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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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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투스 시대 ====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수도인 로마 내부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와 경찰 및 소방관 역할을 하는 '비길레스(vigiles)'를 창설하였고 유사시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렇다고 영토 확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히스파니아(이베리바 반도)의 북부지역,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과 노리쿰, 도나우 강 남부의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BC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아나톨리아 반도 중부)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였고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도 병합하여 2개의 속주로 나누었다. 다만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의 게르만 족은 AD 9년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는 고전 끝에 결국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또한 동방의 강대한 영토를 보유한 파르티아 제국과는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하고 주로 외교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BC 20년에 협정을 체결하고 양 국의 완충지대로서 아르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카르하이 전투에서 빼앗은 크라수스의 군기도 되돌려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는 겉모습은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교묘하게 여러 가지 권한을 뒤섞은 것이었고, 그의 통치술은 본국과 속주, 도시와 시골, 육지와 섬에 따라 그 방식이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교묘한 형태의 1인 독재체제였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는 공화정 복구 선언 이후에도 기원전 29년도의 '로마 여신과 디비 율리우스(신격 카이사르) 봉헌' 명령 서한을 비롯한 황제 개인우상숭배와 아우구스투스 부부 및 두 양자, 조카 권한 강화 조치 등으로 인하여, 당대부터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 형태(공화정 체제) 복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그의 정적 외의 추종자들까지 '밀실정치', '족벌주의 연합의 전통 공화정을 가장한 실질적인 왕정' 등을 끊임없이 주장하거나 의심했다. 더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와 각종 명예들이 옛 공화정 체제의 전통 아래 이뤄진 합법적 틀 속에서 진행됐다는 것에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지위는 명확한 법적인 지위보다는, '로마 공화국 수호자',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과 같은 개인의 명성과 영예 그리고 내전 과정에서 얻게 된 군사적 기반과 병사들의 충성심에 사실상 기반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명확한 원칙도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그 명분 역시 상당히 애매했다. 더 큰 문제는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는 후계자로 삼을 친아들이 없음에도, 그가 꾸준히 자신의 지위를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는 친혈육'에게 물려주고자 한 개인적 열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의 로마귀족들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 즉 조카나 외손자 등을 양자 또는 사위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후계구도를 짠다. 그 첫 번째 후보가 바로 친누나 소(小) 옥타비아의 아들로 자신의 유일한 남자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소년이었다. 마르켈루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신분은 [[플레브스]](평민)이지만 씨족 전체에서도 공화정 후기를 주름잡은 씨족 내 지파 마르켈루스 가문 태생으로,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친아들(티베리우스, 드루수스)과는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면서 먼 친척이고 어린 나이부터 [[동고동락]]한 친구 사이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지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조카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시켜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BC 23년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충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장군에게 율리아를 시집보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지위를 물려주려고 계획을 바꾼다. 이때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자신을 지지해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리고 옛 안토니우스파까지 배려하고자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두 양자 중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던 [[대 드루수스]]를 그 후계자로 생각해, 아그리파가 호민관 특권을 선사받기 전부터 꾸준히 이를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측근들에게 언질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아그리파는 외손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급사했고 정식양자로 입적시킬 계획을 착실히 세워둔 누나의 사위,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사고로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고령인데다 평소 골골대는 약골이라서 크게 절망한다. 더 큰 문제는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 태어난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는 각각 AD 4년과 AD 2년에 차례로 요절한데다,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부부 사이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까지 지위를 물려받기에 너무 어렸다는 현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일단 게르마니아 전쟁을 이끌고 있던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소환해, 그를 외동딸 율리아의 새남편으로 결혼시켰다. 하지만 율리아의 끝없는 방종과 고부갈등,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릴루스가 요절한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견디다 못한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특권 등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로도스 섬]]으로 떠난다. 이 기간은 무려 7년이었는데, 그 사이 두 외손자가 연이어 요절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다행히 티베리우스가 아들의 성년식을 핑계로 로마로 복귀하게 되면서, 후계 문제는 일단락되게 되는데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남자혈족 중 가장 후순위로 결정한,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후계자로 삼았다는 것이 일관된 평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 중 한명으로, 불과 12살의 나이부터 동갑내기 친척 마르켈루스와 그 후계수업을 받아온 준비된 후계자였다. 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는 의붓남매이면서도 부부였으며, 요절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실질적 후원자이자 계부이며 외삼촌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남에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 아니었고, 성격 역시 폐쇄적인데다 인기가 진짜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고령이었고,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이자 누나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는 이제야 성년식을 마친 갓 18살의 소년이었다. AD 4년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회의를 열고 오랜 이야기 끝에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하고 그에게 자신의 지위와 가문 전체를 물려주기로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아들 [[소 드루수스]]와 나란히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하면서, 카이사르의 성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차차기 후계자로 못박으며 두 친혈육까지 자신의 가문에 공식 입양시키며 실질적인 후계자는 자신의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임을 분명히 한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며, 로도스 은퇴 전의 모든 지위에서 복귀했다. 이후 AD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절대지휘권과 종신 호민관 특권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인구조사 등을 부자의 이름으로 진행해, 제국 전역에 세습을 사실상 공포한다. 이렇게 후계문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신격화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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