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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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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통수권의 독점, 임페라토르 호칭의 정착 ===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현직 집정관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위관직(Magistratus, 마기스트라투스)"들의 임페리움을 필요 시 직권으로 덮어쓸 수 있는 임페리움이다. 원래 1년 임기의 집정관이나, 또는 위기시에 독재관에게만 아주 짧게 부여되던 이런 광범위한 임페리움은, 야심가들의 꼼수나 지속되는 내전 때문에 임페리움 마이우스로 이름을 바꿔 기한을 늘려가며 점차 상설직으로 변하는 흐름을 거쳐 결국 황제의 영구적 권한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천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지만, 제정으로의 변화는 기존 [[로마 공화국|로마 공화정]]의 헌정질서,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이 점차 유연화되고 붕괴되는 흐름의 연속선상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로마 공화정 시기 [[집정관]]을 포함하여 모든 로마의 정무관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임지와 임무 범위 내에서 임페리움을 보유한다.[* 예를 들면 [[조영관]]은 수도의 공공사업을 임지로 받고 군대는 임지가 아니므로 조영관의 임페리움으로는 군대 지휘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상위에 있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이 요구하면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가장 높은 임페리움은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것이었고, 독재관의 임페리움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가진다. 다만 공화정 중기까지는 위기 때만 임명되는 6개월 임기의 비상설 독재관이 다른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이 [[집정관]](Consul, 콘술)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전 공화국에 대한 임페리움을 가졌으나, 동료 집정관이 반대하거나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는 이 임페리움을 뜻대로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총독(Proconsul,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은 집정관 다음이며, 특정 속주와 그에 속하는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다. 공화정 전통이 유지되던 공화정 중기까지는 예외적 상황에서 독재관이 취임할 때를 빼면 [[집정관]]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공화정 후기 정쟁이 격화되고 전란이 장기화되는 상황이 닥친다. 공화정 후기의 정치적 거물들은 집정관에 취임한 상태에서조차 상대 붕당의 집요한 반대, 특히 [[호민관]]의 거부관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들은 점차 반대가 불가능한 독재관의 비상대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지휘할 권한이 있던 현직 집정관 [[술라]]는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책동으로 인해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빼앗겼으며, 로마 입성 후 집정관에 취임해 가급적 법의 틀 내에서 내전을 수행하려던 [[카이사르]]는 군자금 확보 과정에서 호민관 메텔루스의 거부권 행사에 꽤나 애를 먹었다.] 결국 술라와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6개월의 임기 대신,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다만 [[술라]]와 [[카이사르]] 이후 독재관은 공포와 독선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나 탐낼법한 초법적 권한이 있음에도 독재관 취임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비록 새로 등장한 권한이기는 하나, 이와 같이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다른 총독들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임페리움을 특별법 형식을 빌어 수여하는 일은 전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양아버지의 정적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우스]]다. 원로원은 [[지중해]]의 해적 소탕작전 당시 폼페이우스에게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로마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취임시키는 대신 특별법을 통해 "바다와 해안의 속주와 군대에 대한 3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부여한 적이 있다. 물론 폼페이우스는 절대적 권한을 효율적으로 행사해 3개월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깔끔하게 이 전대미문의 임페리움을 내려놓았다. 다만 이는 특정인에게 장기간 임페리움을 부여할 수 있는 선례가 되어, 공화정 헌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이를 본받은 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은 제국을 셋으로 나눈 뒤 각자의 영역에 대한 5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민회로부터 부여받아 전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과정에서 삼두정치 구성원들에게 부여되었던 임페리움이 확장되어, 옥타비아누스에게 본국 이탈리아, 제국의 전체 속주와 군대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었다. 결국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들어, 이탈리아와 안정된 후방의 임페리움은 내놓았지만 죽을 때까지 전방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요구한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 또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다른 총독들의 임페리움보다는 높지만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았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안배로, 국가의 최고권력인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으니 명목상 '최고 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이미지는 크게 희석되는 것이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만 설치되는 비상설직(에 따르는 비상대권)과 국가적 영웅들에게 부여된 선례가 있는 특권과 존칭을 받았을 뿐이긴 하다. '''그걸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임기를 없앴을 뿐'''이지만 어찌됐든 공화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다. 