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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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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적 요인 ==== 외적인 문제 외에도 소련 농업은 내적인 문제를 겪었다. 1번째, 농경 관리과 농장 경영에 문제가 많았다.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소련 농민의 노동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이들은 새벽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오전 3 ~ 4시에 일어나 한밤이 되는 9 ~ 10시까지 일했다. 그렇다보니 농민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노동 생산성은 매우 낮았다. 포스트 스탈린 시대부터 이런 비인간적인 처우를 중단하고 농민들의 부담도 완화해 주지만, 소련 농민들의 노동 시간은 여전히 타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작업량에 맞춰 보수를 지불하다보니 농민들은 '작업량'의 증대에는 관심이 있어도 작업의 '질'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정 인력을 선발해 농장의 전체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기는 일이 없어서 토지나 가축에 대한 농민들의 애착이 줄어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게다가 농장 경영진과 관리자의 교체도 너무 빈번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1981 ~ 1985년간 콜호즈 의장의 2/3이 교체되었다. 의장이 전문가로서 역할을 하려면 최소 3년이 필요한데, 교체가 잦으니 경영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저해받았다. 집단 농장의 경영진과 관리직들은 관료화되어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면서 농장의 기본 업무와는 관계 없는 일을 하는 조직 관리자로 전락했다. 작업반장의 경우, 작업반에 할당된 예산의 관리와 처분을 작업반장이 전담하다보니 업무가 과중해져 행정 효율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예산 유용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발생했다. 그래서 예산 집행 문제를 놓고 작업반에 소속된 농민들의 불만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2번째, 상부의 불필요한 간섭이 많았다. 스탈린 시대에도 농장을 대규모 작업대로 구성했다가, 소규모 작업반이 좋다고 해서 작업대를 작업반으로 쪼갠다던가 하는 등 성과가 기대한 만큼 안 나오는 상황에 인내심을 잃은 크렘린이 오락가락하는 지시를 내리는 일들이 발생해 농민과 농장 경영진들에게 혼란을 일으켰고, 농경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세세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심각한 비효율을 야기했다. 포스트 스탈린 시대부터 연방 정부는 여러 산업 부문에 독립 채산제를 강화하고 현장의 자율성 확대를 강조했지만, 실질적으로 자율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상부 기관은 농업 경영에 대해 상세한 재배 · 판매 계획을 지시했고 농장의 경영권은 축소와 확대를 반복했다. 또한, 농장의 상황을 무시하고 수익률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을 조합해 재배할 것을 지시하고 농장 경영과 가축 품종 및 사육량을 결정하는 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후와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농업은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고, 같은 작물이어도 지역에 따라 생육이 달라지기 때문에 적시에 파종이나 작업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 농경을 맡은 이들의 경험과 의견이 중요한데,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중앙에서 농경 작업에 간섭하는데다 현장의 의견이 관리자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기계와 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입장인데, 현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자신이 져야 했기 때문에 좋은 의견이 들어와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3번째, 행정 및 관리 인력이 지나치게 많았다. 