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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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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제국 해군|해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러시아 제국 해군)]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1024px-Смотр_Черноморского_флота_в_1849_году.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1849년 흑해 함대 시찰''' ||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аторский флoт. 1696년 제2차 아조프 전역 당시 설립된 [[루스 차르국]] 해군을 전신으로 1917년 [[2월 혁명]]으로 해체될 때까지 러시아의 해군 역할을 맡았다. [[표트르 1세]]가 근대적인 해군으로 대규모 개편 확대한 이후 1700년대 전반을 거치며 점점 커져갔고 1800년대 초중반에 가장 강력한 위용을 뽐냈다. 규모로만 보면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을 이은 유럽 3위의 규모였다. 그러나 이후 제국 자체의 성장이 둔화되며 위기를 맞았고, [[니콜라이 2세]] 시기에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시 부활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태평양함대|태평양 함대]]가 전멸하는 굴욕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당시 러시아 해군은 [[흑해]]는 꽉 잡아두고 있었으나 [[발트해]]는 완전히 독일에게 내주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장교들은 황제파로, 선원들은 세력이 나뉘어 서로 싸웠고, 결국 1918년 [[소련 해군]]에게 대부분의 전함이 넘어갔다. 러시아 해군은 크게 2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부동항]]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해로 개방된 접근이 쉽지 않았다는 것.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발트해 항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러시아는 흑해 연안, 그리고 [[무르만스크]]에 항구를 건설해야만 했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 해군에도 심각한 골칫거리라 러시아 해군은 세계에서 쇄빙선을 가장 많이 운용하는 해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트해의 상대적으로 강력한 [[발트함대]]조차도 인근 [[덴마크]], [[독일]] 등의 견제로 [[대서양]]으로 자유롭게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큰 제약이 걸려 있었다. [[흑해함대]] 역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틀어막혀 [[지중해]]로 나가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러시아 해군은 [[발트함대]], [[흑해함대]], [[러시아 태평양함대|극동함대]], 북극함대 등 상대적으로 고립된 해군 집단들을 따로따로 키워야만 했다. 현대 러시아 해군의 시조는 [[표트르 1세]]다. 1696년 [[아조프|아자크]] 원정 당시 표트르는 [[보로네시강]]에서 건조한 군함 2척, 화선 4척, 갤리선 23척, 평저선 1,300척을 이끌고 아조프 요새를 점령했는데 이때 해군의 중요성을 절감한 그는 원정이 끝난 직후인 1696년 10월 20일 공식적인 해군 창설을 시작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이것이 바로 러시아 해군의 시작이다. 러시아는 [[대북방전쟁]] 동안 [[발트함대]]를 건조했다. 발트함대의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었고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탈린|레발]]과 [[비보르크|비보리]]에도 기지를 건설했다. 1745년 러시아 해군은 36척의 전열함, 9척의 호위함, 3척의 정찰선, 5척의 포격선, 77척의 보조 선박 등 총 130여 척의 [[범선]] 선박으로 이뤄져 있었다. 노를 저어 운용하는 선박들은 그보다 더 많아서 253척의 [[갤리선]], 143척의 반갤리선, 143척의 [[브리건틴]] 등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아스트라한]], [[아르한겔스크]] 등 24곳의 조선소에서 선박들을 찍어냈다.[* 표트르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1,260척의 선박이 건조됐다. 백해, 아조프해, 발트해, 카스피해 등 다양한 곳에서 진수되어 유용하게 써먹었다. 단순 양 뿐만 아니라 질도 올라가서 1700년 대북방전쟁 시작 당시 해군의 선원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던 것과 달리 1721년에는 무려 7,215명의 숙련된 러시아인 수병들이 생겨났다.] 장교는 모스크바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귀족 출신이었고 일반 선원들은 징집병이었다. 해군 복무는 종신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해군병 학도들을 해외로 보내 유학시키거나, [[네덜란드 공화국]]이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 [[스코틀랜드]] 같은 곳에서 장교들을 초청해 고용하고 해군에 복무하게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가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펼침에 따라 러시아 해군도 날로 규모가 커져갔다. 1770년대에 [[발트함대]]가 흑해에 파견되어 오스만 함대를 꺾고 [[에게해]]까지 진출했으며, 1771년에 아조프 함대가 창설, 1778년에는 [[헤르손]]에 군항이 만들어졌고 1783년에 [[흑해함대]]의 첫 전함이 헤르손에서 취역, 1784년에 공식적으로 흑해함대가 창설됐다.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영국,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 규모의 해군력'''을 보유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크게 발트함대와 흑해함대가 있었는데 발트함대는 전함 35척, 호위함 19척을 보유했고 흑해함대는 전함 23척과 호위함 130척을 보유했다. 