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러시아 제국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두마]] ===== ||<tablewidth=100%><width=49.7%><nopad> [[파일:tavrich.jpg|width=100%]] ||<nopad> [[파일:the-meeting-room-of-the-state-duma-1906-1917-3b6b6e-1024.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타브리체스키 궁전''' ||<bgcolor=#FFCD01,#FFCD01> '''당시 두마 회의 모습''' || 국가평의회가 러시아의 상원이라면 [[두마]]는 러시아의 [[하원]]이었다. 1905년 혁명의 결과로 인해 생겨난 기구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타브리체스키 궁전을 의사당으로 사용했고 1906년 4월 27일부터 1917년 2월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총 4번의 하원이 소집됐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소집된 두마는 상당히 민주적이었던 반면 세 번째와 네 번째 두마는 그에 비해 제약이 많이 걸려 [[하원]]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됐다. 결국 4번째 두마가 1917년 3월 2일까지 회기를 열다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직후 1917년 10월 6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1905년 혁명의 열기에 짓눌린 [[세르게이 비테]]는 '두마'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불리긴(Александр Булыгин)이 제창했다 하여 '불리긴 두마'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에는 그저 황제의 또다른 조언 기구에 불과했으나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자 이를 막기 위해 [[니콜라이 2세]]가 발표한 '10월 선언'을 통해서 그 중요도가 격상됐다. 황제는 새로 소집할 국가두마에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권을 약속했고, 그렇게 구성된 두마에 입법권과 감사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다. 새로 만들어질 두마는 러시아의 하원 역할을 할 것이었고 기존의 국가평의회는 상원 역할을 할 것이었다. 두마는 총 442명으로 구성됐다. 극도로 복잡한 절차로 선출되었고 부유층과 지주 계급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각 지방에 선거구들이 할당됐고 대도시들에도 의석이 할당됐다. 의원들은 지역의 선거인단들 중에서 뽑혔고 선거인단은 지주, 시민, 농민 이 3개 계급이 선출했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직접 참석한 반면 빈곤층들은 대표를 뽑아 대리시켰다. 도시민들은 납세하는 기준 재산에 따라 선거권이 나뉘었고 이들은 직접 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농민들은 '볼로스트'라는 행정구역 단위로 대표를 뽑았다. 노동자들의 경우 50인 이상의 사업장은 각기 선거인단에 1명 이상의 선거인을 선출할 수 있었다. 선거인단 투표는 비밀투표에 단순 다수결이었고, 다수가 보수층이었던지라 급진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이우|키예프]], [[오데사]], [[리가]], [[바르샤바]] 등 대도시들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한 덕분에 그나마 급진주의자들이 두마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절대 자신의 전제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906년 4월 기본법을 발표해 '최고 전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두마의 동의 없이 법을 제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반대로 두마 역시 황제의 허락 없이는 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고 황제는 거부권을 무한히 행사 가능했다. 장관들의 임면권 역시 여전히 황제가 틀어쥐었고 행정부는 두마에 그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에게는 원할 때마다 두마를 해산하고 새로 소집할 권리까지 있었다. 러시아의 실상은 여전히 황제가 압도적인 비공식적 절대 군주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06년 4월 27일 제1차 두마가 소집됐다. 제1차 두마는 약 5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됐다.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노동당]] 같은 급진 좌파정당들은 선거 자체를 보이콧했고, 때문에 온건 성향의 [[입헌민주당(러시아)|입헌민주당]]이 가장 많은 184석을 차지했다.