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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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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장악, 권위 수립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그의 양자로 입적됨과 동시에 그의 물질적, 정치적 자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었다. 이 중에서 카이사르의 물질적인 자산 중 대부분이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양자 입적 전 이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바꾼 이름이다.],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으로 전 로마인에게 분배되었다. 이 행위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확실하게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강력하고 폭넓은 정치적 지지라는 막대한 자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금전적, 정치적 유산을 모두 상속받은 뒤, 제2차 [[삼두정치]]가 끝난 이후 라이벌이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몰락시켜 로마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한 정치꾼답게, 악티움 해전 개선식 거행 후 가장 절묘한 시점에 공화정 복귀를 깜짝 선언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이후로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최고지도자 한명의 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발표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의 선언에 원로원은 매우 기뻐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선사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내려 주자고 한 원로원 의원은 안토니우스파에서 옥타비아누스파로 갈아탄 이후 과할 정도로 충성을 맹세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였다. 그러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군|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끌던 군단들의 중~상급 장교들과 동방/서방의 [[속주]] 및 동맹국 지도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물려받은 끈끈한 클리엔테스 관계로 묶여 있었고, 후술하듯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정복한 속주들의 대부분의 총독직을 싸그리 겸임했다. 로마 공화국의 군대 과반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을 따르는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공식적인 직위 여부를 막론하고 탄탄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상속받은 상당한 재산 이외에도,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를 격파하고 그 당시 공화국 식량의 1/4을 공급했던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개인 영지로 흡수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일종의 파라오 취급을 받았다. 이는 이집트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 비문에서 온전히 확인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공화국 경제의 상당한 부분과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지도자로서 해야 할 각종 사업을 원로원 대신 추진하기 시작한다. 당장 원로원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방치했던 본토 이탈리아 내의 [[가도]](街道)정비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모두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어느 해의 로마 국고는 상당 부분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기부한 금액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던 퇴직병들의 봉급 문제도 이집트가 황제 직속령이 되고 퇴직금 액수가 법으로 정해지게 되면서 점차 해결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 체제에서도 '''계속해서 [[집정관]]직을 연임하면서 권한을 쥐고 있었고 해가 지나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막대한 [[권위]]를 가져다 주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하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 자리도 아우구스투스가 차지했다. 이 과정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위를 이용해 원로원 안에 새로 구성된 10인의 사제를 지명되는 일을 대리해 모두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가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내보였다. 그 결과, 그는 레피두스 사후 이 자리를 쉽고 자연스럽게 얻고, 종교 분야의 우두머리라는 타이틀로부터 나오는 권위까지 집어 삼킨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창조했다. 그리고 위에서 정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14년 사망한 이후까지의 매우 긴 통치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눈에 보이도록 추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스럽고, 상황에 맞게 본인이 최고 권력을 쥐고 항구적으로 세습할 환경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점차적으로 자신이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교묘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이 남긴 자서전 <업적론>을 통해 [[임페라토르]]를 총 21번 병사들에게 선포받아 누렸고, 기원전 43년 처음 받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매형인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힘으로 제압한 악티움 해전 승리 후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음에도, 이전의 임페라토르와 구분될 본인만의 임페라토르 자리에 필요한 것이 없었다. 특히,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이 컸다. 그래서 상술한 대로, 공화정 회복과 권력 이양을 로마 원로원 앞에서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는 이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아주 좋은 타이틀을 받고, 이 전 과정 속에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이 원한 것을 모두 새로 받는 형태로 받아냈다. 그 과정은 가히 현대 독재자들의 귀감이 될, 그야말로 예술적인 정치공학의 정수라 할 만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에서 자신의 라이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수도 로마로 개선한 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모든 초법적 권한을 내려놓고 공화정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해, 원로원 추대로 프린켑스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두 번의 조정 헌법을 입안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1차 조정 헌법에 이은, 2차 조정 헌법이 통과된 직후인 일명 "제2차 조정"부터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론상 임페라토르이며 프린켑스인 그가 전대미문의 대권력을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시킨 채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다. 