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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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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은 시대) ==== 가이우스 칼리굴라 암살은 요세푸스의 증언과 디오의 간접적 증언처럼 암살범들의 개인비리를 감추기 위해 벌인 일이자, 원로원 내 공화주의자와 암살범들의 공모로 발생한 급박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암살자들은 미리 강금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혈육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이는 암살자 중 일부가 마음을 바꿔 그를 살려준 뒤 근위대 병영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들의 계획은 꼬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처럼 현직 집정관은 황제 개인금고와 황실재산을 원로원 국고로 모조리 빼돌린 뒤, 원로원을 카파톨리오 신전에서 개회해 카이사르 가문 멸문과 후속조치를 주제로 연다. 이렇게 가이우스가 암살되고 원로원이 그 즉시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노린 상황에서, 신전 안에서는 기원전 29년 다시 공화정체가 회복되었는데 왜 다시 하냐는 반론이 쏟아지고 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위시한 황제파 젊은 원로원 의원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현직 프린켑스의 죽음에 당장 복수를 결의해라", "명백한 번역이자 공화정체에 대한 도전이다. 암살범들을 처벌하고 가이우스의 원수를 갚자"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때 가이우스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암살범 20명 외의 근위대 지휘관들은 카이레아, 루푸스 등을 병영 도착 즉시 체포한다. 그리고 클레멘스 등은 9개 대대 병력과 함께 그 즉시 황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면서, 가이우스의 암살범들을 반역법과 가족법으로 기소해 유죄선고 후 처형시커나 자결케했다. 이어 황제파 원로원 인사들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고문단 등이 병영에 집결해 "암살자들 뒤에 있는 것이 확실한 원로원을 다 쓸어버리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런 상황에서 갑론을박을 펼치며 내분만 벌어지고 있었고, 근위대에 사람을 보내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즉위 직후 병사 1인당 충성보너스 지급을 약속하고 즉시 하사한 상황에서 씨알도 먹힐 명령이 아니었고, 이 사건 후 수도경비대, 소방대까지 죄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어 같은 날 클라우디우스는 무장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을 찾아가, 조카가 억울하게 죽은 상황에서 더 이상 그의 명예를 더렵히지 말 것을 예의있게 경고한 뒤 그들을 존중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이 사건들은 가이우스 칼리굴라 피살 후 24시간도 안 되어 벌어진 타임라인이었다. 따라서 41년 유피테르 신전에서 기획된 공화정 재건 선언은 일찌감치 무산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남자혈육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자황족으로,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신체적 장애 문제로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훌륭한 인품과 비상한 머리를 알아보고 역사학과 문학, 지리, 행정, 의학, 과학 등 각분야의 인재들을 스승으로 삼게 해 군경력이 불가능한 현실에서도 로마황족으로 살아남도록 훈련시켰다. 따라서 조카 가이우스 칼리굴라 시대에야 정치경력을 시작하게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의 예상과 달리, 즉위 과정부터 놀라움을 안겼다. 실제 클라우디우스의 정치적 능력과 행정적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 뛰어났고, 이는 황제 암살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서기41년 1월 암살 정국과 정세는 금세 안정을 찾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호국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고 갈리아 북부와 벨기카 일대를 위협한 드루이드교 문제를 계기로 남부 브리타니아가 정복된다. 내부적으로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 제국의 관료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특히 전임자 가이우스 시대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이탈리아 경제 발전과 사회안정책은 꼼꼼하고 착실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궤도에 오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 내 기사계급과 갈리아,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내려 2세기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구축할 토대를 만든다. [[타키투스]]가 수록한 연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정복당한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정책 때문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결국 쇠퇴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와 달리 우리 창건자 [[로물루스]]는 창칼을 맞대었던 민족을 바로 그 날 당일에 로마인으로 귀화시켰을 정도로 현명했다'면서 원로원 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의 원로원 입성을 추진했다고 한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9p, 원문: 'the Emperor Claudius, in Tacitus' version of his speech about admitting Gauls to the senate, says: 'What else proved fatal to Lacedaemon and Athens, in spite of their power in arms, but their policy of holding the conquered aloof as alien-born? But the sagacity of our own founder Romulus was such that several times he fought and naturalized a people in the course of the same day!'] AD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저녁식사 후 급사하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사위, 양자, 외종손 네로(아헤노바르부스)가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주도의 궁중쿠데타로 즉위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이자 소 아그리피나(아내)의 친아들을 즉위시키기위한 암살로 추정된다) 네로는 즉위 초기 선정을 펼쳤고 속주들이 원만하게 통치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도 5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로마 제국 자체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네로 내각은 소년황제를 주무른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권력남용과 친모자지간인 황제와 모후의 대립으로 궁중음모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위 초에는 소 아그리파나와 그 측근 팔라스의 음모 아래, 네로의 친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친척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가 반역과 근친상간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됐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춘기의 네로는 여자문제로 어머니와 대립하더니, 친모자지간 간에 권력투쟁으로 확전된다. 그리고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네로를 궁중쿠데타로 옹립한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끼어 든다. 이때 세네카와 부루스는 네로에게 자신의 취미에 매몰되고 그 직위의 정당성이 당연하다고 조언을 들었는데 이는 미숙한 청소년 네로가 일찍부터 괴상한 악행과 상상을 넘어선 사치를 벌이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 평이 갈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네로를 둘러싼 궁중암투 속에서 피바람이 분다. 네로의 손에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로 네로의 처남이자 양형제지간인 [[브리타니쿠스]](AD 55년),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AD 56년), 네로의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AD 62년)가 모두 살해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친족들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외에는 모두 네로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고종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까지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운 뒤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다가 암살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전 로마인에게 비난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로는 쾌활하고 빵과 서커스를 적당한 시기에 제공할 줄 알았던 황제인데다, 크게 실정을 하지 않아 보인 탓에 부도덕함과 잔인함 외에는 비난거리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D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게 된다. 그는 적절하게 대화재 진압과 로마 화재복구에 힘을 쏟았지만, 실언을 하는 등 행동을 하면서 이전의 부도덕한 행동과 얽혀 방화범으로 의심받게 된다. 그런데 네로는 이때 로마 대화재 원인을 그리스도교인들의 방화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황금 궁전을 짓겠다고 발표하는 등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일을 계속 진행시켰다. 이어서 그는 피소 사건 등을 일으키는가하면 근친상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처형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등까지 피소사건 연장선에 묶어 극소수 남은 황실일가를 반역죄로 처형시키면서 제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핏줄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는 로마인들에게 “그 미덕까지 짓밞은 부도덕한 인간”으로 지탄받게 된다. 하지만 네로는 피소 사건 이후, 흉흉한 민심 속에서 도리어 그리스 순회공연을 떠났고, 그리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즉흥적으로 속주행정을 바꾸는 실정을 터트린다. 또 지나친 사치로 병사들의 월급까지 지급을 제때 못하고 속주세를 올리는 등 민심을 악화시키는 일을 계속 터뜨린다. 이 와중 그는 소아시아로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하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네로는 도리어 제대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망높은 명장 코르불로를 의심해 그를 자살권유로 자살케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네로에게 지쳐있던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결국 네로는 AD 68년 코르불로 숙청 사건을 계기로 터진 근위대가 반란과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주도의 네로 탄핵 연설 등으로 몰락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이때 빈덱스, 오토 등이 히스파니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를 비롯한 각지의 총독들을 포섭해 들고 일어났고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농간을 벌여 [[티겔리누스]]를 실각시키고 네로를 배신한다. 이어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데, 로마 사회 전체에서 완전히 고립된 네로는 자신의 실정으로 벌어진 내전의 와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으로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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