그 외에도 [[백해|북극해 전단]], [[카스피해 전단]], [[오호츠크해|오호츠크 전단]] 등도 존재했으나 규모면에서는 밀렸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러시아 해군은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발트함대는 부식과 노후화 문제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어도 벅찼다. 러시아는 기존의 해군력 유지에만 신경썼을 뿐 확장은 더이상 하지 않았고 육군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1802년 해군 군사부가 설치되고 1815년 해군성으로 개칭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가 1825년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마자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제3의 해군 강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면서 다시 대대적인 투자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해군은 황제의 비호 아래 급격히 성장했으며, 덕분에 1829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지중해 함대와 흑해함대를 활용해 오스만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tablewidth=100%><width=44%><nopad> [[파일:Odessa-1854.jpg|width=100%]] ||<nopad> [[파일:attachment/image_213.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 ||<bgcolor=#FFCD01,#FFCD01> '''[[강구트급 전함|{{{#000 강구트급 전함}}}]]''' || 러시아 해군이 큰 발전을 거듭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크림전쟁]]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경제 낙후로 인해 증기선 건조 분야에서 타 열강들에 비해 뒤처진 상태였다. 1853년 크림전쟁 발발 무렵 러시아는 발트함대, 흑해함대, 아르한겔스크 전단, 카스피해 전단, 오호츠크해 전단 등 모든 함대를 합쳐 전함 40척, 호위함 15척, [[코르벳]] 및 브륵 24척, 증기 호위함 16척을 보유했고 전체 해군은 91,000여 명에 달했다. [[미하일 라자레프]], [[파벨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코르닐로프, 블라디미르 이스토민 등 명장들이 속속 등장해 흑해함대를 훈련시키고 정예군으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 여파로 해군 개혁에 나서 1860년대부터 증기 [[철갑선]], 모니터, 부유포대 등 선진 기술을 도입해나갔고, 1861년에는 최초의 건보트 '오피트'를, 1863년에는 최초의 외양항해용 철갑선 하나인 '표트르 벨리키'를 건조하는 업적을 이룩했다. 기술적인 발전도 거듭하여 1826년 최초의 8문 대포를 장착한 무장 증기선을 도입했고, 10년 뒤에는 배수량 1,340톤, 177kW의 출력의 28문짜리 첫 증기 외륜선을 건조했다. 뿐만 아니라 탐험에도 앞장서 1803년부터 50년 간 무려 40번 넘게 장거리 탐험항해에 나서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알래스카]] 탐험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1800년대 후반 내내 해군 확장을 거듭해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의 해군'''을 보유하였다. 특히 미국 사업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대를 이어 해군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지원했다. 어찌나 늘어나는 속도가 빨랐던지 러시아의 함대 건조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영국, 독일, 미국, 특히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해와야 했을 정도. 러시아 해군이라고 항상 발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개전했고 [[발트함대]]와 [[러시아 태평양함대|태평양함대]]가 일본 해군에 격파당하면서 엄청난 대외적, 실질적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해군력은 이 전투로 세계 3위에서 6위로 추락했다. 러시아 해군의 초점은 극동에서 발트해로 다시 옮겨갔고 독일로부터 발트해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는 것에 힘썼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해군을 포기하지 않고 1906년에 해군 참모부를 창설, 여러 군함들을 발주하며 러일전쟁에서 입은 피해 회복에 애썼다. 기뢰 부설, [[잠수함]] 편대 창설, [[드레드노트]] 건조 등 1906년부터 1913년에 걸쳐 러시아의 해군 지출은 총 5억 1,900만 달러로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 규모였다. 러시아 함대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흑해]]와 [[발트해]]에서 고군분투했다. 발트함대는 방어적으로 나서 독일 제국 해군과 맞섰고, 흑해함대는 전력 우위를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 해군을 깨부수어 놓았다. 그러나 대전 도중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함대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그나마 발트함대가 방어전략을 펼친 덕에 온전한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발트 내전으로 인해 외국의 개입군이 쳐들어오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표트르 브란겔]]과 발트함대 상당수는 소비에트에 반대해 [[백군]] 편을 들고선 브란겔 함대를 결성, 아예 떨어져 나갔다.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소련의 가혹한 처우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잔재는 대부분 [[소련 해군]]으로 이어졌지만, 앞서 언급한 브란겔 함대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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