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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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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스탈린주의 운동의 전개 === 1956년 2월의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과거의 책임에 관해서 게오르기우데지를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클루지]]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헝가리 봉기 직후, 부쿠레슈티와 다수의 [[헝가리인]]이 사는 클루지,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의 봉기자에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히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의 인상, 콘스탄티네스쿠의 교육장관 임명 등,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이 별로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로서 이런 부분적 양보 정책 외에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인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한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가 강하게 묶여 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의 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파우케르와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 숭배'의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것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키시네브스키와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됨으로써 극단적 자유화 운동은 생겨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짓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그것은 갈라치 제철소 건설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라는 급속한 대규모의 공업화 계획으로서 동유럽 제국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것이 되었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의 소련군의 철수가 발표되었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는 1947년의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 주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으로서, 1955년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다. 헝가리 봉기 후 소련은 폴란드(1956년 12월), 동독(1957년 3월), 루마니아(1957년 4월), 헝가리(1957년 5월)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으나, 루마니아만이 끈질긴 교섭 후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이는 그 뒤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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