먼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이양 속에서 삼두정치 하에 받은 비상대권을 포기하면서, 새롭게 10년 동안의 기간을 설정해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지방의 전 속주와 함께 이집트, 키프로스 일대의 임페리움을 합법적으로 받고, 무기한 자동연장 형태로, 포기할 수 없는 식으로 지배권을 선사받는다. 그는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등 극소수 친구, 최측근들과 함께 이 조치를 위해 기원전 27년 개선식 전까지 거의 4년 가까이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에서 그에게 공화정 질서 회복과 공화국 유지라는 것을 일깨운 이가 동갑내기 친구를 넘어 군사적 협력자인 아그리파였다. 그는 냉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분명하게 로마의 역사, 현재 정국을 상기시켰고, 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그가 화려한 개선식 후 예정된 발표에서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은 일은 4년의 준비 속에서 얻어낸 결과물과 같았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본인 추종자들의 도움 아래 군사적으로 중요한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일대와 경제적인 기반이 될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먼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어 그는 자신을 지지한 평민, 일반 군인들이 민회 안에서 지지 의사를 표명한 상황을 이용해, 본인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집정관에 출마하는 쇼를 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체제의 회복과 평온을 천명한 기원전 27년 이후 한동안 "더 이상의 내전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집정관]]에 연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것이 1차 조정헌법 입안, 통과 후 시작된 기원전 27년의 소위 "제1차 조정"인데, 아우구스투스는 보다 완벽한 판을 짜기 위해 아그리파와 함께 원로원 정원을 확정하고 임면권을 행사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반대 목소리를 나오지 못하게 처리한다. 따라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조카 마르켈루스, 양자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 히스파니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원전 24년까지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상황에서도 어떤 식의 반격도 하지 못한다. 물론, 원로원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의심을 했다. 이 의심은 아우구스투스가 약 5년 동안 집정관을 연임하고, 조정 헌법이라고 불린 새로운 공화정 체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수록 위기가 됐다. 임페라토르는 최고 군사지도자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프린켑스 세나투스인 것 역시 말장난이라는 의심은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유가 됐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23년, 귀국 1년도 못 되어 과로에 시달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거의 죽다가 살아 난다. 그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고 가는 식으로 열을 내리는 치료법으로 기운을 되찾는데, 그는 회복 과정에서 자신이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후부터 기원전 27년 조정헌법 통과까지 심혈을 기울인 체제적 결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의 불만을 줄이고, 본인이 가진 지위가 가진 한계를 보완할 목적으로 기원전 23년 제2차 조정헌법을 입안해 통과시킨다. 이를 위해 그는 더 이상 집정관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그는 집정관직을 내려놓고, 더 이상 자신이 총독(프로콘술 Proconsul)이 아닌 속주들에 개입할 수 있는 집정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에 질서를 가져다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반대급부로 두 개의 특권을 요구했다. 또 2차 조정헌법으로 불릴 새로운 체제 개헌 아래 이를 구체화했다. 바로 자신에게 모든 속주와 본국 이탈리아를 임지로 하는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Imperium [[총독|Proconsul]]are Maius,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 마이우스는 영어로 "주요한"이란 뜻을 가진 "Major"의 어원이다.])" 또는 줄여서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주어 원로원 속주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에 "로마 시민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 이후 숱한 창작물들에서 공화정으로부터 독재로 변질하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의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쉬브 팰퍼틴]]이 은하제국을 창설하면서 한 연설이다.]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마찬가지로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이 국정의 주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을 수여할 것이었다. 본래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에게 주어지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 트리부니키아 사크로산티타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당 권리는 일종의 [[면책특권]]으로, 호민관의 신변을 공격하거나 호민관을 임기 중에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자신에게 호민관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수여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한 중 일부를 자신에게 수여했는데, 이는 [[인구주택총조사]]에 해당하는 통계를 낼 권한과 귀족이거나 관직을 역임하여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 중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이었다. 감찰관의 권한은 매우 크므로 필요한 일부만 받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혼자서 원로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헌법상 지위를 바꾸고, 2차 조정헌법으로 알려진 개헌을 했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했는데, 이때 로마에서 전염병, 기근이 발생한다. 이때 이 전염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전염병, 기근 발생 속에서 혼란에 빠진 민심 회복에 힘썼다. 