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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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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군과 발전 === [[러시아 제국]]은 [[러일전쟁]] 패배와 [[러시아 혁명|국내 혁명운동]]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결국 전비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러시아 공화국|러시아 임시정부]]는 제정에 뒤이어 전선을 맡았으나, 결과적으로 전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 틈을 타서 볼셰비키 당이 적위대를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면서 [[파리 코뮌]] 이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대다수가 군대나 군사에 정통하지 못한 비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볼 때, 군대처럼 힘있는 집단이 반란을 시도할 경우 체제가 전복되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곱지 못한 시선은 [[정치장교]] 제도의 창설과 훗날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벌어진 [[대숙청]]의 기조가 됐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대 보유가 금지된 힘의 공백 상태에서 영관급 이상의 경험많은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세력의 편에 섰고, 이들은 [[공산당]]에 대항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당의 무력은 병사 소비에트와 연결된 적위대뿐이었다. 그 후로 러시아는 1918년부터 20년까지 [[러시아 내전]]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 후유증은 192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불안한 틈을 타고 다른 나라 군대들이 소비에트가 고토로 간주하던 지역을 침범하기도 했다. 프랑스군, 미군, 일본군도 [[백군]]을 지원하며 공산세력과 싸웠지만 결국 승리는 주요 대도시와 인구 밀집 지대를 장악하고 대규모 동원으로 수적 우세를 확보한 붉은 군대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패배로 혁명을 수출하는 것은 실패했고,엄청난 수준의 내전 여파가 신생 소비에트 정권에 닥친다.[* 내전 기간 동안 대도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소비에트 군대의 농촌 수탈, 즉 전시공산주의 정책에 근거한 식량 징발로 볼가 강 유역 등에서 최대 1천만명의 농민이 아사하는 러시아 대기근이 발발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군대의 수탈에 반발한 농민들은 녹군 등의 무장단체를 조직해 저항했으나 [[독가스]] 살포를 포함한 강경한 진압에 패배했다.] 초기의 적위대는 계급제를 완전히 없애려 했다. 적위대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이래로 실시된 붉은 군대의 전신으로도 볼 수 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은 선거로 뽑히고 병사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명령이 수행될 수 없던 전통 때문에, 적위대의 지휘관은 선거로 뽑혔고 명령 역시 병사위원회의 허락 하에서만 실행됬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규군이라기보단 민병대에 가까운 지경으로 조직력이 하락하고 사병 출신들이 지휘관을 맡게 됨에 따라 내전 초기에 적위대는 연패했다. 다만 이게 이유라고 보기도 어렵고 단순히 장비와 훈련도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여지가 많긴 하다. [[레프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를 개편해서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위에서 전문가를 지휘관에 임명하고 상명하복식 명령이 수행되는 체제로 바꾸고, 이름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개칭했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대부분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게 도입한 것이 [[정치장교]] 제도. 그러나 트로츠키 아래서 계급제도는 끝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는 계급제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부대 내에는 오로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같은 직책만이 존재하게 됐다. 예외는 장군 뿐이었기에, 군의 계급은 사실상 '병사, 장군' 이 둘 밖에 없었다. 사실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그런 직책이 계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병이나 기병들로만 싸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처음에는 이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군이 복잡해지면서 불거졌다. 복잡한 조직에서 너도나도 같은 계급이다 보니, 지휘관의 명령을 듣더라도 병사들이 잘 따르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이외엔 중간 책임자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통솔하기 힘들었지만, 전시에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누구 하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안 되는지 관심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때문에 트로츠키에 이어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 정확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된 [[미하일 프룬제]]는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었다. 그동안 붉은 군대는 500만 대군으로 성장한데다가, 기갑부대, 공수부대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계급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어, 결국 1935년 붉은 군대에 계급제도가 마침내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경험은 소련의 군사학과 군사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1차대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에서 내전을 겪은 소련군은 부족한 예비 전력을 철도로 이동시키면서 전선 곳곳을 틀어막았고, 간신히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위협받던 전선을 증강하기 위해 철도로 대규모 부대가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 내전은 또한 제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보병 사단들은 전쟁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여러 전선을 오가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참전자들은 준비된 전력과 전략 예비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게 되었다. 내전 과정에서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한 대다수의 전투들을 큰 경험으로 삼아, 이와 같은 전장 환경에서 모든 전술적인 작전들을 전체 전역으로 통합하여, 적 후방 깊숙한 목표를 겨냥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의 2가지 원동력은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당시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기동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기동의 전제 조건은 고도로 기동화된 공세 전력이었고, 러시아 내전에서는 이점을 무장 열차와 차량, 특히 기병 전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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