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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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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기술 도입과 복제 ==== 먼저, 소련은 자국의 과학과 산업의 체질 개선을 위해 대부분의 분야에서 최신 기술과 설비를 도입하려 했다. 이념이 중요하던 시대에 자본주의 국가들을 적대하던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려 한 게 의아할 수 있으나, 러시아가 서방에서 과학 기술을 도입하는 일은 짧게는 표트르 대제, 길게는 블라디미르 1세부터 이어지는 유서깊은 일이었고 레닌과 스탈린도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실리를 중시하는 소련의 수뇌부들은 이념보다는 경제를 우선했던 것이다. 현대의 미국과 중국도 해외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고 서로와 교류하고 있는 판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념에 매몰되거나 국가 안보를 핑계로 서방과의 교류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크렘린에 항상 존재했다.] 먼저, 소련은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꾸준하게 서방과 교류하여 기술을 구매하거나 지원받았고, 필요하다면 훔치고 빼앗았다. 경공업 부문의 경우에는 미코얀을 위시한 사절단들의 해외 순방과 랜드리스,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 시기에 이뤄진 기술 교류가 두드러진 편이었다. 기술 강탈의 경우, 2차 세계 대전의 사례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소련은 베를린과 독일 동부 지역에서 포격과 폭격을 피한 공장들을 들어 올려 자국에 재설치했다.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적응을 한 뒤부터는 우수한 독일제 기술과 설비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고 기계를 연구하고 역설계해 기술 발전에 써먹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미국과의 교류가 가장 많았고, 냉전기에는 독일 · 일본과의 기술 교류가 제일 많았지만, 거대한 소련 시장에 진출하기를 원하던 선진국들은 냉전이라는 이념보다는 경제 논리를 더 중시하여 미국 몰래, 또는 대놓고 소련과 교류했다. 심지어는 소련의 맞수인 그 미국조차 데탕트처럼 갈등이 냉각되던 시기에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소련에 기술과 설비를 제공했다. 그래서 소련은 여러 나라의 기술을 서로 비교하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기술을 선택할 수 있었으며 코시긴 같은 거물이 해외에 '행차'라도 할시라면, 대기업의 CEO들이 몰려와 경쟁적으로 자사의 기술과 설비를 홍보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술 도입 부문도 꽤나 방대하여 소련은 일본에서 제조하는 장난감에 관심을 보여 일본의 기업들과 기술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서방 국가나 대기업들과 계약을 체결해 기술자와 공학자들을 해외에 유학보내거나, 아예 서방의 전문가들을 초빙해 현지에서 직접 소련 공업 노동자와 기술자, 경영진, 공학자들을 가르치게 하고 생산 공정과 경영 분야에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게 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파견 온 서방 대기업의 경영진과 전문가들은 소련과의 거래를 이어나가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사의 제품을 홍보하고 소련 정부의 관심을 받으려 했다. 식품 가공업 부문에서는 육류 가공, 유제품 생산, 제과 · 제빵 · 제당 기술, 초콜릿, 병맥주와 사과술, 샴페인과 와인, 브랜디 등 식품 전반에 걸쳐 생산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설비와 생산 · 공정 기술을 수입했다. 예를 들어 제당 산업의 경우에는 연속 추출 공정과 각종 설탕 정제 기술, 설비를 도입해 설탕의 품질과 생산성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수입한 장비를 분석해 복제 생산하거나 단점을 개선하고 소련의 실정에 맞게 개조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제당 산업 분야에서 기술 자립도를 장기적으로 높여 나갈 수 있었다. 소련의 식품 포장 기술은 그리 좋지 못해서 식품 보존 시간이 짧고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제품의 손 · 망실 문제와 식중독 문제, 소비자 불신 문제를 우려하며 식품 포장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이러한 여론을 수용한 연방 정부는 서방 세계의 포장 기술을 도입해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유통 과정을 개선하려 했다. 그래서 선진국들로부터 자동 액체 포장기와 통조림 밀봉기를 도입해 병음료와 통조림의 포장을 현대화하고 효율성을 높였으며, 가스 충전 · 플라스틱 · 진공 포장 기술들을 도입해 식품 보존 기간을 늘리고 가공 식품의 생산 비용을 절감했다. 이러한 서방 기술의 도입과 체화는 소련제 식품의 신선도와 안전성을 높이고 가공 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을 낮추었다. 이에 고무된 연방 정부는 포장 기술의 개선으로 식품의 장거리 운송과 보관 기관이 개선된 점을 노려 전국적인 식품 공급망 체계를 개선하려 했다. 연방 정부와 인민들이 원하는 수준까지 공급 체계가 잘 갖춰지진 않았지만, 최소한 통조림과 냉동 식품 만큼은 전국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소련은 초기부터 합성 섬유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소련에 풍족한 석유 자원을 활용해 천연 섬유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섬유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일론 · 폴리에스테르 · 비스코스 같은 합성 섬유 생산 기술과 최신 방적 · 직조 · 염색 · 재봉 · 재단기를 일본과 서유럽, 미국에서 도입하고 자체 개량도 추진했다. 크렘린의 거물들과 고위 관료, 패션업계 종사자와 전문가들이 해외 순방 중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패션 하우스를 방문해서 새로운 디자인과 패턴,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으며 디자인과 패턴 제작용 소프트웨어를 도입하기도 했다. 1930 ~ 50년대 동안 이뤄진 합성 섬유의 도입과 지속적으로 이뤄진 개량은 기능성 의류의 생산을 가능케하고 소비자들의 선택지를 늘려주었다. 또한 소련제 의류와 섬유 제품의 품질과 생산성을 개선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했으며 일부 소련제 섬유와 의류는 선진국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품질이 좋아서 수출까지 했다. 일부 소련제 섬유 제품들은 미국제보다 품질이 우수했으며 소련이 붕괴하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그 수준을 유지했다. 소련이 항상 서방에서 기술을 수입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서방 국가나 기업들이 관심을 갖는 소련제 경공업 기술도 많아서 기술로 기술을 사고 파는 일도 벌어졌다.