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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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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그녀의 출생 후 11일 뒤에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산고로 사망하여 편부 윌리엄 고드윈 슬하에서 자랐다. 따로 학교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글쓰기가 취미인 [[문학소녀]]로 성장했다. 15세에 아버지의 제자 중 장래성 있는 시인이었던 20세의 [[퍼시 비시 셸리]][* 메리보다 훨씬 유명했고, 지금도 작가로선 한 수 위로 평가받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현대 대중들에겐 '[[오지만디아스(시)|오지만디아스]]'로 잘 알려졌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그가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것. 야사에 따르면 첫 성관계를 밤중에 어머니의 무덤 위에서 했다고 한다. 1814년 퍼시와 메리는 사회의 시선과 가족의 반대를 피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퍼시의 시집 출판, 학술 활동 때문에 영국에 종종 들르기도 했다고. [[1816년]]에는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서 [[조지 고든 바이런]]을 만나게 되어 친해졌는데, 그 해 [[여름]] 날씨가 우중충한 탓에[* 1816년은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의 분화가 전세계에 [[기상이변]]을 일으킨, '[[여름]]이 없는 해'로 유명하다.]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때 바이런의 제안으로 퍼시와 메리,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 이렇게 4인이 심심풀이 삼아 [[괴담]]을 창작하게 된다. 메리의 회고에 따르면 "퍼시와 바이런은 일찌감치 나가떨어졌고 폴리도리는 '[[흡혈귀|뭔가 아주 끔찍한 생각]]'을 내놓았다가 더 얘기하기를 그만두는 결말을 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메리의 차례가 돌아오자, 그녀는 [[갈바니]]의 개구리 전기 실험과 독일에 실재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성에 살던 연금술사가 인조인간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착상을 얻어 [[프랑켄슈타인|'시체를 모아 전기의 힘으로 되살린 한 과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경청한 바이런이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면서 소설로 집필할 것을 권유했고, 남편(정확히 말하면 이때까지는 아직 정부(情夫)였다) 퍼시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의 소설화 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2년 후인 1818년 메리는 [[익명]]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당시 글쓰기는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여성 작가들이 익명으로 작품을 내놓는 일이 흔했다. 도피 여행 중 퍼시의 아내 '해리엇 셸리'[* 퍼시가 바람을 피우자 해리엇도 맞바람을 피웠는데, 이때 임신을 해서 자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워낙 보수적인 사회였으니 [[사생아]]를 가진 여인에게는 가혹한 취급이 가해졌다.]가 [[템즈 강]]에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둘은 곧 영국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올렸고 메리는 정부(情婦)에서 정식 아내로 승격(?)했다. 부부 사이의 금슬은 좋았지만,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슬하의 자녀 4명 중 3명이 일찍 죽었고(1815년에 태어난 첫째 딸은 2개월 먼저 조산해 사망, 둘째 윌리엄은 3살 반이던 1819년, 셋째 클라라는 1살이던 1818년 사망), 남편 퍼시마저 결혼 7년만인 1822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요트]]를 타다가 폭풍을 만나 익사했다. 퍼시의 죽음 이후에는 그의 유고를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고, 1831년 '프랑켄슈타인' 개정판을 내면서 자신이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의 인지도를 얻지는 못하였고 1851년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그밖에 그녀 작품으로 재평가된 작품으로 1826년에 쓴 '최후의 인간'은 알수 없는 병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마지막 한 사람만 살아남는 이야기로 [[나는 전설이다]]보다도 무려 128년이나 먼저 나온 [[포스트 아포칼립스]] 교과서이다. 이 소설도 당시 철저하게 묻혀졌으나, 1950년대 나는 전설이다나 [[트리피드의 날]]이 나오면서 이 작품도 재평가되었다. 인지도나 인기와는 별개로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당대의 문학적 평가는 매우 좋지 못했다. 책 자체는 매우 잘 팔렸지만 주류 문단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을 단순히 저급한 대중소설 정도로 취급했던것이다. 당대에 바이런과 어깨를 나란히 한 남편 [[퍼시 비시 셸리]]와 달리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고전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60년대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고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 문학비평이 대두하면서부터이다. 단순히 여자가 써서 높이 평가되었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셈이다. 더불어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최후의 인간'도 재평가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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