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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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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 ||<-2><tablewidth=600><tablebgcolor=#fff,#000> [[파일:Linguistic_Map_of_Justinian_I's_Empire_c._560.png|width=100%]] || ||<-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 동로마 제국 영토 내 언어 분포 || ||<bgcolor=#b4c0ff> ||[[라틴어]] || ||<bgcolor=#b4e9ff> ||라틴어와 토착 언어[* 북아프리카에서는 Punic, 즉 구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어 및 베르베르어가, 발칸 반도에서는 일리리아어, [[다키아어]], 민족 대이동 시절의 게르만족과 훈족 유민들의 언어가 쓰였다.] || ||<bgcolor=#ffb4b4> ||[[그리스어]] || ||<bgcolor=#ffe5b4> ||그리스어와 토착 언어[* 발칸 반도에서는 일리리아어, [[트라키아어]], 게르만족과 훈족 유민들의 언어가, 소아시아에서는 아나톨리아 토착어, 아르메니아어가 쓰였다.] || ||<bgcolor=#ffb4f9> ||[[아람어]] || ||<bgcolor=#bbffb4> ||[[콥트어]] || ||<bgcolor=#eeffb4> ||[[아르메니아어]]와 [[카르트벨리어족]] || 다민족 국가이면서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그 영토 안에는 [[그리스인]] 외에 라틴인, [[불가르 칸국|불가르인]], [[튀르크|튀르크인]], [[이탈리아인]], [[슬라브|슬라브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흑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이 축소됨과 동시에 이 "로마인"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인" 한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사민정책과 주변국들과의 교류로 인해 인종 간의 혼합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인종적으로 '순수한 [[그리스인]]', '순수한 슬라브인' 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합동으로 코르푸를 공략하고 있던 동로마군과 베네치아군은 사이가 서로 화목하지 못해 자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 그때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전선을 시찰하러 오자 베네치아군은 황제복을 입힌 흑인 노예를 배 위에 세워두는 식으로 황제를 조롱했다. 이것은 마누일 1세의 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겨냥한 행동이었는데, 어두운 색의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요안니스 2세는 당대인들 사이에서 '흑인 황제'라는 놀림까지 받았을 정도로 그 특징이 유독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제국이 특유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콤니노스 왕조 후기부터지만 그 시기에도 그런 경향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강렬한 그리스 민족 의식과 반서유럽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니케아 제국]] 등의 지방 세력들을 중심으로 제국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그전에도 반서방의식은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베네치아와 동로마의 반목]]처럼 상당히 있었고, 그것을 야심가 [[안드로니코스 1세|안드로니코스]]가 이용해서 1182년 라틴, 다시 말해서 서방인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붕괴되고 정체가 단절된 뒤로는 소위 '저항적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로마 정부는 1204년에 파괴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워렌 트레드골드) 제국 말기에는 대내외적으로 '그리스인의 황제'로 칭해지기도 했다. 물론 [[고대 로마]]의 황제 역시 그리스인을 신민으로 삼고 있기는 했다. 동로마 황제는 멸망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없고[* 일례로 1451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에게 라틴어로 보낸 편지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본인을 'Constantinus in christo deo fidelis imperator ac moderator Romeorum semper augustus', 즉 로마의 '임페라토르'이자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칭했다.] 같은 시기의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들의 황제'로 지칭하기도 했다. 제국 내의 그리스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제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미 '제국의 신민'으로서 1600년 넘는 기간을 살아 왔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 시대의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주된 언어로 쓰고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리스인(ελληνές, 엘리네스)'라는 단어는 근세까지도 [[그리스 로마 신화]]인 '고대 이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어휘로 쓰였다.[* 1908년 림노스(렘노스) 섬 출생의 미국 비잔티움 학자 피터 차라니스(Peter Charanis)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발칸 전쟁#s-1|제1차 발칸 전쟁]] 때 섬을 점령한 그리스 해군 병사들을 보러 나온 아이들은 그 병사들을 마치 자신들과는 별개의 족속을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인(Hellenes)'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흡사 외국인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내심 황당해 한 그리스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니?"라고 물었고, 아이들은 "네, 우린 로마인이에요."라고 말했다.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42.] 12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깊이 숨어 있었다. 심지어는 근대에 [[남동유럽]]의 각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도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처럼 혈통적·종족적으로 확실한 개념은 아니었고, '[[정교회|룸]] [[밀레트 제도|밀레트]]'(정교회 신앙 공동체)로 대충 뭉뚱그려져 있었다. 