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 시기에는 경화나 금괴, 원자재 대신에 서방제 기술과 설비로 만든 제품을 대가로 지불하는 일종의 물물교환 내지 바터 무역을 하기도 했다. 소련 공업은 항상 품질 · 생산 공정 관리 문제를 지적받는데, 실제로는 서방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맞춰 공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 기술 도입의 대가로 소련이 풍족한 원자재나 경화만 지불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항상 그렇지는 않았던 것. 특히 석유/가스를 필두로 한 중공업 분야는 80년대까지도 서방에 비해 기술적 경쟁력이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한계점도 있었다. 5개년 계획 시기에 기껏 비싼 돈 주고 수입해 온 수입산 장비들이 조작과 운용 미숙으로 고장나거나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창고에서 방치되는 일이 빈발했다. 이 문제는 스탈린이 대놓고 연설에서 비판할 정도의 문제였지만, 연방 정부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이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대조국 전쟁 이후에 독일과 동유럽, 만주에서 약탈해 온 장비들도 똑같은 문제를 겪어서 수입산 장비의 가동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일부 장비들은 아예 망실되었다. 59년에도 여전히 수입산 장비의 상당수가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는 보고가 크렘린에 올라올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소련 계획 경제의 모순과 연방 정부의 잘못된 정책 집행, 현장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조치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56년에 수입한 오스트리아산 최신 제지 기계는 공장에서 운용하던 기존 설비와 호환되지 않고 생산 공정을 뜯어 고쳐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공장에서 기계를 수령하고도 계속 방치해버렸고, 결국 5년 넘게 창고에서 녹슬다가 폐기당했다. 58년에 관계 정상화를 이룬 서독에서 시멘트 제조 장비를 들여와 도입했는데, 장비의 기능과 생산 방식이 현장의 실제 생산 계획과 잘 부합하지 않아서 사용을 못하고 폐기한 사례도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섬유 생산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공장에 최신 섬유 생산 설비를 도입했는데, 현지 공장의 설비가 너무 구식이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지급한 설비를 사용하려면, 공장 전체 설비를 다 교체하고 최신 기술을 이해하는 고급 인력을 모셔와야 하는 판국이어서 현장에서는 제대로 사용을 못하고 구조 조정을 이룰 때까지 창고에 설비를 쳐박아 두었다. 신규 기술이나 설비를 도입하면, 필연적으로 적응 기간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은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시받은 생산 목표를 지키지 않으면 문책을 받고 인센티브도 사라지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새로 받은 기계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크렘린의 배려가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수입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지만, 숙련공과 기술자, 공학자들이 부족해 운용에 난항을 겪었다. 게다가, 설명서가 부실하고 장비 설치를 담당하는 부서의 능력이 미숙해서 장비를 설치하고 생산량을 늘리고 싶어도 경영진들이 장비를 어떻게 설치하고 사용해야 할지를 몰라서 난색을 겪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은 일부이며 일반화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대놓고 지적한 스탈린부터 기술자와 공학자의 육성 · 숙련공 우대 · 해외 기술 흡수 및 체화 · 해외 전문 인력의 초빙 및 객관적인 평가와 조언 수용 등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했고, 이러한 정책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까지 유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1차 5개년 계획부터 12차 5개년 계획까지 지속적으로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 소련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도 없다. 서방과 계약을 체결해 공산품을 수출한 사례의 경우, 소련의 ГОСТ 규격보다 서방의 구매자들이 요구하는 기준이 더 높았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서방 수출용 제품을 생산하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수출용 제품을 만든다고 해서 추가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출용 제품 생산을 명령받은 공장들은 내수용 상품 생산에 주력하고 수출용 제품은 되도록 생산을 지연시키거나, 생산에 문제가 있음을 보고하여 수출용 제품 생산을 중단하려 했다. [* 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더 필요한데, 이에 대한 보상은 없으니 공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사보타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방의 구매자들이 배송 지연에 항의하거나 제품의 품질에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발생해 크렘린에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연방 정부 입장에서는 서방 기업과 국가들로부터 신용을 쌓아 서방 시장에 진출하고 수출 확대와 활로 개척을 도모할 생각이었는데, 기본적인 생산 계약도 못 지키면 만사가 끝장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8 ~ 60년 동안 수출용 제품 생산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각종 규정을 도입하고 지시를 지키지 못하는 경영진들에게는 책임을 묻겠다는 조치를 취하지만, 큰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서방 기업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정부의 조치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현장의 상황과 서방의 불만을 인식하고 있던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 시기의 소련 정부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문제를 개선하는데 성공하지만, 서방제 기술과 설비로 생산하고 높은 기준을 적용했음에도 소련제 수출용 제품은 여전히 서방에서 생산한 제품보다 고장률과 불량률이 더 높았다. 제3세계에 수출한 소련제 제품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소련제 공산품의 품질 문제는 소련의 대외 신뢰도에 악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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