그는 사비를 들여 모범을 보였는데, 이를 지켜본 로마 서민, 군인들은 그에게 "집정관을 앞으로 못 맡으면 독재관 책무라도 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하고, 원로원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2차 조정 헌법 속에서 [[파트리키]]임에도 사실상 종신 호민관이 된 발표 속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권한 아래 원로원을 소집해 민회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모든 법령을 거부할 수 있음에도, 이런 민심과 요구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추가로 독재관 권한과 매년 갱신되는 사실상의 영구 집정관 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 집정관을 맡지 않고도, 그들보다 위엄있는 사람이 됐고,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된 일반 군인과 퇴역병 가족들의 일방적 지지 속에서 군대 통수권과 함께 군대 통제에 필요한 명망까지 이때 저절로 받게 된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모든 [[속주]]의 통제권을 [[원로원]]에게 되돌려준다고 선언하고, [[독재관]] 직을 준 로마 서민의 요구를 임시라고 규정하면서 귀감을 얻게 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본인만이 가진 힘을 활용한다. 당시 로마에서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자신 이외에는 당시 변방에 해당하던 갓 정복한 속주들을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는데, 그는 2차 조정헌법과 기원전 22년 민회와 서민들이 쥐어준 추가 지위를 마치 원로원 대표 자격으로 봉사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일들을 묶어 소위 제2차 조정이라고 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해, 당시 로마가 [[관료제]] 취약 문제로 각 속주의 총독이 각자 재산을 써가며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한 일을 해결해줬다. 또 그는 단호하지만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의심을 품은 이들을 설득하고 견제하고 적절하게 구슬렸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반역법을 다루고 재무관 자격에서 본인과 일가를 중상모략한 원로원, 기사계급들을 손보는 식으로 본인에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철저히 보여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원로원은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들을 10년간 통제할 권한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갓 정복된 갈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부족이 남은 히스파니아, 그리고 막강한 가상적국 [[파르티아]]에 맞서야 하는 시리아 등 로마 제국 대부분의 군사적 명령권이 필요한 속주를 관례적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임명권과 면직권을 주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모든 속주들의 총독을 겸임하게 된 자신의 권한으로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에퀴테스]] 계급의 능력자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해서 확실하게 장악한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후일 우리가 황제 속주라고 부르는 속주 임명권을 1차 조정헌법 체제에서와 달리 2차 조정헌법 후 일들 속에서 영구적으로 장악했고, 집정관으로서의 권한 외에도 그가 당시 로마제국 [[속주]]의 과반을 자신의 임지로 확보한다. 이는 곧 2차 조정 헌법 수정 속에서 속주에 따라가는 로마 [[레기온|군단]]의 지휘권 역시 대부분(26개 중 20개)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휘하에 들어온 결과로 이어진다. 즉, 2차 조정 헌법 체제 이후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는 지위 속에 군사권 외의 행정, 사법에 관한 임페리움을 넣으면서,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황제의 전형을 완성했다. 그래서 2세기 후반 ~3세기 중반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평하면서, 임페라토르가 로마인이 싫어하는 왕을 대신한 대체 칭호와 가깝게 됐음을 기술했다. > "이런 식으로 시민과 원로원의 권력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시대부터 엄밀히 말하면 두세 사람이 나중에 집권하게 되더라도 '군주'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되도록 했다." > "로마인들이 군주제라는 이름을 너무 싫어해 임페라토르를 독재자나 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보유한 직위 및 권한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명예직인 원로원 제일인자(Princeps)와 별 실권은 없지만 종교적으로 상당한 권위를 주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대부분의 속주들의 총독(Proconsul)직과 그에 딸려오는 군단들에 대한 임페리움, 자신이 총독인 속주들과 자신이 총독이 아닌 속주들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임페리움 마이우스, 그리고 호민관 특권과 감찰관 특권. 이 모든 직위와 권한들 자체는 로마 공화국에 이미 있었다. * '''[[원로원#s-3.1|프린켑스]](원로원 제일인자)'''는 원로원의 의원들 가운데 으뜸이란 뜻으로 본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같이 로마 공화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에게 수여되는 유서 깊고 명예로운 호칭이다. 물론 실권보다는 명예가 더 크기는 했으나 프린켑스 세나투스는 원로원에서 현대의 국회의장과 같은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했으며, 원로원을 대표해 외국과의 교섭을 맡았다. 때문에 기원전 28년 프린켑스로 취임하며 아우구스투스는 [[상징적 국가원수]]의 권한과 권위를 확보하였다. *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는 [[로마 왕국|왕정 시대]] 국왕이 가지던 제사와 종교의례의 최고지도자직을 계승해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있었던 직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도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어 암살당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이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차지했으나, 정계에서 은퇴당한 그가 기원전 13년 사망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오게 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던 비불루스가 종교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모든 공무를 거부하고 카이사르의 행위가 무효라고 선언하는 등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최고 제사장은 기본적으로는 프린켑스처럼 명예직이었으나, 종교적 분쟁이 있을 때 함께 일하는 신관들의 총의를 모아 오늘날의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역할[* 예를 들어 최고 제사장 카이사르는 신관들과 합의해 비불루스가 공무 거부를 통해 자신의 입법을 저지하는 행위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의 형식을 빌렸을 뿐, 헌법재판소가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헌법에 위배되어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대입해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 주로 판사 출신이 재판관으로 임명되는 한국 헌법재판소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이 헌법위원회의 종신직 위원이 되는데, 이는 유력 정치인들이 겸임하던 고대 로마의 신관단 구성과 유사하다.]