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러시아 제국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러시아 제국 육군|육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러시아 제국 육군)] ||<tablewidth=100%><width=100%><nopad> [[파일:1981fd1e0d236b69422533723360632e.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나폴레옹 전쟁시기 당시의 러시아 제국 육군''' || Ру́сская импера́торская а́рмия. [[러시아 제국군]]의 [[육군]] 병력이자 사실상 핵심 전력. 상비군과 국가 민병대로 구성되었으며, 상비군은 또 정규군과 별도 규정에 따라 복무하는 군대, 즉 [[카자크]][* 여러 주둔군으로 이뤄진 군대로 각 주둔군은 고유한 규율과 군복, 계급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 후반에 제국군의 예를 따라 표준화되었다. 대부분의 카자크는 기병이었으나 일부 규모가 큰 카자크 주둔군에는 보병도 있었다. 3개 카자크 연대는 황제의 근위대로 뽑혀 화려한 진홍색 코트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와 [[무슬림]] 군대로 분류했다. 1721년부터 1917년까지 존속하는 내내 러시아 군사력의 알짜배기였으며 1917년 3월에 황제가 강제로 퇴위하자 그대로 [[러시아 공화국]]으로 이관되었다.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하자 러시아 제국군의 실질적인 후신인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과 [[러시아 내전|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면서 러시아 제국 육군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원래 [[표트르 1세]]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스트렐치]]라는 머스킷병을 운용했다. 러시아 최초의 상비군으로서 [[이반 4세]]가 처음 창설했고 초창기에는 굉장히 유용한 전력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규율이 흐트러지고 충성심이 낮아지는 등 불안정한 군대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전쟁 시기에는 농노들을 징집해 군대를 증강해 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1600년대에는 [[루스 차르국]]에서 서유럽의 군사 교리를 따라 '신질서 연대'를 창립했다. 신질서 연대는 정규군 보병, [[용기병]], 흑기병 등 여러 병과가 혼재했다. 1631년에는 모스크바에 정규 연대 2개를 창설했으며 1632년 스몰렌스크 전쟁 동안 정규 연대 6개, 흑기병 연대 1개, 용기병 연대 2개를 새로 꾸렸다. 처음에는 토지가 없는 귀족과 [[스트렐치]]들의 자식, 자원병, [[카자크]]들을 모아 만들었고 지휘관들은 전원 외국인이었다. 스몰렌스크 전쟁이 끝나자 모든 신질서 연대는 해체됐으나 20년 뒤 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이 일어나며 재창설됐다. 정규군과 용기병들은 상비군으로 재편되었으며, 흑기병들은 돈과 토지가 없는 중산층, 귀족들의 자제로 구성되어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았다. 지휘관의 절반 이상이 젠트리 계급 이상일 정도로 엘리트층으로만 구성된 군대였다. 평시에는 일부 연대가 해체되긴 했으나 러시아는 막대한 군대를 운용했다. 1681년 기준 러시아는 61,000명에 달하는 정규 연대 33개, 29,000명에 달하는 [[용기병]] 및 흑기병 연대 25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1600년대 후반 이 신질서 연대는 러시아 군대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고 1700년대부터 개혁이 시작되며 러시아 제국군의 모태가 된다. [[표트르 1세]]는 징집 제도를 활용해 러시아의 군대를 강화했고 [[스웨덴군]]을 카피해 근대식 정규군을 편성했다. 특히 귀족 출신만을 장교에 앉히던 관례를 깨고 평민들도 능력만 있다면 장교 출신에 올려주었으며 재능만 있다면 귀족 작위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이 특례는 [[예카테리나 2세]]가 폐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농민과 도시인들의 징집은 지역별로 나누어 이뤄졌는데 처음에는 가구를 기준으로 하다가 형평성 논란으로 인구수 기준으로 바꾸었다. 1700년대 복무 기간은 종신이었지만 1793년 25년으로 단축됐고, 1834년에는 현역 20년에 예비군 5년, 1855년에는 현역 12년에 예비군 3년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1760년대와 90년대 동안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라는 역대급 명장이 독주하던 시대였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패해본 적이 없는''', 세계사적으로도 몇 안 되는 위대한 장군들 중 하나였던 수보로프는 1777년부터 1783년까지 [[크림반도]]와 [[캅카스]]에서 근무했으며, 1780년에는 중장이 되었고 1783년에는 보병 대장으로 승진했다. 1787년부터 1791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러시아가 폴란드에 맞서 승리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플린트락]] 소총이 도입되었으며 1763년에는 참모단이 창설되는 등 러시아 제국군의 질이 점진적으로 향상되던 시기기도 했다. ||<tablewidth=100%><width=24.1%><nopad> [[파일:d5fb24cbd8691130ee3e03ad54b50821.jpg|width=100%]] ||<width=28.7%><nopad> [[파일:Voltz1.jpg|width=100%]] ||<nopad> [[파일:russian-army-uniforms-ww1-14126180.jpg.webp|width=100%]] || ||<-2><bgcolor=#FFCD01,#FFCD01> '''나폴레옹 전쟁 시기 군복''' ||<bgcolor=#FFCD01,#FFCD01>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군복''' ||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에 원하든 싫든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1805년의 러시아 군대는 아직도 옛 [[앙시앙 레짐]] 체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연대 이상가는 편제가 없었으며 장교들은 여전히 엘리트 귀족층들만의 전유물이었다. 