 이상을 이수했으며 1970년 ~ 1985년까지 중등 교육 이수자의 숫자는 3배로 증가했다. 80년대 초까지 고등 교육 기관에서는 매년 100만 이상의 전문가들을 배출했고 교육 기관의 숫자도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소련의 교육은 점점 문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급 학교나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때 [[화이트 칼라]]와 [[지식인]], [[중산층]] 출신 자녀들이 [[생산직]] 노동자, [[농민]] 가정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당대 소련을 지배하던 이들은 농민 · 노동자 출신으로 [[크렘린]]에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의 통치를 받던 농민 · 노동자들의 신분 이동과 사회적 지위 향상은 점점 어려워져 갔으며 계층 구조가 경직되어 갔다. [* 브레즈네프 · 셀레스트 · 체르넨코 · 그로미코 · 수슬로프 · 그레치코 · 로마노프는 농민, 우스티노프 · 코시긴 · 안드로포프 · 그리신 · 키릴렌코 · 셰바르드나제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대 크렘린의 최고위 정치인들 대다수가 농민 · 노동자 출신이었다.] 세계 최대의 영토와 2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인 만큼 소련은 교육의 '질' 보다는 '양'에 신경 쓰는 게 타당했지만, 경쟁자인 [[미국]]이 질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소련은 계속 양에만 집착해 질적인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교육의 질적 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교육 과정과 교수법의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학업 성적 불량으로 인한 퇴학 조치도 중단되었다. 1984년에 집권한 체르넨코는 소련 교육의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명목상의 개혁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학교를 창조하고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를 계획적이고 전면적으로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체르넨코 정권은 여러 종류의 직업 기술 학교를 전문 기술 학교로 단일화하고 노동 교육을 강화하여 상급 중등 학교의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 교육을 실시했다. 기존의 직업 교육이 진로 · 진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학생들의 의욕이 낮았기에 자격증 취득을 보장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높이려고 했다. 의무 교육을 10년에서 11년으로 연장하고 취학 연령도 7세로 낮추었다. 이 시기부터 소련의 학생들은 초등 교육 4년, 기초 중등 교육 5년, 상급 중등 교육을 2 ~ 3년받고 18 ~ 19세부터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학급 당 학생 수도 조정했다. 1 ~ 9학년은 40명에서 30명 이하, 10 ~ 11학년은 35명에서 25명 이하로 조정하고 언어 교육은 20 ~ 25명을 초과하면 분반했다. 주당 수업 시수도 학생들의 연령에 맞게 재조정하고 교과 과정도 개정하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현대화를 꾀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 컴퓨터 교육이나 분야별 전문 과정을 개설했으며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체육 · 음악 · 미술 · 환경 수업의 시수를 늘렸다. 이러한 조치는 인민의 교육 수준 격차를 줄이고 교육의 질적 개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재원이 부족했고 종합 기술 교육에 계속 집착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체르넨코가 급사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제도적 평등에 집중했기 때문에 정부 조치와 현실과의 괴리가 더 커졌다는 비판도 나왔다. 소련은 이미 고도로 경제와 산업이 발전한 국가가 되었지만, 다수의 교사들은 여전히 산업화 시기에나 쓰던 교수법으로 현재가 아닌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