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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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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 === [include(틀:상세 내용,문서명=1989년 루마니아 혁명)] 1996년 당시 2,3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불안 속에 벗어나 [[루마니아 왕국]]을 키웠다. 인종적으로 라틴계에 속하며 일부 헝가리인을 포함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소련에게 영토를 빼앗긴 기억 때문에 매우 반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왕국이 붕괴되고 1947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동유럽 혁명]]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민주적 체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전간기에 잠시나마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하기는 했다.] 1965~1989년 사이 24년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민족적 공산주의와 신 스탈린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루마니아의 전제적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루마니아는 19세기 이래로 민족적, 민중적 반란의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1947년 곧장 공산당이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발칸반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공산 정권 수립 과정이 그처럼 강압적이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불가리아나 유고슬라비아와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토착 지배 계급이 매우 강하였고 비교적 서구 지향적인 도시의 중산 계급이 존재하였으며, 강하게 반 러시아적 정치 문화가 존속한 탓이었다. 루마니아는 결코 소련에 충성스러운 체제는 아니었으며 1960년대 내내 소련 공산주의와 대립하였다. 동시에 공산 중국과는 친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공산 체제는 차우셰스쿠 지배 동안 매우 인민주의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이었다. 그 이유는 루마니아에서 정치 결정은 차우셰스쿠 개인과 그 가족 및 측근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권력은 이들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법적 절차는 제도가 부재하거나 결핍되었다. 대다수 국민은 제도와 연결되지 못하고 지역적이거나 수동적이며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현상은 차우셰스쿠의 몰락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새 정부 하에서도 권위주의적 독재자와 엘리트는 비 계몽된 대중을 동원하거나 직접 접촉함으로써 정치 변화를 일으키고는 하였다. 1980년대 말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가 경제적 위기에 부딪히면서 국내외 불만이 증폭되어 갔다. 차우셰스쿠는 사회주의 체제의 오류와 실수는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계획의 잘못된 시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구 공산권이던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굴복/붕괴하는 등의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루마니아의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면서 폴란드와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팔아먹고 자본가들에게 굴복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인 오타 시크(Ota Šik)의 시장 경제 지향의 개혁을 자본주의를 복구하려는 음모라고 비난하였다. 또 그는 다원주의를 원하는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이양해 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공통된 하나의 유형이 존재한다는 교조적 입장에 대항해 루마니아는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폴란드의 자유 노조인 '자유 연대'의 형성을 막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국가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5주일 후 1989년 12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șoara)의 시민들은 처음으로 압제국 루마니아의 전통을 깨고 차우셰스쿠 체제를 비판하는 헝가리계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신부를 비밀 경찰의 체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집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티미쇼아라는 바나트(Banat) 주의 수도로서 여기에서는 특히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지역이었다. 이 집회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저항 세력 중 약 2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이 저항은 트란실바니아로 확산되면서 서서히 격렬한 전국적 시위로 전환되는 사태로 비화되었다. 티미쇼아라 봉기는 민주주의 열망과 소수 민족의 인권의 존중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수도 부쿠레슈티로 확산되면서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차우셰스쿠는 경제 원조 문제로 [[이란]]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12월 21일 수도 부쿠레슈티의 혁명 광장에서 반사회주의적인 반란자를 탄핵하기 위하여 대중 집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군중은 그의 집권에 등을 돌리고 '차우셰스쿠 물러나라!' 는 구호와 함께 공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놀란 차우셰스쿠는 건물 발코니에서 후퇴하였고 보안 경찰이 탱크와 진압 가스로 반란자들을 유혈적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곧 혁명 광장에서는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군중의 시위에 곧 지식인, 청년 세대, 시민들이 발포하는 비밀 경찰과 군대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중심부로 가세 집결하면서 시민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정부 청사를 공격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국방장관 바실레 밀레아(Vasile Milea) 장군은 서기장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고 이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곧 혁명 군중은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텔레비전 방송국 등 언론 매체를 장악하고 루마니아에서 혁명이 발발했음을 방송하였다. 이어서 7만 5천 명의 [[세쿠리타테]]는 무장한 민병대와 충돌하게 되었다. 심지어 시위 진압을 위해 파견된 정규군이 오히려 혁명 군중에 합류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건물, 왕궁, 대학교, 국방부 건물과 텔레비전 방송국 센터는 양 세력 간의 격전지로 변하였다. 이 폭동으로 수천 명이 사살되었으나 민중은 오랫동안 증오하던 억압적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였다. 이에 놀라 달아나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피신 중에 체포되어 크리스마스 날에 총살 처형되었다. 이로써 1989년 이러한 루마니아의 변화는 같은 시기에 비폭력/평화적으로 반공산당/민주화 혁명을 거치며 공산당 독재 정권이 무너졌던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같은 동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제도적으로도 불안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나무위키, title=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version=197, uuid=31a10734-6cac-4b38-a691-0a49fb8ddf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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