연방 전체 국영 농장의 관리 · 사무직원은 평균적으로 110명이었다. 50년대 중반 기준, 러시아 5개 주 132개 집단 농장을 표본으로 조사한 사례에 따르면, 농장 전체 노동자 중에서 관리직이 15% 이하인 곳이 약 15%, 15 ~ 20%를 차지하는 곳이 약 40%, 20 ~ 30%가 약 33%, 약 12%의 농장은 관리직이 33%가 넘었다. 카자흐스탄의 소브호즈들을 예시로 들자면, 이곳 농장들은 행정 및 관리 기구가 과다하게 비대했다. 이들은 매달 농장의 회계와 임금 관리와 관련한 것만으로 1800개 지표가 포함된 15000개의 공문과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원래 관리자들은 농민들의 작업반처럼 여러 부서로 구성되어 있어서 각자 맡은 바 책임을 준수해야 하지만, 생산량 증대와 지시 이행을 독촉하는 상부의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이어서 정말로 농장을 관리하기 보다는 농부들의 복장과 규율 위반을 단속하거나 할당량 달성을 독촉하기 바빴고, 기술 개발이나 경영 혁신을 이루는 일은 할 수 있는 시간도, 요인도 없었다. 업무가 많지만, 당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농장의 임원진들은 농민들보다 더 좋은 처우를 받았다. 연간 100일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는 쉬는 경우도 있었고, 추수기에는 한달에 12 ~ 18일만 근무해도 1달 만근을 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농장의 '지배 계급'에 대한 정부의 편애는 농민과 경영진 간의 불화와 불신을 일으켰다. 4번째, 토양 침식 문제가 오래도록 악영향을 미쳤다. 물론, 토양 침식은 자연이 일으키는 일이지만, 이는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러나, 소련은 토양 침식을 막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곡물 확보를 위해 농지에 휴식을 주지 않고 계속 연작을 하는 모순된 행보를 밟았고, 결국 토양 침식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대형 농기계를 주로 써서 깊이 갈이를 하다보니 토양 조건이 더욱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 오렌부르크 주의 처녀지 개척 지역에서는 개발 시기부터 약 20년 동안 부식토의 15 ~ 25%가 유실되었다. 러시아 비흑토지대의 일부 주에서는 1 헥타르당 부식토의 전체 축적량이 30 ~ 60톤에 불과한데, 연간 1톤의 부식토가 소실되었다. 중앙 러시아 흑토 지대는 30 ~ 40년간 부식토의 30%를 소실해 부식토 축적량이 10 ~ 15cm 감소했다. 비옥도의 저하는 중앙 흑토 지대의 곡물 생산량을 감소시킨 원인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의 곡물 생산량은 1971 ~ 1975년에 1 헥타르당 1.81톤이었던 것이, 76 ~ 80년에 1.75톤, 1981 ~ 1985년에 1.53톤으로 감소했다. 5번째, 비료가 부족했다. 스탈린 정권부터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화학 비료 공업에 투자해 공급량을 늘려주긴 했지만, 수요에 비해 비료와 농약이 부족했고 생산 자재 간의 조합도 부적절했다. 1980년대 전반까지 소련 농업부가 생산재를 분배할 때, 효율성보다는 균등 분배를 우선시하다보니 자재 간의 조합이 부적절하고 효율도 낮았다. 예컨대 화학 비료와 농약은 적절한 양을 쓰지 않으면 효과가 낮은데, 각 지역을 어떻게든 챙겨주려 하다보니 각 지역이 균등하게 비료와 농약이 부족한 사태가 발생했다. 페레스트로이카 기준, 매년 15 ~ 17억 톤의 유기질 비료를 투입해 부식토의 부족을 보충해야 하는데, 10억 톤만 공급해줬다. 비흑토 지대를 중심으로 총 경지 면적의 24%에 달하는 5,230만 헥타르의 산성 토양지에 석회 비료를 충분히 공급해 주지를 못해 매년 산성도가 상승하여 수확에 악영향을 미쳤다. 토양의 산성화와 화학 비료의 낮은 시용 효율로 인해 매년마다 생산 기대치에 미달되는 수확량이 1,700만 ~ 1,800만 톤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석회 비료의 시용은 4 ~ 5년에 1회이지만, 대부분의 주에서 공급 부족으로 10년에 한번씩 투입하고, 일부 주에서는 15 ~ 20년마다 1번씩 쓸 수 있었다. 매년 1100만 헥타르에 석회 비료를 공급해줘야 하는데 실제로는 700 ~ 800만 헥타르에만 공급했다. 연간 석회 시용량은 비흑토지대에만 1억 톤, 국가 전체로는 1억 5,000만 ~ 6,000만이 필요한데, 페레스트로이카 기준으로도 4,500만 톤만 공급할 수 있었다. 6번째, 윤작을 잘 지키지 않고 방제 작업이 부족했다. 