보편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부터 로마는 이미 다민족 국가로 변모되어 갔고, 라틴어를 쓰는 라틴인만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당대 '로마인'이라는 개념은 '민족'이 아닌 '국가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고 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에 순응하면서 스스로 '제국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출신이 라틴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슬라브인이든 아랍인이든 튀르크인이든 상관없었다.[* 심지어 이탈리아 본토와 속주를 막론하고 제국의 모든 자유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카라칼라]] 황제 때부터는 노예나 투항자만 아니면 민족이 어떻든 법적으로도 다들 '로마인'이 되었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의 본명) 황제의 법령에 의해 로마의 세계에 사는 모든 이들은 로마 시민이 되었다(By an enactment of the Emperor Antoninus, all those living in the Roman world were made Roman citizens)'라고 쓴 당대의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울피아누스의 이 문장은 [[로마법 대전]]의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 seu Pandectae)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학설휘찬의 내용 태반이 그의 저서에서 따왔을 정도로 울피아누스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률가로서의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동로마의 사회는 귀족, 사제, 관료, 군사령관, 서민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 라틴,[* 그전에도 제국에 라틴인, 프랑크인을 비롯한 서방 출신 민족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누일 1세]]의 친서방 정책에 힘입어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 피사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라틴인들이 대거 제국으로 이주해 와 로마 시민권도 따고 각자의 커뮤니티도 형성함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편 제국의 수도로서의 모습을 과시했다.] 슬라브,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랍, 튀르크 등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로마의 명장으로 유명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도 각각 고트계 집안과 아르메니아계 집안 출신이었고, [[요안니스 2세]]의 총신이자 명장으로서 12세기 초 제국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요한네스 악수스|요안니스 악수스]]도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이었다. 13세기 말 라틴 제국의 부활을 목적으로 거세게 공격해 온 베네치아와 시칠리아에 맞서 동로마의 해군을 이끌었던 명장 리카리오(Licario)도[* 라틴 제국의 수립 이후 베네치아는 제해권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에게해]]의 수많은 섬들을 정복했는데 이것을 모조리 탈환하여 에게해를 다시금 제국의 바다로 만든 인물이 리카리오였다. 물론 베네치아도 두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카리오는 서방의 함대가 자신을 막으러 올 때마다 물리쳤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최정점에 위치한 황제마저 그 선조가 아랍인이었다고 전해지거나([[니키포로스 1세]])[* 최초의 아랍인 로마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다. 이름부터가 '아랍인 필리푸스'라는 뜻.] 아르메니아 혈통의 가문들이([[이라클리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 아르메니아인은 적지 않은 수가 제국의 [[고관대작]]에 오르는 등 동로마 사회에서 꽤나 끗발 날린 민족이었고, 아르메니아 혈통이었던 마케도니아 왕조 황제들의 치세 동안 동로마는 아르메니아 본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슬림의 침공을 막을 목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를 형성 ·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고, 훗날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발전한다.] 차지하기도 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일리리쿰 속주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일리리아인이었다. 황제를 포함한 제국 사회 전체의 이러한 다민족적 특징은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기독교도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따르면 [[사두정치]] 때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 이미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에서 백 년 가까이 지나서, '트라키아계 로마인'이나 '다키아계 로마인'도 자연스러운 개념이었다.]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고,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다시 말해서 '''[[SPQR]]'''이 경악했다고 한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것처럼[* [[410년]] 로마 시 함락과 약탈 때의 [[알라리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포위한 다음에, 우리 [[고트족]]은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서, (당시 세계를 몇 백 년간 지배해왔기에 배고픔 따위는 장식이었던) 로마인도 이런 굶주림을 겪어봐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미 반박된 모함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속의 [[갈레리우스]]는 로마의 위기극복과 번영을 위해 충성을 다한 부제였다. 어쨌든 다민족적 보편성을 '고대 로마와는 구별되는 중세 로마만의 특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는 [[히스파니아]] 출신의 [[트라야누스]]였지만, 트라야누스의 가문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건너온 귀족 가문이었기에 평범한 속주민이 황제로 출세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속주민' 로마 황제는 일반적으로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 여겨진다. 따지고보면 이쪽도 순수 속주민 출신은 아니고 외가가 이탈리아계였다. 이후 아랍인, 일리리아인, 다키아인, 트라키아인, 이사우리아인, 아르메니아인, 게르만인, 시리아인 등 정말 여러 민족들이 로마 황제를 배출함으로써 '로마 황제'라는 자리가 절대로 라틴인 또는 그리스인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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