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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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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혁명 === [youtube(j370etF_OGU)]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Red_Guard_Vulkan_factory.jpg|width=400]] || || 적위대의 모습 ||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반란 와중 제2차 연립정부는 와해되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9월 14일(9월 1일) 5명의 각료로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 양보를 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 내의 정치투쟁 중지 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카데츠가 참가하는 새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10월 8일(9월 25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다시 카데츠와 멘셰비키 우파, 사회혁명당의[* 좌익 사회혁명당을 제외한 사회혁명당 주류 및 민중사회주의 분파] 지지를 얻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고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10월 초,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10월 23일(10월 10일)과 10월 29일(10월 16일)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초기에는 모든 중앙위원들이 반대했으나 레닌의 설득에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제외하고 찬성표를 던진다. 둘은 혁명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해 임시정부에 쿠데타 계획을 누설한다. 레닌이 국외망명을 잠시 갔을 때 볼셰비키를 임시적으로 이끌던 [[스탈린]]은 당초 봉기반대파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레닌의 입장이 신속한 봉기라는 것이 확인되자 입장을 급격하게 바꿔 무장봉기를 지지한다.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파를 억눌렀다. 10월 25일(10월 1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다. 이제 봉기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반혁명파의 거점은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중심부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겨울궁전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총사령부와 해군성이 있었다. 혁명파의 사령부는 시의 동쪽 변두리의 귀족 여학교인 '스몰니 학원'이었다. 이곳에는 군사혁명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볼셰비키 당중앙이 있었다. 혁명파의 주력부대는 셋이었다. 적위대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시의 중심부를 포위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파 부대는 그 안쪽에서 제2의 반원을 형성했다. 서쪽에서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요청으로 발트해 함대가 네바강 하구를 장악했다. 혁명파의 노동자와 육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해 차단했다가 일시에 공력, 점령할 계획이었다.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는 혁명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 앞에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역사가 빗자루로 쓸어내 주기를 바라는 무력하고 가엾은 정부가 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행해진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Lenin-Trotsky_1920-05-20_Sverdlov_Square_%28original%29.jpg|width=400]] || ||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 11월 6일(10월 24일) 밤,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즉각 행동이 개시되었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7일(25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다. 마침내 8일(26일) 새벽 2시,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다. 7일(25일) 밤,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볼셰비키에 의해 개최되었다. 볼셰비키를 제외한 나머지 당파들은 볼셰비키가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며 반발했는데 이들의 선두에 있던 마르토프는 임시정부 퇴진을 통합 합법적 정권이양을 주장했고 볼셰비키 위원들도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개입하며 중간파 사회주의자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결국 중간파, 타협파, 자유주의자 위원들은 표결을 거부하고 회의장을 나갔다.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원들만 남은 소비에트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11월 8일(10월 26일)에는 <평화에 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가 발표되어 즉시강화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했다. 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레닌이 인민위원장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중앙집행위장에는 스베르들로프가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세계 최초의 공인된 노동자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레닌은 연설을 통해 혁명의 성공을 기념했다.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https://youtu.be/XRLrv2Y54RQ?t=24s|정의]] 10월 혁명 자체로 [[모스크바]]를 제외하고 혁명은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고 막을 내렸다. 실제로 당시의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는 조용했으며, 겨울 궁전 등의 정부 시설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혁명 자체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다.[* 실제 혁명 당시에 죽은 사람보다 당시 상황을 그린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대작영화 [[10월]] 촬영 시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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