18세기까지도 러시아 병영 내에서는 구타와 폭력이 난무했고 [[똥군기]]가 범람해 규율이 엉망진창이었던 것. 사병들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하급 장교들조차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전투에 필요한 복잡한 실전 교본을 숙지하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물론 우수한 화기와 이를 운용할 숙련병들을 아카데미에서 훈련시키는 등 아예 당나라 군대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러시아 군의 한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패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허나 결국에는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활용하여 프랑스군의 보급선의 한계를 극한까지 몰고 간 덕에 [[러시아 원정]]에서 승리,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꺾고 유럽의 경찰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명실상부한 유럽의 패권국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럽 최강 육군이라는 러시아 육군의 자존심은 [[크림전쟁]]의 패배로 박살났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러시아는 전쟁부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의 주도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다. 기존의 아동 징집 제도를 폐지, 21세 이상 남자들에 대해 병역의 의무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전국에 [[군구]]를 설치했다. 대신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6년, 예비군은 9년으로 단축했다. 이로 인해 풍부한 경험을 갖춘 징집병을 예전보다 훨씬 대량으로 양성이 가능했으며 평화시에 군대 규모를 줄여 돈을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더이상 장로와 관리들은 급진적인 젊은이들에게 말을 안들으면 강제로 군대에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할 수 없었고, 농민들이 군대에 대거 입대하면서 농민층과 군대 사이의 유대가 깊어졌다. 군대에서 교육받은 농민들은 급진화되기 시작했고, 퇴역 후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성향을 유지했으며 군대는 점점 농민들의 불만에 더 공감하기 시작했다.] 모든 징집자들에게는 초등 교육이 제공됐고 영구적인 병영을 설치하는 등 아예 러시아의 군대를 갈아엎은 초유의 대개혁이었다. 밀류틴의 개혁은 표트르 1세 이래로 유지된 러시아의 군제 제도를 뒤짚어엎었고, 심지어 현대 [[러시아 연방군]]의 기틀을 잡은 개혁이라고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군은 [[의화단 운동]], 흑룡강 전투 등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군대는 날로 예산이 줄어들고 사기가 꺾이고 있었다. 러시아 국가예산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1881년 30%에서 1902년 18%로 감소했고, 1904년까지 러시아는 자국 군인 1명당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군인 1명당 지출한 금액의 57%, 63%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1883년과 1903년 사이에 1,500건이 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며 러시아군의 사기는 점차점차 사그라들었다. 말기로 갈수록 황제와 제정에 대한 불만이 심해지며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400건이 넘는 봉기가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니콜라이 2세]]는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개전 당시 러시아군은 115개의 보병 사단, 38개의 기병 사단, 7,900문의 총포(야포 7,100문, 곡사포 540문, 중포 257문)을 보유한 대군이었다. 하지만 군 구급차는 고작 2대, 차량은 679대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싸우기 위해 32개 보병 사단과 10.5개 기병 사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46개 보병 사단과 18.5개 기병 사단, [[발트해]]와 [[흑해]] 연안을 방어하기 위해 19.5개 보병 사단과 5.5개 기병 사단, 시베리아와 튀르키스탄에 17개 보병 사단과 3.5개 기병 사단을 주둔시켰고 크게 동부 전선, 캅카스 전선, 루마니아 전선에서 싸웠다. 러시아는 야심차게 참전했으나 지휘부의 무능함과 안일함 때문에 [[타넨베르크 전투(1914)|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에게 패배하고 기나긴 소모전으로 접어들었으며,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제국은 붕괴되었고 이후 형성된 볼셰비키 정권은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물론 독일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바로 조약을 파기했지만 공산주의 정권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탓에 잃은 영토를 되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홀로 나섰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에게 탈탈 털리며 [[커즌 선]] 동쪽의 벨라루스의 절반과 우크라이나의 2/3를 재확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