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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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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적 요인 ==== 소련 농업의 문제점으로 농업 집단화와 계획 경제의 모순점을 많이 거론하지만, 이러한 내적 요인 외에도 외적인 요소들도 소련 농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국토와 사막 · 황무지 · 설원 · 초원 · 산지 · 분지 같은 독특한 지형 조건과 다양한 기후, 토양 등의 자연 특성이 혼재한 환경은 미국과 맞선 세계 초강대국 소련조차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첫번째 요인은 농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후였다. 소련에서 북위 48도 이남에 있는 농경지의 비율은 전체 농지의 33%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100%의 농지가 북위 48도 이남에 위치해 있었다. 낮은 평균 기온 문제와 일조량 문제 때문에 식물이 자라나는데 필요한 적산 온도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언제든 폭풍 · 모래 폭풍 · 눈 폭풍 · 서리와 같은 자연 재해를 겪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농민들은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기후 변화가 적게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했고, 연방 정부는 악조건 속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예를 들어 사탕무를 재배하려면, 1일 평균 기온이 10도 이상인 날이 연간 150 ~ 170일, 적산 온도는 2700 ~ 2800도가 되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사탕무가 부족해서 이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 지역에까지 사탕무를 재배했다. 그래서 생육 기간이 짧아지고 수확량이 떨어졌으며 수확철 후기에는 사탕무가 얼어붙는 일도 있어서 아직 자라고 있는 것까지 강제로 뽑아서 수확했다. 안 그래도 사탕무 수확량이 부족한 지경인데, 수요를 채우기 위해 양적 · 질적인 면에서 손해를 엄청 봐야 했다. 두번째 요인은 강우량이었다. 미국과 비교하자면, 미국에서 연간 강우량이 700mm 이상인 지역은 60%, 400 ~ 700mm 이상인 지역은 29%, 400mm 미만인 지역은 11%이다. 그런데 소련은 연간 강우량이 700mm 이상인 지역이 1.1%, 400 ~ 700mm 이상인 지역은 58.9%, 400mm 미만인 지역은 40%였다. 농업에 필수적인 강우량부터 타 지역에 비해 조건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관개를 하고 물을 저장해도 한계가 명확했으며 이런 자연 환경 문제는 아무리 댐과 저수지를 지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세번째 요인은 폭풍과 안개, 냉해였다.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인 수하베이(cyxoВeЙ)는 수분을 증발시키고 토양을 유실시킬 뿐 아니라 식물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자연 재해였다. 그래서 제정 러시아 시기에도 농학자들이 건풍을 막고 물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토양 침식을 막기 위해 삼림을 조성할 것을 제안해 제국 정부가 방풍림을 조성한 바 있으며 스탈린 집권기에도 대규모 방풍림을 세워 사막과 황무지의 바람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유목민 강제 정주화와 농업 집단화, 대규모 산업화 정책을 실시해서 사막의 바람을 1차적으로 막아주는 카자흐의 초지를 유지하는 방안 중 하나인 목축업을 궤멸시켜버려 재앙의 단초를 쌓았고, 설상가상으로 흐루쇼프가 처녀지 개간 사업을 실시해 재앙을 일으켰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개간 사업으로 사막의 모래와 먼지 폭풍이 만들어내는 먼지와 모래들을 막아주던 카자흐 초원의 수초들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고, 그 결과 모스크바까지 모래 바람이 불어와 농작물에 모래가 쌓일 지경이 되었다. 흐루쇼프 실각 이후, 소련 정권은 재차 방풍림을 조성해 모래 폭풍을 막아야 했다. 중앙아시아의 폭풍 외에도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는 날씨가 맑거나 가물면 먼지 안개가 생겨 작물들을 괴롭혔고, 봄 · 가을에는 서리와 안개가 껴 냉해를 입혔다. 키예프 공국의 한 대공이 "맑은 날씨는 가뭄을 부른다."고 말할 정도로 먼지 안개와 서리가 미치는 악영향은 오래된 것이었다. 1979 ~ 1985년까지 소련의 농 · 축산물 생산량이 감소한 것도 6년간 지속된 한해의 영향이 컸다. 네번째 요인은 토양 침식이었다. 바람과 물이 만들어내는 토양 침식은 소련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자연적인 경토(耕土) 형성은 100년에 0.5cm씩 이뤄지는데, 소련의 토양 침식은 자연적인 회복으로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를 기준으로 하여 바람이 일으키는 토양 침식은 스텝,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서 심각했으며 총 9,200만 헥타르의 농경지가 피해를 입었다. 1969년 겨울, 로스토프 주에서는 초속 25m 이상의 강풍이 5 ~ 6일씩 몰아쳐서 1 ~ 10cm의 표토가 유실되었다. 물이 일으키는 토양 침식은 유럽 러시아 남부의 흑토 지대에서 주로 발생하고 카프카즈 이북 · 우랄 남부 · 몰다비아 · 중앙 흑토 지대에서도 일어났으며 전체 피해 면적은 유럽 러시아에서만 5000만 헥타르였다. 봄의 융설수나 여름 호우가 비옥한 토양을 침식하고 경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V자형 고랑을 만들었다. 이 V자형 고랑은 중앙 흑토 지대를 중심으로 600만 헥타르에 달하고 흑토 지대 경작지의 50%가 토양 침식의 위험을 갖고 있었다. 탐보프 주 같은 경우에는 1980년대 내내 매년 1헥타르당 1톤의 부식토가 유실되었다. 바람과 물에 의한 토양 침식의 "위험"이 있는 경지는 1억 5,200만 헥타르로 전체 경지 면적의 70%에 달했다. 토양 침식의 결과, 농경지에서 약 5,000만 톤의 부식토가 유실되었고, 이런 피해를 입은 경지에서의 수확량 감소는 900만 톤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외적 요인들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한 소련도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은 다양한 조치를 취해 이 문제들을 완화할 수 있었으나,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농축산물 생산량을 확보해야 했고, 그 문제 때문에 무리하게 자연을 파괴하거나 휴경해야 하는 농경지를 무리하게 경작했다. 그 때문에 소련의 농경지는 점점 그 상태가 나빠졌고 토양 침식에 더욱 취약해졌다. 따라서, 소련의 농업 정책을 비판할 때는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괴소문과 서방 세계의 프로파간다에 입각해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와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모순점에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되며, 소련의 자연 환경 문제를 거론하며 소련 정부의 잘못된 농업 정책에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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