을 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 외에도, 반대파가 종교적 이유를 내세울 경우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 제사장은 가치가 있었다. * '''프로콘술(총독)'''직은 로마가 제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처음으로 속주를 설치한 이래로 유서 깊은 직위였다. *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총독의 최고 임페리움)'''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마의 모든 속주 총독들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직권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한 것이지만 이 권한의 밑바탕이 된 총독의 임페리움이라는 개념은 로마 시민 모두에게 친숙했다. *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호민관]] 특권)''' 역시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평민들을 대변해야 하는 그 [[호민관]]에 귀족인 본인이 직접 취임할 수는 없으니 그 특권만 인정해 달라는 논리였는데, 그의 말마따나 호민관에게는 그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반역]]죄로 처벌한다는[* 즉 현대 형법에 따르면 호민관을 살해하는 것은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된다는 의미다. 정확히 따지면 호민관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의 내용은 '임기중의 호민관을 살해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처벌되고, 임기중인 호민관은 법적으로 기소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측면에서는 후술된 '원로원의 결의에 대한 거부권'+'민회 소집권'에 비해 의미가 적지만, 물리적인 공격행위와 법적 책임 모두 보호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전제군주 이상의 수준으로 강력해진) 로마 황제권의 구성요소로써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말하자면 '원로원 결의 거부권'과 '민회 소집권'이 황제로써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한다면 신변불가침권은 황제의 신분을 보장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변불가침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원로원의 표결에 대한 '''[[거부권]]'''과 민회 소집권이었다.[* 즉, 로마 황제는 황제 등장 이전까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겸비한 로마의 최고 권력기구였던 원로원이 내린 결정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할 수 있고, 민회의 의결이란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법령이나 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던 것. 즉,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국가 운영의 전권을 보유한 셈이다.] * '''켄소르([[감찰관]])'''. 아우구스투스가 이 직위에 연속으로 취임한 것인지 그 특권만 받은 것인지는 학자들의 이견이 분분하지만 당대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된 감찰관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주 업무이지만, 이 과정에 밝혀진 재산과 비리 등을 고발하여 원로원 의원의 직위를 상실시키는 것과 인구 조사를 통해 드러난 재산과 도덕성 등의 기준을 바탕으로 의석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추천하는 권한, 즉 '''원로원 의원의 사실상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재산, 도덕성과 자질을 근거로 귀족을 기사계급으로 강등시킬 권한도 있었다. 재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덕성이니 자질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원로원과 귀족 상대로 엄청난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찰관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는 직위였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직위와 권한은 이미 로마 공화정 내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동시에 겸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원수]]로서의 권위'''와 '''군 최고통수권''', 그리고 '''입법부에 대한 인사권과 [[거부권]]'''까지 사실상의 군주로서 필수적인 세 권리를 합법적으로 모두 거머쥐었다. 현대로 비교하자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군을 사유화하고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방부장관, 행정안전부장관, 경제부장관, 검찰총장, 주요 광역자치단체장, 종교지도자 자리를 모두 혼자 겸임'''하여 독재를 시작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 전대미문의 권한 집중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바야흐로 역사상 가장 독특한 [[군주정]] 중 하나인 로마 제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개선장군으로서 평민들에게 막대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아우구스투스는 한 가지 권한을 더 얻어낸다. 기원전 22년에 수도 로마에 식량난이 터져서 로마 전체가 혼란에 빠진 때가 있었는데,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와 같은 대 재해가 닥쳤을 때의 고대 로마의 전례에 따라 [[독재관]]에 취임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여 겸손하게 독재관 직위를 사양하는 대신 자신의 이집트 영지와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속주들로부터 대량의 식량을 공수하여 단번에 문제를 해결했다. 같은 일이 기원후 8년에도 터지자, 아우구스투스는 "보급 장관(Praefectus Annonae,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 직위를 신설하고 자신이 취임하여 로마 시민들의 목숨줄을 움켜쥐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사실상의 제국 전역에 적용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에는 한 가지의 부가효과가 더 있었다. 본래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 그 군단들의 임페리움을 보유하고 전투를 지휘했던 최고사령관이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를 행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의 모든 로마 군단들의 최고사령관은 아우구스투스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총독 대리로 전선에 파견한 사령관이 군공을 세우면, 그것은 고스란히 공식적으로 그 군단들의 총사령관인 아우구스투스의 군공이 되어 개선식을 올릴 권리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주어졌다. 물론 현지 사령관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긴 했으나 명예와 영광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간다는 것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얻은 시점부터 사실상 개선식은 오직 아우구스투스 혼자만이 올릴 수 있었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임기 중에 개선식을 여러번 벌여 평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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