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러시아 제국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황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차르)] ||<tablewidth=100%><width=36.5%><nopad> [[파일:nicholas ii coronation.jpg|width=100%]] ||<nopad> [[파일:Coronation_of_Nicholas_II_by_L.Tuxen_(1898,_Hermitage).jpg|width=100%]] || ||<bgcolor=#FFCD01,#FFCD01> '''[[니콜라이 2세|{{{#000 니콜라이 2세}}}]]''' ||<bgcolor=#FFCD01,#FFCD01>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 > '''하나님의 은총으로 전러시아의 황제이시자 전제자, [[모스크바 대공국|모스크바]], [[키예프 대공국|키예프]], [[블라디미르-수즈달|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 공화국|노브고로드]]의 황제 겸 [[카잔 칸국|카잔]], [[아스트라한 칸국|아스트라한]], [[폴란드 입헌왕국|폴란드]], [[시비르 칸국|시베리아]], 타브리아, [[조지아 왕국|그루지야]]의 차르 겸, 프스코프의 군주이시자 스몰렌스크, [[리투아니아 대공국|리투아니아]], [[갈리치아-볼히니아|볼린]], 포돌리아, [[핀란드 대공국|핀란드]]의 대공 겸, [[에스토니아 공국|에스토니아]], [[리보니아 공국|리보니아]], [[쿠를란트-젬갈렌|쿠를란트와 셰미갈리아]], 사모기티아, 비아위스토크, 카렐리야, 트베리, 유그라, 페름, 뱟카, 불가르 및 기타 지역의 공작 겸, 노브고로드 하부 지역의 군주이자 체르니고프, 랴잔, 폴로츠크, 로스토프, 야로슬라블, 벨로오제로, 우도라, 옵도라, 콘디야, 비텝스크, 므스티슬라브 및 모든 북방 영지의 대공 겸 [[이베리아 왕국|이베리아]],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카르탈리니아 및 카바르다 땅]]과 아르메니아 지역의 통치자이자 군주 겸, 체르카스 및 산악 부족 공후들의 상속 군주이자 소유자 겸, 투르키스탄의 군주이자 노르웨이의 세습 후계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슈토르마른, 디트마르셴 및 올덴부르크의 공작 등등''' > ---- > 러시아 제국 황제의 공식적인 칭호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nopad>[youtube(IEyhsgjKP-g, width=100%)]|| [[표트르 1세]]가 [[차르]]로 즉위하고 이룬 대업들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식 칭호인 '차르'를 유럽식 칭호인 [[황제]], 즉 [[임페라토르]]로 바꾼 것이었다. 표트르 1세는 이를 통해 러시아가 온전히 유럽 국가로 인정 받기를 원했고, 특히 외부로 힘을 투사하기 위해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같은 칭호를 선택하기를 원했다.[* 통념과 달리 [[루스 차르국]] 시대에 러시아 차르는 '''이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동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빈(오스트리아)|빈]]의 궁정에 서한을 보냈고, 옛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바실리 3세]] 사이에 주고받은 서한을 근거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러시아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인받으려 노력했다. 표트르 1세가 [[대북방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자, 러시아 귀족들은 차르에게 '전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바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1세는 1721년 11월 2일에 이 칭호를 받아들였으며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이 즉시 러시아의 칭제를 승인했다. 이어 1723년에는 [[스웨덴 제국|스웨덴]]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 제국|스페인]]이, 마지막으로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황제위를 인정함으로써 이후부터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제국]]'이라 불렸다. 황제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두 가지의 제한만이 걸려있었는데, 그마저도 기존의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는 황제와 황후 모두 [[러시아 정교회]] 신자여야만 한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파벨 1세]]가 발표한 파벨 계승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제외하면 러시아 황제의 권한은 사실상 무한했다. 그러나 1905년 10월 17일에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는 1906년 4월 28일에 발표된 헌법에 따라 선출된 [[국가두마]]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떠한 명령도 법률로 만들 수 없다고 스스로 발표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력에 제한을 걸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의회를 해산할 권리를 유지했고, 실제로 해산권을 사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황제는 국가두마에서 통과시킨 모든 법률들에 대해 무한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으며 오직 황제만이 개헌을 시작할 권한이 있었다. 황제가 임명한 장관들은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고 국가두마나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두마의 의원들과 국민들은 이들에게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었으나 이들을 면직하거나 제거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권한은 1906년 4월 28일 이후로 꽤나 제약되었으나 여전히 매우 강력했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은 항상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 안식 성당(Успенский Собо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 이후에도 대관식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에서 열렸다. 절차는 먼저 [[러시아 제국 황제관|황제관]]을 머리에 씌운 다음, [[레갈리아]]를 착용하고 [[성유]]를 [[기름 부음]]받은 뒤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축복을 받는 등 대단히 의례적인 절차로 가득했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동로마 황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대관식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 러시아 황제는 이를 근거로 자신들이 동로마를 이은 후계자, 즉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정교회 총대주교로부터 기름을 부음받는 의식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어서, 군주에게 하느님의 신성한 권위를 덧씌운다는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치러진 대관식은 1896년 5월 26일 치러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대관식이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