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소련/경제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처녀지 개간 사업 ==== 1954년, 흐루쇼프는 사료 작물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농업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려 치적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개간 사업을 추진했다. 농업 경영 개선 · 농기계 보급 · 농업 관련 인프라 및 교통망 확대 · 인센티브 증대 · 비료 공장의 증설 같은 정상적인 조치들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기에 성급한 흐루쇼프는 농경지를 늘린다는 신속하고 가시적으로 성과가 드러나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수뇌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굴라그의 죄수들과 콤소몰의 청년들을 동원해 여러 미개간지에 소브호즈를 설립했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사업은 흐루쇼프의 즉흥성만이 작용한 일은 아니었다. 연방 정부는 이미 1930년대에 대규모 개간 사업을 입안하고 1940년에 그 계획을 채택했다. 다만, 이를 시행하진 않았고 대조국 전쟁의 발발과 전후 재건으로 인해 재검토를 할 여유가 없었다.] 1954년부터 1956년 중반까지 연방 정부는 볼가강 동부와 카자흐 북부 · 카프카즈 이북 · 시베리아 서부 · 알타이 등 저개발지에서 4,200만 헥타르의 토지를 개간해 총 271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다. 이 광대한 농경지는 당대 캐나다의 총경작지(약 3,600만 헥타르)를 뛰어 넘는 규모였으며 여기서 수확한 곡물은 연방 전체 곡물 생산량의 약 31.7%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1960년, 연방의 전체 곡물 생산량은 1억 2,559만 톤, 신규 개간지의 곡물 생산량은 5,870만 톤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1954 · 1956년의 기후가 작물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5년에 가뭄으로 흉작(2,770만 톤)이 터졌어도 1954년(3,720만 톤), 1956년(6,330만 톤)의 풍작으로 실패를 무마할 수 있었다. 최소한 1958년까지 연방 농업의 생산량 증가는 괄목할만한 수준이었고 흐루쇼프의 권위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1957년, 재앙의 씨앗이 뿌리내렸다. 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흐루쇼프는 미국의 드넓은 농경지에서 자라는 옥수수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작물은 자신의 성격처럼 급하게 자라났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엄청났으며 식량과 사료로 쓰기에도 적합했다. 흐루쇼프는 소련의 자연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대규모 옥수수 경작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국가 전역을 돌며 자신이 지시한 일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폈다. 1962년, 옥수수 재배 운동이 최고 절정에 이르렀던 해에 연방의 농민들은 3,700만 헥타르가 넘는 농경지에 옥수수를 심었지만, 700만 헥타르에서만 옥수수가 자라날 수 있었다. 수천만 헥타르에 심은 옥수수들이 비와 추위로 죽어버렸지만, 상황 파악을 못한 크렘린에서는 전통적인 작물의 재배를 줄이고 '들판의 여왕' 옥수수의 재배를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옥수수의 단가는 기존에 재배하던 사료 작물보다 생산 단가가 더 높았다. 무리한 재배는 휴경지와 목초지, 척박한 경작지의 지력을 고갈시켰고, 카자흐와 중앙아시아의 초지를 개간한 것은 중앙아시아 사막과 황무지에서 만들어지는 모래 - 먼지 폭풍이 러시아의 동토를 덮치게 만들었다. 결국 대망의 1963년, 연방의 곡물 생산량이 전년 대비 75% 수준으로 급감했다. 카프카즈 이북, 우크라이나 남부 같의 전통적인 곡창 지대들이 가뭄으로 흉작을 거두었고 여러 지역에서 식량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식료품점에서 긴 줄이 생기고 1인당 빵 구매량이 제한되는 등 포스트 스탈린 시대부터 사라졌던 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크렘린은 30년 전의 대참사를 떠올렸고, 소련은 사상 최초로 금 보유고를 방출해 1,300만 톤이 넘는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러시아는 천년이 넘도록 곡물을 수출했으며 당대에도 농산물 생산량 분야에서 전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홀로도모르도 연방 전체를 덮친 가뭄과 스탈린 정권의 무리한 곡물 징발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지, 농산물 생산량 만큼은 연방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기 충분했었다. 이 시기의 소련은 언젠가 미국을 따라잡을 거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식량 문제는 과거의 악몽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치라는 인류의 적을 지옥으로 보내고 전세계의 반을 장악한 세계 초강대국이,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우주로 인간을 보내 미국의 자존심을 짓밟은 나라가 세계 각국에 식량을 구걸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일을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수치이자, 참사로 받아 들였다. 처녀지 개간 사업은 이미 초기부터 문제가 극심했다. 부실 경영 · 작업 부주의 문제는 기본에 창고가 부족하고 행정 기관에서 보관이 가능한 창고를 확보해서 이송하려 해도 차량과 기차, 철도망이 부족했다. 심지어는 수확한 곡물을 보존하기 위해 간단한 엄폐물도 설치하지 않아서 수확한 곡물을 노상에 방치했다. 결국 수백 ~ 수천 톤이 넘는 엄청난 곡물들이 비에 젖어 썩거나 바람에 날려갔으며 쥐와 새들이 배 터지게 잔치를 벌였다. 새로 개간한 농경지들은 대부분 가뭄 피해를 입기 쉽고 작물의 생장기가 짧은데다 적설량도 부족해 서리 때문에 작물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렇다보니 가을 파종을 하기가 힘들어서 봄에 빠르게 파종해 곡물을 생장시켜야 했다. 이 처녀지들은 곡물 재배가 주목적이어서 대부분의 경지에 봄밀을 파종했고, 상부의 할당량 확보 및 생산량 증대 압박을 받던 관리자들은 농경에 부적합한 땅과 휴한지까지 죄다 파종했다. 단일 작물의 대규모 재배와 휴경지의 감소는 결국 토양 침식의 위험을 크게 증가시켰다. 개간 사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삶도 처참했다. 언론은 몇 년이 넘도록 신규 개간지의 주택 및 인프라 부족 문제를 보도했다. 게다가 신규 개간지들은 대규모 인력과 농기계들을 필요로 했고, 현지에서는 둘 다 조달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매년 수확철마다 유럽 러시아 지역의 인력과 농기계들이 동방으로 향해야 했고, 이를 이송하기 위해 새로운 철도 노선도 건설해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엄청난 지출을 요구했고, 흐루쇼프 정권 기간 동안 신규 개간지의 곡물 생산 단가는 주요 곡물 생산지 보다 평균 20% 이상 높았다. 안 그래도 농업 투자가 적다는 지적을 받는 상황에 기존의 곡창 지대에서 엄청난 재원과 대규모 인력, 농기계들을 빼내서 신규 개간지에 투입한 것은 유럽 러시아 지역의 농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사업은 유럽 러시아라는 튼튼한 아랫돌을 빼서 처녀지라는 불안한 윗돌을 괴는 일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