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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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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알렉산드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니콜라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Reading_of_the_Manifest_(Liberation_of_peasants)_-_Kustodiev,_1907.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러시아 경제 근대화의 변곡점이 된 농노 해방령''' ||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2월 전국 45개 지역에 농노 해방령을 발표해 4천만에 달하는 [[농노]]를 해방시켰다. 이전까지 소규모 사업체들의 발전이 농노제의 존재로 인해 꽉 막혀있었다면, 1861년에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사업가들에게도 새로운 발전의 길이 열렸다. 농민들에 대한 지주의 권리들이 폐지됐고 농민들은 신변의 자유를 얻었다.[* 이 해방령으로 인해 옛 농노들은 이제 재산을 소유하고, 무역과 공업에 종사하고, 지주의 동의 없이도 결혼을 할 수 있었고 법적 청구도 가능했으며 지방선거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농노들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작지를 할당받았는데, 부작용을 막기 위해 9년 후에야 처분이 가능하도록 규제했다. 정부는 토지를 할당하는 대신 토지 상환금을 부과했는데 토지 상환금을 지주에게 완납하기 전까지는 임시로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거나 부역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농노들은 법적으로 그 의무와 권리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농노와는 다른 존재였으며, 2년 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863년부터 본격적인 해방이 시작됐다. 나중에 조율을 거치는 과정에서 처음 제안된 개혁안보다는 약간 후퇴했다. 해방 농노들에게 할당되었던 토지는 면적이 줄어들었고 그 손해분은 대신 더 낮은 이윤의 벌목권으로 메꿔줬다. 만일 농노들에게 주어질 할당지의 면적이 더 늘어나는 경우라면 지주 입맛대로 잉여분을 깎을 수도 있었다. 특히 비옥한 러시아 중부 [[흑토]]지 일대는 유난히 삭감되는 정도가 심했다. 농노들이 지급받은 토지의 면적은 으레 한 가정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작았고 여자 농노들은 아예 토지 할당 대상으로도 선정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전까지는 농노들이 자유롭게 쓰던 목초지와 산림이 모조리 지주의 소유로 인정되어버리며 앞으로는 돈을 내고 이용해야만 했다. 농노와 지주 계급 사이의 갈등은 날로 커져갔다. 해방 농노들은 상환금을 갚아나가며 자기 소유의 토지를 구매했다. 토지 상환금의 20%는 지주에게 내고 나머지 80%는 정부에게 지불했다. 농노들은 토지를 대신 구매해준 정부에게 49년 만기 6% 이자로 돈을 납부해야만 했다. 이 상환금에는 단순 토지의 가격 뿐만 아니라 지주가 손해본 농노의 노동력 값까지 책정되어 있어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농노들은 이 상환금을 갚느라 상당한 고통을 겪었고 정부가 상환금 명목으로 거둬들인 세금은 무려 20억 루블에 달했다. 사실상 정부가 국민들의 돈을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861년의 개혁 이후에도 귀족들은 여전히 세금이 대부분 면제됐다. 1880년대까지 정부가 거둬들인 직접세 중 17분의 16이 빈곤한 농노들에게서 뜯어낸 것이었다. 나머지 귀족과 성직자 계급, 시민 계급을 모두 합쳐도 17분의 1밖에 안됐다는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과는 달리 러시아 정부는 결과적으로 토지개혁에 단 한 루블도 투자하지 않은 채 상환 작업을 국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었다. 지주의 부채는 고스란히 새로 해방된 농노들의 어깨로 옮겨갔다.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러시아의 귀족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됐고 기존 엘리트층이던 귀족들이 [[부르주아]]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주와 귀족들의 자본력이 강해질 수록 농노들이 건실한 자영농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러시아식의 농업 자본주의는 서유럽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봉건주의 잔재들이 저렴하고 관리가 편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표트르 스톨리핀]]이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1903년부터 개혁을 추진하면서 상당히 개선된다. 1906년 농민은행이 막대한 토지를 구매해 모두 농민들에게 싸게 팔았다. 그 결과 1916년까지 전체 토지의 90%가 농민 소유가 되었다.[* 다만 자영농들의 농장은 지주 농장에 비해 효율이 낮았고, [[기근]]이 닥치자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식량을 부랴부랴 수입해오는 등 부작용이 있기도 했다.] 농민들의 삶은 나아졌고 1913년 농민들의 소득은 1900년 대비 1.5배 증가했다.[* 22루블에서 33루블로 증가. 