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러시아 제국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교육 == ||<tablewidth=100%><width=47.6%><nopad> [[파일:state-university.jpg|width=100%]] ||<nopad> [[파일:640px-Московский_Императорский_университет.jpg|width=100%]] || ||<rowbgcolor=#FFCD01,#FFCD01>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교'''[*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전신.] || '''모스크바 제국대학교'''[* 현재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전신.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교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현 국립대학교로 계승된 것과는 달리 모스크바 제국대학교의 건물들은 본관을 포함해 상당수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스탈린]] 시대의 웅장한 사회주의풍 건물들이 지어졌다.] || 전근대 유럽 국가들이 문맹률이 높긴 했지만 러시아는 그중에서도 특히 처참한 수준이었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들어서 문맹률이 어느 정도 개선되긴 했으나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문맹률이 높은 나라들 중 하나였다. '''1800년 경 러시아 남성의 문해율은 1~12%'''에 그쳤고, 그나마 교육을 받은 도시민 남성들조차 20~25% 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남자들보다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못한 여성들은 문해율이 그보다도 낮았다. 신분이 높을 수록 문해율이 높아서, 귀족들은 84~87%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상인들의 문해율은 75%가 넘어갔다. 농노들은 한 자릿수 대의 처참한 문해율을 보였으며 여자들은 모든 계급에서 남자들에 비해 문해율이 낮았다. '''동시대 서유럽의 문해율이 50%가 넘어갔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비참한 수준이었다. 농노들을 가르쳐야 할 정교회는 문학을 포함해 교육이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고 여겨 전혀 좋게 보지 않았다. 농노들은 글을 배우지 못했고 예술가, 사업가, 교수 등 지식인의 비율은 대단히 낮았다. 1851년 기준 전체 러시아인의 8%만이 도시에 거주했다. 1801년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하면서 유럽의 [[계몽주의]]와 진보적인 개혁 정책들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황제가 약속한 수많은 개혁 정책들은 상당수가 이뤄지지 않았고 1820년 이후부터는 황제가 외교와 신앙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개혁은 더더욱 요원해지고야 말았다.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의 관료제는 빈약하기 짝이 없던 수준이라, 그 넓은 제국에 공무원의 숫자가 고작 17,000명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몰려있었다. 이 숫자는 전국민에게 효율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턱도 없는 수치였고, 대부분의 젊은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군대와 정교회는 독자적인 교육 기관이 있었으나 자기 영역에만 특화된 대단히 좁은 지식만을 가르쳤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1세]]가 전국적인 교육 시스템을 창설한 것이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Zemskaya_shkola.jpg|width=100%]] || ||<rowbgcolor=#FFCD01,#FFCD01> '''1900년 러시아 제국의 초등학교 모습''' ||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1802년에 처음으로 교육부가 창설됐고 전국을 6개의 교육관구로 나누었다. 장기적인 계획은 모든 교육관구에 1개씩 대학을 세우고, 모든 주요 도시들에 1개씩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초등학교들을 확장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교구 2개마다 1개씩 교구학교를 세워서 최대한 많은 수의 학생들을 수용케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825년 기준 러시아에는 총 6개의 대학과 48개의 고등교육기관, 337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정부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도망쳐온 교사들을 데려와 고용했고, 서유럽에서 탄압받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채용했다. 가장 중요한 대학은 [[프로이센 왕국]]을 따랐다. [[카잔]], [[하르키우|하르코프]], [[상트페테르부르크]], [[빌뉴스|빌나]], [[타르투|도르파트]], [[모스크바]]에 6개의 대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학 과정은 오직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최고급 교육이었고, 1825년 러시아 전역의 대학생은 고작 수 백명에 불과했다. 고등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고작 5,5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대학 진학이 아예 금지되었으며 대부분의 귀족과 엘리트층들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보다 개인 가정 교사를 고용해서 교육시켰다. 러시아 제국 대학의 질과 학문적 수준은 동시대 서유럽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었으며 그 규모도 훨씬 작았다. [[니콜라이 1세]]는 외국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가짜 지식'이라 조롱하며 러시아를 어지럽힌다고 여겼던 극한의 반동주의자였다. 하지만 그 아래의 교육부 장관인 세르게이 우바로프는 반대로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유를 더더욱 장려하고 종교계의 의심을 받던 교수진들을 대폭 밀어주었다. 우바로프는 러시아 학문의 질을 높이고 시설을 개선했으며 대학 입학의 문을 더 넓혔다. 니콜라이 1세는 1848년까지 우바로프의 소위 '진보적' 개혁을 용인했으나 이후 뒤집어버렸다. 러시아는 이후 1800년대 중후반 내내 대학 교육에만 집중했고, 초등과 중등 교육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무시했다. 1900년까지 총 17,000명의 대학생들이 배출됐고 30,000명 이상이 전문 교육기관에 등록했다. 우수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위와 혁명의 최전선을 맡았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