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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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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depiction-of-russia-on-political-cartoon-maps-from-xix-v0-k7sm32cbclmb1.webp|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당시의 풍자화''' || 러시아 제국의 첫 라이벌은 바로 [[스웨덴]]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는 같은 [[바이킹]] 출신 국가로서 뿌리도 같았으나 [[러시아-스웨덴 관계|북방의 패자 자리를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1600년부터 1721년까지 [[러시아/역사|러시아의 역사]]는 [[발트해]] 인근을 장악하려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 전쟁의 역사였다. 당시 스웨덴은 [[스웨덴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성한 국가로서, 러시아보다 수적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군대를 바탕으로 161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잉그리아 전쟁에서 승리, 1617년에 맺은 스톨보보 조약으로 러시아를 발트해에서 배제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700년 [[대북방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작센 선제후국]]과 [[러시아 제국]]은 동맹을 맺고 스웨덴의 젊은 왕 [[칼 1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스웨덴을 공격했다. 이 것이 바로 대북방전쟁의 시작이다.] [[칼 12세]]가 모든 적 동맹군들을 꺾어버리고 1700년 [[나르바 전투]]에서 3배나 많은 러시아군을 패배시켰을 정도. 하지만 1709년 칼 12세가 [[폴타바 전투]]에서 대패하며 스웨덴의 우위는 끝났다. 러시아는 이 전투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북방의 패권국으로 떠올랐으며 스웨덴은 그 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 스웨덴과 러시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1788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국내 정치 갈등 봉합을 위해 러시아 제국군 상당수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된 틈을 타 선전포고를 날렸으나 곧 교착상태에 빠진 채 2년만에 휴전을 맺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이 [[틸지트 조약]]과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 협력하려 하자, 틸지트 조약의 당사자였던 러시아가 발끈해 선전포고한 뒤 몇 주만에 승리해 [[핀란드 대공국|핀란드]]를 뜯어갔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웨덴령 [[포메른]]을 침공하자 스웨덴도 러시아와 화해해 함께 프랑스에 맞섰다. 러시아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스웨덴의 노르웨이 지배]]를 인정했고 나폴레옹 패망 이후부터는 그 어떠한 전쟁도 없었다. 프랑스와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러시아는 북유럽, 동유럽에서 놀았고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놀았기 때문. [[표트르 1세]]가 [[파리(프랑스)|파리]]를 방문해 [[프랑스/문화|프랑스 문화]]를 수입한 이래로, 간접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있어도[* 프랑스와 러시아는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반대편에 싸웠으며 1756년 [[7년 전쟁]] 때는 함께 [[프로이센 왕국]]과 맞서 싸웠다.]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단순히 서유럽을 넘어 전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던 나폴레옹이 동쪽으로 진군하며 러시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러시아는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했고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을 굴복시키며 엄청난 패배를 안겼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패망 이후에 보수주의와 [[반동주의]]를 주창했지만 정작 프랑스는 러시아의 팽창주의, '타타르적'인 문화를 경멸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에 맞서 싸운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친독 성향을 유지했고 공화주의 프랑스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는데 1890년대에 프랑스가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에 먼저 손을 내밀며 관계가 호전된다.[* 러시아 역시 1890년대 들어서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1890년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뒤 독러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하자,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당했고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을 견제할 수단이 필요해졌다. 한편 [[교황]] [[레오 13세]] 역시 독일의 반가톨릭주의에 분노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독일의 대항마 삼아 하나로 묶으려 들었고 이 모든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호전된 것이다.] 물론 중간에 약간씩 마찰이 있긴 했지만[* [[보스니아 합병]] 당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에 맞서 러시아를 지원해주기를 거부하자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파탄 직전까지 갔다. [[니콜라이 2세]]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동맹 파기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대안이 없어서 못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프랑스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했다.[* 프랑스 투자자들은 1913년까지 러시아에 130억 프랑이라는 거금을 투자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가장 큰 투자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는 프랑스의 자본 덕이 컸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러시아는 프랑스와 함께 [[협상국]] 편에 섰다.] [[독일어권]]과의 관계는 협력과 견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는 관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완충지대가 있을 때는 따뜻하기 그지없는 관계였으나 서로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게 되면 자연스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변환되고 20년 뒤 러시아 제국이 선포되면서 두 국가 사이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7년 전쟁]]으로 서로 전쟁을 벌였으나 유명한 [[독빠]]였던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에 퍼주다시피하는 평화조약을 맺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국왕]]이 처형당하자 기겁해서 서로 손을 맞잡고 프랑스와 싸우기도 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등장하자 처음에는 [[3제 동맹]]을 맺고 독러 재보장조약을 체결하는 등 처음에는 좋은 관계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890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쫒아내고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 러시아의 산업화에 강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적성국가로 돌아섰다. 결국 러시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맞붙었다. 또다른 독일어권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는 초기에는 협력적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양국 감정은 악화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한편으로 싸웠고 [[오스만 제국]]을 공동의 적으로 두었으며 사이좋게 [[폴란드 분할|폴란드를 갈라먹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반동주의]]의 기치 아래 하나되어 [[빈 체제]]의 가장 열성적인 수호국이었다. [[1848년 혁명]] 당시 [[헝가리인]]이 [[1848년 헝가리 혁명|무력 독립 봉기]]를 일으키자 20만에 달하는 러시아 제국군을 파견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회복시켜준 것도 러시아였다. 