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로마 황제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칭호 및 성격 == [include(틀:로마 황제와 황후의 대표 칭호)] 로마 황제가 취하던 칭호는 [[임페라토르]](Imperator, IMPERATOR),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Caesar, CAESAR), [[아우구스투스(칭호)|아우구스투스]](Augustus, AVGVSTVS), [[프린켑스]](Princeps, PRINCEPS), 도미누스(Dominus, DOMINVS)[* [[주인]]님이란 뜻이며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 칭호를 자신의 [[노예]]들이나 쓰는 칭호라며 이렇게 부르는 신하들을 비판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다. ], [[바실레프스]](Βασιλεύς),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 등 여럿이 있다. 로마 황제라고 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황제와는 거리가 멀다. 정확히는 당시 서양에서는 로마가 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즉 "전제군주정 및 제국에서 황제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로마가 만들어 가고 있었고 이것이 중세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 하늘의 아들(天子, 천자)이라 불리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황제와는 다르게 로마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없었으며 단지, 시민 한 명이 여러 공직에 선출 및 겸임되거나 세습될 뿐이었다. 이는 로마가 공화정의 역사가 길기 때문이었다. 당장 언급한 위의 칭호들 역시도 군대 총사령관(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문 출신(카이사르), 원로원이 올린 칭호인 존엄한 자(아우구스투스), 원로원 중 으뜸시민(프린켑스 세나투스)이라는 뜻일 뿐이다. 즉, 고대 로마인의 생각을 빌어 보면, 명문가인 카이사르 가문의 일원이 군대 통수권과 최고 제사장 등을 겸임하며 호민관 권한을 일부 받고서는 원로원 발언권 1순위의 시민 자리를 꿰찬 것이 바로 황제인 것이다. 이런 느슨한 관직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로마의 정치체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미나투스 체제(전제정)를 이루기 전까지 프린키파투스 체제(원수정)라고 부른다. 또한 편의상 황제라고 칭하지만 사실상 로마 황제는 후임자를 지목할 수 있는 종신 대통령제에 가깝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 말 도미나투스를 지나 중세 로마에 이르러 거의 완전히 전제군주정으로 탈바꿈했음에도 자신들을 '공화정'이라고 부르는 근간이 되었다. 즉,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들[* 올림포스 신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인 이후 야훼도 포함해서.]과 인간 어느 한 사이의 존재로 신격화시켰음에도 동시에 여전히 여러 공직들을 역임하는 제1의 시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뒤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인 야훼보단 아니지만 인간보다는 우월한 어떠한 존재로 규정했다. 신의 대리인이라고도 한다. 하여튼 이런식으로 신격화 작업을 거치고 그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미나투스 체제도 갖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두를 통합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로마는 자신들의 '공화정 전통'을 자랑스러워 했다. 사실상 형식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이 관념이 중세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던 덕분에 로마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뒤 그들의 문화가 서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유럽이 근대 계몽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로마의 황제는 공화정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유산이 현대 민주정 체제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로마 황제가 공직을 역임하는 형태였고, 로마의 공직은 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그 공직자가 사라지면 누구든지 취할 수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이미 한 사람이 여러 공직을 역임했고 그것을 견제할 의회였던 원로원의 권한이 줄어든 이상[* 물론 공화정기 말의 원로원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일 뿐더러, 전제군주정은 당시 기준으로 꽤나 세련된 정치체이기 때문에 군주의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현대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첨언하면, 역사에서 고대 민주정이 붕괴 된 이유는 중우 정치 때문이다. 이기적인 이가 우매한 이들을 선동하고 그 우매한 이들은 이기적인 이를 지지하며 국가와 정치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결국 아테네나 로마의 사례가 있었음에도 왕정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효율성을 생각해보면 위계적인 구조가 더욱 효율적이기도 하고. 국가가 작을 때는 여러 사람이서 의논하여 정치를 할 수 있지만 국가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각지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결국 효율성을 위해 독재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이는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뛰어났지만 보편 정서와 이익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근대 말에 가면 고대 민주정의 단점이었던 우매한 이들을 교육 시스템으로 줄여 정치 참여를 늘렸고 늘어난 정치 참여를 바탕으로 이기적인 이들을 감시하게 하여 현대 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동원령과 징병의 실시,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삶의 여유가 늘어나자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로마 황제가 호민관 권한인 신체 불가침권을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개 로마 시민을 어떠한 승인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로마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항상 가능했으며 그 수준도 군사력을 가진 집단인 로마군 중에서 1개 군단 수준으로 소수인 병력 정도만 동원하면 충분했다. 추대받는 사람도 로마 시민이고 추대하는 사람도 로마 시민이므로 원칙상으로는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로마 시민 남성은 대개 군인이고 군인은 백인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민의 지지 = 군대의 지지나 다름 없다.] 