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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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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제와 특성 == 소련의 학제는 초등 · 중등 · 고등 교육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무 교육 과정은 스탈린 정권 시기에 7년으로 시작해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 시기에 10년으로 늘어나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틴 체르넨코|체르넨코]] 시기에 총 11년으로, 초 · 중등 교육 학제는 스탈린 정권 초기까지 초등(4년) - 기초 중등(3년) - 상급 중등 및 직업 · 기술 교육(2년. 한국의 고등학교)으로 구축했다가 체르넨코 시기에 최종적으로 초등(4년) - 중등(5년) - 상급 중등 및 직업 · 기술 교육(2 ~ 3년)으로 변화했다. 소련의 교육 과정은 [[수학]]과 [[과학]]의 비중과 중요성이 높았다. 이는 마르크스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연방 정부의 수뇌부들이 산업화를 국가의 생존에 직결된다고 인식해서 수학과 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체 교과에서 수학과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을 정도였으며 [[체육]]과 직업 교육이 약 20%, [[언어]]와 [[역사]], [[미술]], [[음악]], [[윤리]] 등을 비롯한 나머지 교과들이 약 40%의 비중을 점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고학년들에 한정해서 선택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영유아의 보육과 교육은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이뤄지며 탁아소는 생후 2개월인 신생아부터 3세 영아까지 맡아 주었다. 탁아소의 ‘학제’는 3개로 2개월 ~ 1세, 1 ~ 2세, 2 ~ 3세반으로 분류했다. 유치원에서는 하급반(3 ~ 4세) - 중급반(5 ~ 6세) - 상급반(6 ~ 7세)으로 나뉘며 아예 보육과 교육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탁아 유치원도 있었다. 소련의 영유아 교육은 체육 · [[지식]] · [[도덕]] · [[위생]] · [[생활]] · 노동 교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노동 교육이 의아할 수 있으나 소련의 노동 교육은 걷지도 못하는 영유아들을 노동 현장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개념 인식 · 각종 직업 소개 · 노동자들에 대한 존경심 배양 · 레닌의 업적에 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원래 8세부터 입학했으나 체르넨코 시기에 7세로 연령이 낮아졌으며 학제는 4년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중학교|기초 중등 학교]]에 입학해 총 5년 동안 교육받았으며 이후 성적과 학생 희망에 따라 상급 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직했다. 기초 중등 학교의 상위 교육 기관으로는 한국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상급 중등 학교(상급 쉬콜라. средняя школа)와 전문 기술 학교(우칠리셰)[* ПТУ,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Техническое Училище. 영문: PTU. 통칭: Училище)], 전문 기술 학교보다 더욱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종합 기술 학교(테흐니쿰)[* техникум]로 나뉜다. 우칠리셰는 러시아 제국 시기에 존재하던 다양한 직업 학교들의 후신으로서 [[흐루쇼프]] 정권과 체르넨코 정권 시기에 개혁을 이루기 전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 학교 · 직업 학교 · 공장 부설 학교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직업 학교에서는 [[건설]] · [[기계]] · [[전기]] · [[비서]] · [[요리]] · [[예술]] · [[미용]] · [[운전]] · [[간호]] · [[웨이터]] · [[배관공]] 등의 다양한 직업 교육 과정을 제공했다. 테흐니쿰은 공학 및 기술 교육 과정을 제공했으며 우칠리셰의 교육 과정보다 더욱 전문적이었다. 고등 교육은 단과 대학 · 일반 대학 · 아카데미야 · 산업 아카데미 · 사관학교 등을 일컬으며 이러한 기관을 고등 교육 기관(VUZ)[* ВУЗ, Высшее учебное заведение]으로 불렀다. [[대학|대학교]]는 기본적으로 5년제였으나 분야에 따라 4년이나 6년인 경우도 있다. [[소련 붕괴]] 후에는 CIS에 소속된 다수의 국가들이 4년제로 개정했다. 레닌 시기에는 학교 자치제를 시행하여 교사와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학교 협의회와 교직원 회의, 학생 회의 등의 자치 위원회들을 운영했으나, 스탈린 정권부터 교사와 관리자들의 권한과 권위가 확대되고 교육부의 통제가 늘어나서 학교의 자치권은 크게 축소되었고 교장이 학교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다. 그래서 일부 학교의 교장들은 꽤나 제왕적이었다. 소련은 종합 기술 교육론으로 대표되는 전인 교육 못지 않게 재능이 있는 수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특수 교육에도 크게 투자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흐루쇼프 정권부터 스포츠 재능이 특출난 학생들을 어린 나이부터 전문 선수로 양성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이공계에선 [[교사]]가 평가해 소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소련 학술원(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받기도 했다. [[소련군]]도 재능이 확인된 사병들을 수보로프 학교([[소련 육군|육군]])와 나히모프 학교([[소련 해군|해군]]) 같은 유년 군사 학교에 추천 입학시켜 장교로 양성했다. 학술 연구가 목적이라면 법적으로 광범위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허용되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당한 제한이 작용했다. 