물론 가장 극단적인 추정치이며 일부 2차 소득과 비밀 암거래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농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동력이 죄다 지주의 사슬 아래 묶여있는 바람에 산업화에 필수적인 '자유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산업화를 하고 싶어도 고용할 노동자가 없으니 하지 못했고, 산업은 정체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농업도 후진적인 농노제에 묶여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 이후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급경제가 화폐경제로 전환되며 특히 중부 흑토 지대의 귀족들이 시대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농노제에 익숙해 경제적 지식도, 축적한 자본도, 숙련된 노동력도 없는 수많은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공식적으로 파산을 신청해 부채를 탕감받거나, 부양비를 받고 평민 자녀를 양자로 입적하는 등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막대한 수의 자유 노동자들이 시장에 풀렸다. 약 400만 명의 해방 농노들이 즉시 시장으로 나와 떠돌며 임금 노동자로 변했지만, 점진적으로 더 많은 수의 농노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서서히 전환됐다. 1880년대 초반에 이미 러시아에는 상당히 탄탄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어 무려 그 수가 735만 명에 달했다. 농노 해방령을 발표한 직후인 1861년부터 1900년까지 노동자 계급은 320만 명에서 1,400만 명으로 증가해 무려 4.4배나 증가했다. 동시기 국가 전체 인구는 7,000만 명에서 1억 3,290만 명으로 약 90% 정도 급격히 증가했다. 러시아 정부와 지주들은 평민들을 쥐어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토지 상환금을 이용해 지주는 30년 동안 총 20억 루블을 받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으로 막대한 외국 자본이 몰려왔다. 1860년대부터는 철도 건설로, 70년대부터는 산업 붐이 일어나며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 것. 1861년부터 1881년까지 19,000km가 넘는 철도망이 구축됐고 남부의 공장에서는 이전까지는 해외 수입에 의존했던 레일과 철도 장비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부의 [[도네츠크]] 석탄 분지의 성장이 눈부셨다고. [[캅카스|코카서스]]에서는 [[바쿠]]의 유전이 크게 발전해 귀중한 [[석유]] 자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내 수공업이 직물 공장으로 대체되어 직물 생산량은 3배로 뛰었고 [[자본주의]]는 산골벽지까지 침투했다. 지주들은 점차 자본가로 진화했고 부유한 해방농노들은 '쿨라크'라는 엘리트 계급을 형성했다.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bf670754-d4dd-45a3-a46c-8f42b5ac1eff_3011x1709.pn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독일, 프랑스와 비교한 러시아의 PPP 기준 경제 규모''' || 러시아는 당대 세계에 발맞추어 빠른 속도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저렴한 생산과 향상된 제품 품질에 대한 요구가 날로 높아지자 정부는 기술 교육 기관을 세웠다. 산업의 성공과 더불어 국내 무역이 발전했으며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국내 상품 거래 규모가 무려 최소 40억 루블에 달했다. 1857년 해외 무역 총거래액은 약 3억 루블 정도로 1867년까지 그 수준으로 유지하다가 1878년에는 수출 6억 1,800만 루블, 수입 5억 9,500만 루블을 달성하며 총합 12억 1,360만 루블로 껑충 뛰었다. 1855년까지만 해도 4,100만 루블 이상의 자본을 가진 회사는 러시아 전체를 뒤져도 고작 50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이 되자 506개에 달하는 무역, 은행, 보험, 선박, 철도 주식회사들이 대거 등장해 융자금 8억 6,250만 루블, 자본금 12억 7,130만 루블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다. 자본가와 회사 뿐만 아니라 도시와 인프라도 그와 발맞추어 성장했다. 도시 전체의 배치가 유럽식으로 깔끔해졌고, 새로운 건물들이 줄줄이 올라갔으며 거리도 직선화하고 가로수를 심는 등 본격적인 근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861년 전까지는 [[모스크바]], [[사라토프]], [[빌뉴스|빌나]], [[스타브로폴]], [[토르조크]]를 제외하면 변변찮은 상수도 시스템마저도 없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모든 대도시에 체계적인 수도 시스템이 설치됐다. 1879년부터는 모든 러시아 도시들에 전기가 공급되어 거리에 빛을 밝혔고, 1882년에는 도시 건물에 전화기가 등장했다. 한창 뻗어나가는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에 올라탄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처럼 1873년 ~ 1877년에 경제위기를 겪었고, 80년대 후반에 장기불황을 거쳤으며 90년대에 급격한 산업 호황을 누렸다. 1800년대의 마지막 10년 동안 러시아의 산업 생산은 2배로 증가했고 동시기 독일은 62%, 미국은 38%, 영국은 27% 증가했다. 물론 애초에 러시아의 경제력이 이들과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으나 그래도 크게 발전한 것은 확실했던 셈. 1897년 노동법이 도입된 후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기타 열강의 노동자들보다는 가난했으나 상대적으로 생활 조건은 나은 편이었다. 전반적인 강도는 당대 기준으로 낮은 편이었고 러시아는 노동법이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였다.