러시아의 주요 경작지는 수분이 부족해지기 쉬운 조건이어서 충분한 규모의 휴경지를 조성하고 윤작을 지켜야 하는데, 크렘린에서 곡물 확보를 위해 휴경지까지 경작하다보니 1950년에는 경지의 20%인 3,200만 헥타르가 휴경지였는데, 1975년에는 1,120만 헥타르로 감소했다. 그나마 85년부터 순 휴한지가 2,130만 헥타르로 증가하지만, 지력과 토양 수분의 회복이 늦어지고 장기적으로 수확량이 줄어드는 일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게다가 휴한지의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기도 했다. 적절한 시기에 정지 작업을 해주지 않아서 토양에 수분 축적이 계획한 만큼 이뤄지지 않고 잡초가 쌓였다. 연방의 곡물 재배지에서 잡초가 발생하는 비율은 65%이며, 씨앗을 뿌리고 재배하는 경종 농업 부문은 잡초 때문에 매년 토양에서 1,000만 ~ 1,100만 톤의 영양분을 빼앗겼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감산 손해가 평균 75억 루블이었고, 살포한 비료의 상당량이 잡초의 성장 동력으로 유실되었다. 7번째, 비바람과 폭풍이 일으키는 토양 침식과 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연방 정부는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삼림 지대를 조성했지만, 처녀지 개간 사업 때, 카자흐의 초지를 개간하는 바람에 중앙아시아 사막의 폭풍이 중앙 러시아 지역을 덮쳐 모래와 먼지가 작물을 뒤덮는 일이 발생했다. 처녀지 개간 사업이 일으킨 재앙을 보고 반성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나름대로 삼림 조성 사업에 투자했지만, 80년대부터 예산이 감소하고 사업 규모도 축소되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전반 기준으로 보호 삼림의 식림 면적은 1970년대 후반에 비해 절반 이하인 수준이었다. 8번째, 토양 경화로 인해 토양 조건이 악회되었다. 대형 농기계로 깊이 갈이를 하다보니 아주 깊은 위치에 있는 토양까지 단단하게 굳어 버려서 토양의 수분이 부족해지고 표토의 양을 늘려 토양 침식 문제를 악화시켰다. 토양이 과도하게 경화되는 현상은 수확량을 30 ~ 50% 낮출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9번째, 사료의 효율이 낮고, 양적으로도 부족했다. 소련은 대체로 단백질 사료와 식물성 기름이 부족했다. 이는 대두를 대량 생산하기가 어려운 환경인데다 해바라기와 면실유, 유채류의 생산이 정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소 결렬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중국산 대두 수입에 어려움이 생겨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극동 지역에서 대두 생산을 확대했으나,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80년 기준, 가축에게 공급하는 단백질 사료는 필요량에 비해 15% 부족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단백질 사료는 필요량에 비해 10% 부족했고 젖소의 경우, 1두당 2.82톤의 사료를 공급했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필요로 하는 3.5톤보다 20% 이상 부족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질적으로 사료와 가축 품종의 개량이 미진해 사료 효율이 낮았다. 소련산 사료는 단백질 뿐만 아니라 비타민 · 인 · 미네랄 · 염분 등이 부족해서 영양 균형이 안 맞고 품질이 나빴다. 소련에서 생산한 면실유는 리진이나 일부 중요 요소의 함유량이 낮아서 식용유로 쓰기 부적합한 폐유의 발생율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았으며 면실유를 생산하고 남은 뒤에 가축 사료로 쓰는 부산물은 독소가 있어서 닭과 오리에게 급여하면, 황란에 반점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많은 농가에서 사료 대신에 빵을 사서 가축에게 급여했다. 이는 불법이고 중범죄로 다룰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소련산 배합 사료는 수량 · 가격 · 품질 면에서 빵보다 못한 처지여서 단속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양적 · 질적으로 사료가 부족하고 가축의 품종 개량이 미진하니, 미국과 비교하면 가축 비육 기간은 2배나 걸리고, 단위당 축산물 생산 필요 사료량은 1.5 ~ 2배 더 소모했다. 