그래서 소련 학생들은 정부의 간섭과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인문계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고 국가적으로 지원을 많이 해주는 이공계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 저] 허나, 전반적으로 학문에 대한 간섭이 심한 편이었다. [[정치과학]]은 "부르주아 유사 과학"으로 간주해 금지했으며 [[트로핌 리센코]]의 사례와 같이 이념적으로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관련 학계에 큰 피해를 입혔던 경우도 있었다. 현대사의 경우에는 당국에 불편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예: [[스탈린 격하 운동|탈스탈린화]] 이후 스탈린 시대에 대한 서술) 초기에는 인구는 많은데, 학교 수가 부족해 학급 과밀 문제가 심각했으며 연방 정부의 투자로 인프라 개선이 이뤄진 뒤에도 인구 증가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과 캅카스, 몰도바 일대, 일부 대도시와 위성 도시 학교들에서는 학급 과밀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래서 해당 지역에서는 초등학교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분리해서 운영하고, 심하면 저녁반까지 운영했다. 다만, 학급 과밀이 심각한 학교에서도 학급당 학생수는 40명 정도여서 한반에서 50명 넘게 수업 받은 것은 기본이고, 오전반/오후반 수업까지 따로 편성하면 한반에 최대 120명까지 편성했던 당대의 한국보다는 쾌적한 편(?)으로, 2000년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학교수를 급격하게 늘려 혁명전인 1914년에는 고등학교가 91개에 불과했지만 20년 뒤인 1934년 약 600개로 6배 넘게 증가하였다.[* 로력자의 고향, 원동국립출판부, 10p] 수업은 통상 9시부터 시작해 45분 수업을 하고 5 ~ 15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초등학교는 1일 4교시, 중등 교육 기관은 통상 5 ~ 6교시로 운영했으며 초등학생들은 1시, 중 · 고등학생들은 2 ~ 3시에 하교했다. 동 시대에 주 6일제 수업은 기본이고, 심심하면 [[야간자율학습]]으로 밤 늦게까지 교육을 받았던 한국의 학생들보다는 훨씬 널널하게 교육받았던 셈이다. 1960년대에 주 5일제를 시행하지만, 지역과 학교의 재량에 따라 운영 여부를 맡겼기 때문에 일부 학교는 주 5일제를, 일부는 주 6일제를 운영했다. 1988년부터 모스크바를 위시한 여러 지역에서 주 5일제를 전면 도입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 6일제를 유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연방 해체 이후에도 이어져서 CIS 국가들의 주 5일제 전면 도입 시기는 서로 상이한 편이다. 주 6일제를 시행한 학교의 경우, 과밀 학급 문제를 겪는 학교들이 많았다. 주 5일제를 채택해 하루 수업 시간을 길게 잡으면 수업 시수 분배와 학급 조정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주 6일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이 필연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주 6일제 학교에서는 주 5일제 학교보다 일일 수업 시수를 적게 편성해 학생들의 불만과 박탈감을 완화했다. [* 이 당시까지는 선진국이라 해도 주 6일제 수업을 받는 나라들이 꽤 있던 시대였다. 일본과 스위스도 주 6일제를 시행하던 대표적인 나라였다.] 여름 방학 때는 주로 [[피오네르]]에서 운영하는 여름 캠프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는 서방 세계의 아동들이 여름 방학철에 [[스카우트]]에서 운영하는 여름 캠프에 가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물론 피오네르 캠프에 참여하는 일은 의무가 아니어서 가족들과 함께 다차에서 휴가를 보내는 학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에는 일부 정신나간 의사와 교육 '전문가'들이 성별 분리가 아동의 성장에 이롭다는 헛소리를 지껄인 게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일부 학교를 단성 학교로 전환하거나 혼성 학급을 단성 학급으로 조정하는 조치가 이뤄졌다. 이 조치는 스탈린이 죽기 전까지 유지되다, 해빙기 이후에 중단했다. 학교 급식은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있었지만, 보편화되진 않아서 귀족 학교가 아닌 농민이나 소시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에서는 주로 죽이나 스튜 같은 간단한 식단을 제공하는 등 천차만별이었으며 급식을 제공하지 않는 학교도 많았다. 연방 정부는 아동의 영양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급식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식단의 표준화도 단행했다. 다만, 개선이 이뤄졌음에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까샤 · 수프 · 보르시 같은 일상식이나 간편식을 제공했다. 이런 상황은 크렘린에서도 인식하는 바여서 토마토 주스 · 배 주스 · 자두 주스 · 분유 같은 음료와 게마토겐 · 소시지 같은 단백질과 철분을 급양해 아동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해 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영양 뿐만 아니라 품질에도 신경쓰기 시작함에 따라 신선한 채소와 육류 · 어패류의 급여량이 늘어났다. 다만, 식단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다양성을 높여도 여전히 맛보다는 영양 섭취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많았던 데다가 생선 요리는 비린내 때문에 학생들의 선호도가 낮았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경제 문제로 인해 급식을 하청 주거나 빈곤층 학생들이 급식을 먹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등 제도 자체가 엉망이 되었고, 아동들이 급식보다 간식을 선호해서 비만율이 높아지는 문제도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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