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은 감소했으나 노동자 당 생산성 성장률은 연 1.6%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꾸준히 성장했다. 1913년 러시아 노동자의 하루 노동 시간은 10시간 미만이었고 1894년부터 1913년까지 급여는 1.5배 증가했다. ||<tablewidth=100%><width=49%><nopad> [[파일:1860-1.jpg|width=100%]] ||<nopad> [[파일:oil-refinery-baku-ad9beb-640.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러시아 제국 중앙은행'''[*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경제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다.] ||<bgcolor=#FFCD01,#FFCD01> '''[[바쿠|{{{#000 바쿠}}}]]의 유전 지대''' || 1860년에 러시아는 무역을 활성화하고 금융 산업을 강화한다는 의미로 '러시아 제국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국가의 대표적인 신용기관이자 만성적인 예산 적자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중앙은행이 설립되고 난 이후 정부는 어려움 없이 원하는 만큼 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1883년에는 직접세 개혁이 일어나 [[인두세]]가 완전히 폐지됐고, 대신 다른 세금을 새로 도입했다. 간접세 역시 늘려 예산 적자를 충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노제 폐지로 인한 개혁은 매우 성공적인 편이어서 1855년부터 15년 간 공장 산업의 매출은 3배 이상 증가했고 해외 무역액은 4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개혁 덕분에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 특히 농노 해방령은 사업가와 공장주들에게는 단비와 같았다. 극초기에는 공장에 예속된 농노들이 해방되어 대거 탈출, 잠시간 공장 운영이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특히 대규모의 농노들을 소유하고 부려먹은 철근 공장과 직물 공장들이 이런 경우가 심했다.]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공장주들은 대규모로 자유 인력들을 고용해 써먹을 수 있었다. 정부의 지속적인 개혁으로 자본가들에게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렸다. 철도 건설의 시작으로 단시간에 중공업이 급성장했고 주식회사가 출현했다. 1890년대 들어서는 타 유럽 국가들처럼 제대로 된,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과 기업가들이 등장했고 20세기 초에는 전체 사업체의 3분의 2가 주식회사나 집단운영 체제였다. 면화 산업, 무역 및 금융업에서 가장 많은 수익이 나왔고 점차 기업의 독점이 나타났다. 농노 해방령은 봉건 농노제를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관계로 변모시켰고 여러 대규모 산업들이 나타나고 발전했다. 철도망이 확대되며 자본주의와 근대적 금융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퍼진 것은 덤이었다.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600년대 후반부터 174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하여 북유럽과 서유럽의 가장 발달한 국가들과도 견줄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1740년대 이후부터는 쇠퇴하고 말았다. 1700년대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폴란드]]에 비해서는 높았으나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40~70%에 불과했다.''' 1860년 러시아의 1인당 소득은 [[일본]]과 비슷했고 미국, 영국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며 [[청나라]]나 [[인도 제국|인도]]의 2배 정도였다. 분명 세계적으로 봤을 때 낮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열강들 중에서는 가장 뒤떨어지는 정도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1인당 소득은 한동안 정체되어 있다가, 1890년대가 돼서야 다시 꾸준히 경제 성장이 일어났다. 다만 미국과 영국 등이 워낙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20세기 초에는 미영에 비해서는 더욱 뒤쳐졌고, 일본과는 경제 성장률이 비슷했으며 [[브라질]], [[중국]], [[인도]]보다는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 국가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 이전까지 농업이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무려 1897년 인구조사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인구의 95%가 시골에 살았다.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르 3세]]는 연이은 개혁으로 러시아의 경제를 개혁하려 애썼다. 1883년에 러시아 농민은행이 창립되어 농노들에게 대출을 해주는가 하면 2년 후에는 귀족은행도 따로 만들어져 법정이자율로 대출을 해주었다. 인두세는 1886년 폐지됐다. 그해 재무장관으로 취임한 이반 비슈네그라드스키는 토지세를 인상하고 곡물 수확법을 규제해 농민들에게 압력을 가했는데, 이 정책이 1891년의 흉작과 겹치면서 무려 40만 명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1892년 [[세르게이 비테]]로 교체됐고 비테는 알코올 독점으로 1894년에만 3억 루블을 벌여들였다. 이러한 정책들로 농민들은 농노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쥐어짜이는 신세였다. 다만 토지와 시설, 가축을 소유한 부농 계급 '쿨라크'가 등장해 1900년에는 전체 인구의 10~20% 정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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