노동 생산성도 낮아서, 우유 생산 부문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9배 낮은 효율을 자랑했다. 10번째, 운송 · 교통 · 보관 인프라가 좋지 못했다. 먼저 항만 설비의 경우, 비축미와 사료 작물 확보를 위해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던 소련은 원활한 하역을 위해 항만 시설의 증설과 개선에 투자했음에도 수송 능력이 떨어졌다. 곡물을 하역하고 선적하는데만 6 ~ 8주가 걸렸고 81년에 1,330만 톤의 아르헨티나산 곡물을 수입할 때도 항만 설비가 부족해 2만 5천톤 짜리 소형 화물선들을 보내 조금씩 조금씩 곡물을 수송하는 지경이었다. 다행히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부터 5,500만 톤의 곡물을 비교적 원활하게 운송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의 곡물 보관 능력은 상당히 부실했다.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지적받은 문제였지만, 연방 정부는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처녀지 개간 사업 때는 생산한 농축산물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 노상에 부어놓고 천쪼가리로 덮어 버렸다. 그래서 바람에 수천 톤이 넘는 곡물이 날라가고 쥐와 새가 낟알로 축제를 벌였다. 84년에는 17억 달러를 들여 1,000만 톤의 유박을 수입해놓고도 유박 가공과 보관에 필요한 설비와 기술력이 부족해서 기껏 큰 돈을 들여 수입한 유박이 대량으로 부패했다. 가공 시설 · 보관 설비 · 컨테이너는 물론 운송 수단도 부족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기준, 곡물은 필요량의 70%, 채소와 감자는 32%, 과일은 47%만 보관할 수 있었으며 유통 기구도 열악했다. 모스크바의 도매 기지에서는 매년 70만 톤이 넘는 감자가 들어오는데, 그 중 반 이상이 폐기되었다. 이러한 농축산물 보관 문제가 계속 발생한 것은 매년마다 기후와 환경의 변화 때문에 농축산물 생산이 널뛰기를 하는데다 집단 농장의 통 · 폐합, 인구 증감, 신도시와 교통망의 건설 등 다양한 요소들 때문에 기존에 건설한 보관 시설들이 쓸모 없어져 버리거나 기껏 지은 시설이 과잉 투자가 되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초 기준, 열악한 도로 조건으로 인한 연간 농축산물 손실이 50 ~ 70억 루블로 농업 총생산의 4 ~ 5%에 달했다. 농장내 도로는 러시아 공화국에서만 120만 km 이상이 필요한데, 480,000km에 불과하고 그 중에 간이 포장까지 포함한 포장 도로는 60,000km 밖에 안 되었다. 이 때문에 해빙기가 되면, 라스푸티차 때문에 진창이 되어 교통이 사실상 두절되는 지역이 많았다. 트럭도 그 숫자가 적고 유지 · 관리가 부족해 고장이 많이 나다보니 매년, 트럭이 최소 40일 동안 가동하지 않는 농장들도 있었다. 27차 당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수확 · 운송 · 저장 · 가공 단계에서 발생하는 농축산물 손실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생산 비용의 20%를 회수할 수 있고, 일부 생산물은 30% 이상 회수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런 손실을 제거하는 비용은 같은 양의 생산물을 추가 생산하는 것보다 50 ~ 70% 적은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부터 가공, 보관 설비 및 기술의 상당한 개선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11번째, 만성적으로 농기계와 농기계품의 부품이 양적 · 질적으로 부족했다. 소련의 계획 경제 체제에서 발생하는 비효율 문제로 인해 각 농장은 필요한 자재와 부품, 기계를 적시해 공급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접촉해 계약을 하지 못하고 이들을 이어주는 중개자인 연방 정부가 조정을 잘해주질 못하니 생산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계가 농장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크렘린에서 할당한 생산 목표를 채우는데만 몰두했다. 품질 관리도 제품이 공장에 있을 때만 신경 썼고, 공장을 떠난 제품은 신경쓰지 않았다. 소비자들이 제품의 품질과 가격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생산자에게 피드백을 전달하기가 어려우니 각 농장은 고장이 잘 나고 품질이 낮은 자재를 쓰는 일이 많았다. 소련은 세계 최대의 농기계 생산 국가 중 하나였지만, 고장률도 세계 최고였다. 또한 소련의 경제 체제에서 각 공장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고 이윤을 내려면, 단가가 높은 기계와 완성품을 생산하는 게 유리했다. 