그리고 현임 로마 황제의 측근이어야 할 [[원로원]]과 로마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도 이런 구조적 약점을 활용해서 오히려 현임 로마 황제를 폐위시킬 목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새로운 로마 황제를 옹립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역사는 [[네 황제의 해]]나 [[군인 황제 시대]] 같은 여러 혼란기가 잦았다.[* 고대 국가인 로마를 근세 국가인 조선과 비교하는 것이 넌센스이지만, 당대 가장 세련되고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진 조선은 아무리 왕의 힘이 약해도 왕의 권위까지 넘보는 일이 없었다. 이는 물론 동등한 입장의 사대부 가문들 중 하나가 왕위를 찬탈하면 "너가 뭔데?"로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전주 이씨 가문을 군주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덕분에 군주의 계통이 끊겨도 어떻게든 방계를 찾아내어 안정화시켰다. 조선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권위는 인정하되, 사대부들과 협의해서 정치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중세 국가들이 마땅한 정치 철학 대신 종교를 통해 권위를 얻은 것과 다르게 조선은 엄연히 정치를 위한 철학인 유교를 국가의 사상으로 삼아서 국가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느슨한 시스템 덕분에 [[사두정치|테트라키아(사두정치)]] 같은 황제를 여럿 둔다거나 정제와 부제를 둔다는 등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로마 제국에 필요했던 조치를 수행하는 일들도 가능했다. 로마 제국이 넓고 국경선이 너무 길어서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면 긴급 조치 및 현장에서의 빠른 판단과 행동을 위해 황제급 권한을 가진 인물이 각자 로마의 국경선을 나누어서 군관구로 삼고 동시에 대응을 할 필요가 높았기 때문에 조성된 것인데 타국에서는 국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내전이 벌어지며 나라가 갈라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서 못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사두정치라는 이름 하에 상당한 기간동안 해당 제도를 유지했고 결국 내전이 벌어져서 사두정치가 해체된 후 다시 단일황제 체제로 돌아갔으나 이후에도 [[공치제]]와 같은 식으로 변형된 방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로마 황제는 주로 원로원 회의를 주재하고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프린켑스 세나투스로서의 역할, 각 속주의 군대를 지휘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 보유자로서의 권한, 호민관으로서 거부권과 신변불가침권을 보장받는 트리부나키아 포테스타스라는 이름의 특권, 로마 국가종교의 수장 역할을 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권한을 개별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아 황제로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칭 및 관직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되는 과정에서 황제 개인이 행사하는 하나의 권위 및 권한으로 묶이게 되었다지만 이는 본래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요소였으며, 따라서 로마 황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호칭이나 관직 중 일부 또는 전부를 황위 계승자나 유력한 측근들에게 부여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약간 격이 낮은 것으로 간주되어, 제위 계승 후보자 또는 때때로 몇몇 유력한 황족에게도 이 호칭이 수여되었다. 황족이 아니어도 부여된 경우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해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한 뒤,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를 장악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지리적 위치로 인한 협공을[* 삼국지에서 [[군웅할거]] 시대에 군벌들 한가운데의 하남 일대에 있었던 [[조조]]를 생각하면 얼추 맞다.] 피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해 사실상 부황제로 인정했다. 물론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알비누스는 얼마 후 급한 불을 끈 세베루스가 교전을 걸어 와 패배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보통 황제에게만 허락된 존호였으나, 현직 황제가 생존중임에도 황위 계승이 사실상 확정되어 실권을 행사하는 경우 후계자에게 아우구스투스 존호가 부여되는 경우도 때때로 있었다. 이런 경우 제국의 후계자는 [[공치제|공동 황제]]로 간주된 적도 있었다. [[사두정치]]를 통한 제국 사분할로 유명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과 동방에 각각 한 명의 아우구스투스(흔히 정제(正帝)로 불린다)와, 한 명의 카이사르(흔히 부제(副帝)로 불린다)를 두어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업무를 분담하도록 했다. 이러한 로마 황제의 다양한 칭호는 [[갈바]] 때부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형태로 합쳐져서 정착되었다. 갈바 이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후예로서 카이사르를 가문명에 가깝게 사용했다. 하지만 갈바와 그 후임인 오토는 카이사르와 혈연적 접점이 없었음에도 카이사르 칭호를 썼고, 이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이후 황제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칭호들은 처음엔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보장받은 권리를 상속받았다는 의미에서 쓰인것이다. 그래서 원로원이 어느 정도 제역할 하던 시기의 황제들은 원로원에게 이러한 권리상속을 승인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속이란 의미는 희미해지고 관직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로마 제국의 황제는 다른 황제와는 다른 특징이 많았으므로 훗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들도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는 로마 황제(Kayser-i Rum)라고 자칭했다. 물론 유럽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지만 로마 제국식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가문이 [[팔레올로고스 왕조]]에서 카이으(kayı) 부족의 족장 출신인 [[오스만 1세]]의 [[오스만 가문|왕조]]로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종교, 주류 민족, 문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으므로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