호민관의 권리 회복을 외치며 내전에 나섰지만 결국 카이사르도 호민관의 거부권을 완력 행사로 무력화시킨 것처럼, 자신들도 절대 견딜 수 없던 호민관의 거부권만 빼면 공화정 국체의 핵심 요소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제정 시대에도 형식상 로마의 최고위 정무관은 당연히 집정관이었다. 때문에 내각제 국가의 명예직 대통령이 의전상 총리보다 앞서고 때때로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제정 시대에도 집정관은 매우 권위가 있었고 모든 귀족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또 제정 초중기까지도 잔존했던 집정관직의 권위 때문에, 내전기나 집권 초 권력이 불안정하던 황제들은 가급적 집정관 직을 겸임하여 반대파의 준동을 미연에 방지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원로원의 유력 인사들은 황제가 집정관 직에 자주 취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고 이를 두고 갈등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자신들에게 돌아갈 집정관 T/O가 줄어들고, 황제가 이론상이긴 해도 공화정 시기부터 내려오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들을 존중하며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방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추가된다. 임시직인 독재관이야 임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집정관 역시 황제가 겸임하거나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사가 사실상 '임명'되는 상황에서 1년마다 바뀌며 심지어 제정 시대에는 집정관이 임기 1년을 채우는 일이 매우 드물어져 더더욱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기가 힘들어졌다. 공화정 시대에 비해 늘어난 속주와 군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총독으로 부임할 전직 집정관급 인사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몇 달, 심하게는 며칠만 잠깐 재임한 뒤 [[보궐]](Suffectus) 집정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다만 정규 집정관과 전임의 사임으로 임명된 보궐 집정관 사이에는 대우의 차이가 약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정관은 혼자서만 뽑히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황제 편을 들면서 반대할 동료가 있는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발휘되는 것은 어려웠으며 설득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집정관 1명이 사임하면 다른 집정관도 사임하는 제도를 이용해서 골치아픈 자를 집정관 직책에서 쫒아냈다. 그러므로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형식상 우위에 있다지만, 임기가 없는 종신직에 집정관과는 달리 임페리움을 공유하거나 견제할 사람도 없는 황제의 최고 총독 임페리움을 눌러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 힘들어진 것이다.[* 즉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비유하자면 [[내각책임제]] 성격이 강한 [[이원집정부제]] 체제에서 최고권력자가 대통령 자리에만 앉지 않고 의회 의장 + 각부 장관 + 지자체장 + 군 최고 통수권을 몰아쥐어 '명목상으로는 국가원수가 아닌' 최고권력을 가진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년 ~ 2012년 기간 [[메드베데프]]를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세워놓고 본인은 총리가 되어 모든 실권을 행사한 사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임페리움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임페라토르]]가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칭호로 정착되었다. 한때 임페리움 보유자를 의미하던 Imperator(임페라토르)는 공화정 후기 군 사령관, 그 중에서도 [[개선식]]의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존칭이 되었다.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에게 대부분의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어 속주의 군 지휘관은 최고 임페리움을 가진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 격하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차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무공을 세웠고, 임페리움을 독점하게 된 아우구스투스만이 임페라토르로 불리게 되었다. 단순히 사령관 또는 개선장군을 일컫는 말이었던 임페라토르가 황제의 대표 호칭이 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이 호칭에는 군주의 호칭이 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게 범접할 수 없을 수준으로 높은 권위가 있었다. 실제로 마리우스나 술라,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등 화려한 전공을 올려 임페라토르로 환호받았던 이들은 독재자로 군림,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유권자이기도 했던 군단병들이 사령관을 자발적으로 "임페라토르!"로 부르며 환호하는 것은, 사령관에게 로마 귀족의 최고 영광이었던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있다고 승인하는 관례였다. 이후 개선식에서 군단병들과 전 로마인이 개선장군을 임페라토르로 칭하며 환호하는 일은 개선장군에게 부여되는 가장 특별한 영예였다. 또 특정 개인이 공화국을 뛰어넘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로마 공화국에서, 예외적으로 개선장군은 [[개선식]] 당일만큼은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는 분장과 의상으로 치장하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았다. 따라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그것도 인생의 절정인 승리와 개선의 순간에만 허용되는 초월적 영예와 선망이 집약된 호칭이었다.[* 개선식 이후에도 고참병들이 옛 사령관을 애정을 담아 임페라토르로 부를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는 모든 시민들이 사용하는 영구적인 호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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