[* 입헌민주당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라 많은 유권자들을 끌어모을 역량이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지만, 도시 중산층에만 한정되었을 뿐 농촌 지방에 호소력이 없었다.] 제2당은 약간 더 좌파 성향의 [[트루도비키]]로 약 100석을 차지했다. 그 외에 [[10월 17일 연합]] 등 약 45석의 우파 연합도 있었으며 농민 집단 출신의 타 의원들은 [[무소속]]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1906년 7월 8일부터 73일 간 지속됐지만 딱히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두마가 [[토지개혁]]과 선거개혁을 원했지만 황제와 이반 고레미킨 총리는 두마를 견제했다. [[자유주의]]를 두려워한 황제가 결국 두마를 해산했다. 이에 분개한 입헌민주당 대표 파벨 밀류코프는 200명의 의원들과 함께 핀란드로 도망쳐 '비푸리 선언'을 발표해 불복종 저항운동을 요구했으나 국민들에게 무시당했고, 얼마 못가 체포당해 진압당해버렸다. ||<tablewidth=100%><width=46.3%><nopad> [[파일:5c245b51887ff4d95df563095b0737d1.jpg|width=100%]] ||<nopad> [[파일:Conference_hall_Tauride_Palace.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두마를 개회하는 [[니콜라이 2세|{{{#000 니콜라이 2세}}}]]''' ||<bgcolor=#FFCD01,#FFCD01> '''현재 타브리체스키 궁전의 모습''' || 1907년 2월 20일에 소집된 제2차 두마는 103일간 지속됐다. 사회민주노동당의 양대 파벌인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은 모두 보이콧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다. 선거는 좌익에게 유리하게 치러져 [[트루도비키]] 104석,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노동당]] 65석,[* 멘셰비키가 47석이고 볼셰비키가 18석이었다.]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37석, 민중사회당이 16석을 차지했다. 2차 두마의 입헌민주당과 사회주의자들은 토지 몰수를 주장했지만, 황제와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가 결사반대하며 그 어떠한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결국 그해 6월 스톨리핀은 사회민주노동당이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 의원 16명의 면책권을 박탈할 것을 요구했지만 두마가 받아들이지 않자 6월 3일 황제가 직접 해산시켜버렸다. 황제는 두마를 없애지는 않았으나 대신 귀족, 지주들과 부자들의 투표권을 확대하고 '배은망덕'한 농민들의 투표권을 축소해버렸다. 1907년 11월 소집된 제3차 두마는 이전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고 지주 자산가 계급들의 비율이 높았다. 덕분에 두마는 5년의 임기를 처음 채우는 데에 성공했고, 200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2,500개의 법안에 대해 투표를 실시했다. 두마는 스톨리핀의 군사력 향상, 토지개혁, 사회복지 제도를 지지했다. 정부와 두마 사이의 관계는 개선됐지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제3차 두마 내내 제국은 불안에 시달렸고 제국 곳곳이 계엄령 아래거나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제2차 두마의 강제해산, 제1차 두마의 의장이던 무름체프의 장례식, [[레프 톨스토이]]의 장례식, 광신도와 선동가들에 대한 언급이 금지됐고 두마는 근본적인 개혁의 원동력을 잃었다. 스톨리핀은 1911년 9월 암살당했고 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새 총리로 임명됐다.[* 재무장관 출신이던 코콥초프는 협조적인 두마 덕분에 균형 잡힌 예산을 짜고 꽤나 효율적인 집행이 가능했다고.] 마지막 두마인 제4차 두마는 1912년 11월 15일부터 1917년 10월 6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두마와 황제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는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세를 정부가 두마에게 철저히 숨겼기 때문. 두마는 점점 황제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의원들은 점점 하나로 뭉쳐 급진화되어갔다. 정부와 두마 사이의 관계는 날로 최악으로 치달아 의원들이 보리스 슈튀르머 총리에게 야유를 퍼붓는가하면 내각 장관들을 [[라스푸틴]]의 부하, 겁쟁이와 암살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새로 임명된 알렉산드르 트레포프 총리는 의회에서 제대로 연설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2월 혁명]]이 일어나 [[게오르기 리보프]]의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러시아 공화국]]이 선포되며 두마는 10월 6일 영구적으로 해산됐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