하지만 [[크림 전쟁]] 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 중립을 취하면서 관계가 크게 훼손됐다.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포기하자 [[니콜라이 1세]]는 격분했다.[* 러시아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나중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꺾고 독일의 패자가 되는 데에도 러시아의 방관이 큰 역할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자국 내 [[슬라브]]인을 선동하는 위협이라 여겼고[* 실제로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등 오스트리아 제국의 슬라브인은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제창하며 러시아가 주장하는 [[범슬라브주의]]를 경계했다.] [[3제 동맹]], 189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 등 사건에도 여전히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보스니아 합병|합병]]해버리며 [[베를린 조약]]을 깨버리자 당황한 러시아와 관계회복은 더더욱 요원해졌다. 결국 러시아가 한 발 물러나긴 했지만 두 제국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안 좋아졌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세계대전에서 반대편에서 싸웠고 둘다 망할 때까지 적대관계였다.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그레이트게임당시 풍자화.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아프가니스탄 왕국|{{{#000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싸우는 영국과 러시아의 풍자화''' || [[그레이트 게임]]으로도 유명한 영국과의 관계는 왔다갔다했지만 대체적으로 적대적이었다. 1700년대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같은 편, [[7년 전쟁]]에서는 반대 편에서 싸웠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 등 동맹과 견제를 반복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1780년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크림반도]]에서 세를 키우자 위기감을 느낀 [[윌리엄 피트(1759)|소(小) 윌리엄 피트]]가 이를 막기 위해 견제에 들어갔다. 물론 러시아의 여론공작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감은 부쩍 높아졌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힘을 합쳐 공화주의를 견제했지만,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1820년부터는 다시 적대국이 되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남하해 [[페르시아]]를 집어삼키고 [[인도 제국]]에 찝적대지 않을까 불안해했고 1800년대 내내 [[그레이트 게임]]을 벌여 전세계에서 경쟁했다. 영국은 필사적으로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막았고 꾸준히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크림 전쟁]]에서도 러시아를 견제했다. 극동에서도 긴장은 여전했지만 그 정도는 훨씬 순해서 특히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일본]] 견제, [[의화단 운동]] 등 한마음한뜻으로 같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뜯어먹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러시아 제국 관계]] 문서 참조.] 현재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과는 러시아가 오스만을 일방적으로 뜯어먹는 관계였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가 지나 서서히 시름시름하고 있었고, 반대로 1700년대 건국된 러시아는 오스만의 영토인 [[발칸반도]]와 [[흑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싶었기에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러시아는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내에 영향력 행사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오스만 제국을 분할해 갈라먹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이 사라진 틈을 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를 제치고 세력을 확장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였다.] 반오스만 감정이 날로 득세하며 나중에는 오스만을 아예 잡아먹으려 들었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배를 갈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한 뒤 [[흑해]]와 [[지중해]]까지 자유로운 통행을 확보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이자 목표였을 정도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힘을 빼기 위해 1910년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공국]] 등의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1914년에는 이탈리아가 오스만에게 [[트리폴리]]를 빼앗아가는 것을 도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충돌했다. 두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셈이다.[*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던 러시아 입장에서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명분상으로도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며 옛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끝까지 수복하려 들었다.] 동양의 패권국 [[중국]]과는 이미 1600년대부터 관계를 맺었다. 1654년에 러시아가 표도르 바이코프를 [[청나라]]에 첫 대사를 파견하며 본격적인 외교전의 시작을 알렸고[* 다만 표도르 바이코프가 중국식 외교관례를 따르길 거부하면서 실제로 황제를 알현하지는 못했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1729년 [[캬흐타 조약]]을 맺으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1750년대 청나라가 [[준가르]]를 합병한 이래로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직접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고, 다른 유럽 열강들과는 달리 동등한 황제의 자격으로 청나라와 외교전을 펼쳤다. 타 유럽 국가들이 군주 대 군주 방식으로 청나라와 외교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영토를 맞댄 러시아는 청나라 이번원이 따로 관리하는 특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부터는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점차 영토를 빼앗아가기 시작했고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을 연달아 맺으며 [[만주]]와 [[연해주]]를 뺏었고 [[야쿱 벡]]이 위구르를 휘저을 때 [[일리강]] 유역을 빼앗아먹었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중재하며 중국으로부터 이권 약탈을 계속했고 1900년 [[의화단 운동]] 때도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베이징]]을 약탈하는 등 1917년까지 청나라를 저금통 취급하며 계속 털어먹었다.[* 자세한 내용은 [[청러관계]] 문서 참조.] 그 외 나라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일본 제국]]과는 1855년 처음 국교를 수립, 1890년대 초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충돌해 [[러일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05년부터 1917년까지는 같이 만주와 외몽골을 분할해 가져가면서 나름 관계를 회복했다.[*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 관계]] 문서 참조.] [[미국]]과는 우호적인 사이였다. 러시아 정부는 1803년 미국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문화교류를 통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1867년 [[알래스카 조약]]을 맺어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도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러시아 제국 편을 들었다. [[한국]]과는 1884년 처음 국교를 맺었고 1896년 [[고종(조선)|고종]]이 [[아관파천]]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지만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 대한국 영향력은 0에 수렴했다.[* 자세한 내용은 [[조러관계]]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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