그래서 농기계 공장들은 가성비가 좋은 트랙터의 생산을 선호하고 다른 농기계와 부품의 생산은 되도록 피하려 했다. 이 때문에 트랙터 생산은 많은데, 기타 농기계와 수리에 필요한 부품의 생산은 부족한 일이 발생하곤 했다. 소련 정부와 소련에 우호적인 이들은 '나무 쟁기를 쓰던 원시 농업을 트랙터를 쓰는 현대 농업'으로 발전시켰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다. 하지만, 이 선전의 일부는 허상이었다. 85년 기준, 연방 전체 농업 노동자 중에서 수작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콜호즈의 경우, 파종 - 경작 부문에서 73.3%), 축산은 68.5%), 소브호즈에서는 파종 - 경작 부문이 69.8%, 축산은 72.4%였다. 기계화가 이뤄지긴 했지만, 여전히 파종 · 경작 · 방제 · 선별 · 포장 등 다양한 농경 작업에서 수작업의 비중이 높았다. 12번째, 농경에 필요한 비용이 계속 상승했다. 1981 ~ 1985년간 총생산 1루블당 물재비(物財費)는 콜호즈에서 5.2%, 소브호즈는 8.6%, 사료단위 1kg당 배합 사료 가격은 5.5%, 소 1두당 축사 건축비는 17.8% 증가했다. 66 ~ 80년 동안, 토지를 제외한 고정 자본 100 루블당 농업 총생산은 70루블이었으나, 1981 ~ 1985년에 33루블, 같은 기간 동안 100 루블을 투자했을 때, 농업 총생산은 76루블(1966 ~ 1980년)에서 43루블(1981 ~ 1885년)로 감소했다. 이는 1980년대 초의 자연 재해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지만, 자연 재해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농업에는 점점 더 많은 고정 자본이 필요해졌고 투자 효율은 낮아졌다. 이 때문에 주요 농산물의 생산 원가가 대폭 상승하고, 농업 투자를 늘렸음에도 효율이 낮았다. 이러한 비용 증가는 수확량과 생산성의 향상 속도가 느린데 반해, 임금과 공업 제품 가격이 계속 상승해서 자재비가 증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시대의 농업 집단화는 농민을 희생시킨 뒤, 이들이 생산하는 곡물을 도시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고 농업 이윤을 착취해 산업화에 쏟아 붓는 것이었다. 스탈린 사후부터 연방 정부가 그러한 기조를 상당 부분 포기하고 농업에 신경 썼지만, 여전히 농업에 필요한 농기계와 자재의 가격은 높은데 비해 농축산물 가격은 낮았기 때문에 농업은 계속 착취당하는 상황을 면치 못했다. 13번째, 연방 정부는 농업에 대한 심각한 이윤 착취와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농민들에게 각종 수당을 비롯해 보조금을 지급해 주었다. 문제는 농업이 저성장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농축산물의 조달 가격을 낮게 유지하고 농장에서 부담해야 하는 손해를 보조금으로 메꿔주다보니 재투자는 재투자대로 안 되고, 농장의 채무와 국가의 부담은 점점 늘어갔다. 그래서 흐루쇼프 정권 초기에 수억 루블 정도이던 농가 보조금이, 브레즈네프 정권 말기가 되면 수백억 루블로 늘어났다. 14번째, 노동력 과잉과 노동력 부족 문제가 병존하고 있었다. 유럽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농기계 운전수와 기술자 등 중요 인력과 청년 노동자들이 계속 도시로 유출되었다. 러시아 공화국의 비흑토 지대에서는 노동력 유출이 심해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즈음에는 버려진 집이 80만 채에 미경작지로 내팽겨쳐진 경지가 많았다. 반대로, 중앙 아시아 지역은 인구 증가율이 높고 주민의 이촌향도나 타 지역으로의 이주가 적어서 노동력 과잉 문제가 극심했다. 중앙 아시아의 농촌 인구 1인당 평균 경작지 면적은 59년에 0.59 헥타르였는데 87년까지 0.27 헥타르로 급감했다. 타지키스탄처럼 낙후된 지역에는 전기와 도로 인프라가 아예 없는 농장들도 있었고, 토지에 비해서 가축을 너무 많이 사육해서 농장과 인근 초지 · 산지의 환경이 회생 불능에 빠지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 정부도 손을 놓은 것은 아니어서 노동 집약적 농법을 도입하고 경공업 부문에 투자했으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가정 내 여성 구성원의 사회 생활과 노동을 탐탁지 않아 하던 중앙아시아의 정신나간 일부 남성들이 가정의 직장인 여성들을 학대하거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이 발생해서 여성들의 외부 활동이 위축된 탓에 여성 실업율까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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