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동로마 제국
(r2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경제 == ||<-2><tablealign=center><tablewidth=400><tablebordercolor=#702963><nopad>[[파일:September_byzantinisch.jpg|width=100%]]|| ||<-2><bgcolor=#FFF> {{{-1 9월의 풍요로움을 우의적으로 묘사한 동로마 부조. 11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동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세기 동안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특히 서방 세계는 12세기는 되어서야 동로마의 경제력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당시의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들로 인한 영토상실과 [[흑사병]]의 창궐으로 인해 한창 쇠퇴기를 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더욱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유능한 황제들이 실시한 행정 개혁, 인구 증가, 공공 사업 실시, 조세 제도 개편 덕분에 동로마 제국은 10세기부터 12세기 말까지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자신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만방에 과시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여행했던 여행가들은 황제의 막대한 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Laiou & Morrisson 2007, p. 90–91, 127, 166–169, 203–204; Magdalino 2002b, p. 535] 동로마 제국에서는 고대 이래로 화폐 경제 제도가 매우 발달했다고 여겨진다.[* 동시기의 서유럽도 물론 화폐가 있기는 했으나 대개 물물교환으로 경제 활동 전반이 이루어졌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인 [[노미스마]]는 13세기 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1282년에 등장하여 빠르게 보급된 베네치아 [[두캇]] 금화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높은 신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노미스마화는 후세에 ‘중세의 [[미국 달러|달러]]’ 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들여온 [[비단]] 기술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 제조된 [[견직물]]들을 비롯해서 귀금속 공예품·유리 공예품·도자기 제품들이 거래되면서 다른 국가와의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 이라고 불릴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여기서 만든 유리잔, 유리구슬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될 정도였다.([[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등이 있다.) 동로마 제국의 주요 수입원 가운데 하나는 강력한 해군력과 중앙정부의 해양지향적 성격으로 육성된 대외 무역이었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거대한 무역로, 특히 [[실크로드]]의 서부 종점으로 기능했다. 견직물[* 동로마 제국으로 6세기 비단 직조법이 동양에서 전파된 이후 비단([[견직물]])은 동로마 제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전매품으로 다뤄졌고, 반면 중세 전기~중기 동방세계에 비해 경제=산업적, 문화적, 학문-기술적 수준이 뒤떨어졌던 서유럽에는 비단 직조법이 전파되지 않았었고, 게다가 이 천을 자주색([[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염료인 "티리언 퍼플"의 생산법 역시 동로마 제국 정부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은 [[지중해]] 뿔[[고둥]](Murex)이라는 생물에게서만 추출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정말 복잡하고 노동 집약적으로 이루어져 다른 국가는 생산하기에 엄두도 낼수가 없는 염료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티리언 퍼플로 물들인 최상급의 자줏빛 비단은 생산지에서도 같은 무게의 금값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이러한 비단으로 만든 옷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하고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북유럽보다는 좀 더 부유했던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도 황제나 왕,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되면 '비단을 사는 것' 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전매품인 자줏빛 비단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사적인 거래로 살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떻게든 꼭 사고 싶어했다. 서유럽 프랑크족은 동로마 제국 정부의 전매품 통제령 때문에 비단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순식간에 극단적인 동로마 제국의 반대편으로 태세를 바꿔 제국에 대한 폭언과 욕설을 가득 남긴 일화까지 있을 정도이다. 또한 북유럽은 춥고 습해서 뽕나무가 없고 누에를 치지 못하니 그냥 비단도 황금 이상의 사치품이었는데 자주색으로 물들인 비단이었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국은 황제와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선물로 이 귀한 자줏빛 비단을 애용했다. 또한 북유럽은 춥고 습해서 뽕나무가 없고 누에를 치지 못하니 그냥 비단도 황금 이상의 사치품이었는데 자주색으로 물들인 비단이었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의 친위대로 복무한 사람인 [[바랑인 친위대]] 병사가 이 자줏빛 비단 망토를 걸치고 북유럽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성실하게 복무하며 혁혁한 공훈을 세운 보답으로 황제에게 매우 귀한 선물을 하사받았다'는 뜻이었다. 즉 물건 자체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이 시절 [[상무#s-3]]적이고 의외로 법(특히 상호간의 계약)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던 북유럽인([[바이킹]])의 사고방식에서 '먼 땅에서 용병으로 복무해 용맹을 떨치고 공훈을 세워 그 보상으로 더없이 귀한 경제적 선물을 받아 돌아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멋지게 성공한 사나이의 증거였던 것이다.]은 단연코 동로마의 수출품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이집트에 수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및 서방 세계에서 유통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앙정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또한 금리와 이자율 역시 직접 조절하였으며, 담합이나 독점을 통해서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길드 및 조합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를 때렸다. 대신 황제와 관료들은 제국에 위기가 닥쳤을 때 경제에 개입하여 수도의 원활한 물자 공급을 보장하고, 곡물 가격을 어떻게든 낮춰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과세를 통해서 잉여금의 일부를 징수하고,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관료들에게 급여 형태로 재분배하거나 공공 사업에 투자하는 등의 형태로 다시 민간 경제에 유통시켰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나 사치품에 대한 전매는 11세기 중반까지로 한정되며 8~9세기 이래로 경제 전반은 점점 민간에서 역량을 강화하면서 자유로운 무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의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하루 금화 2만 개'''를 거둔다는 진술이 나올 정도로 무역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12세기 말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에 대한 동로마 지식인들의 적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제국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라스카리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무너져가던 제국의 경제를 어떻게든 회복시키려 노력했지만, 후기의 동로마 제국은 빈번한 내전과 함께 행졍력의 붕괴로 인하여 국내외의 경제활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의 여러 해양 도시국가들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나날이 쇠퇴일로를 걸었으며,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들에게 각종 무역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무역에서 창출되던 이익도 잃어버린 제국은 심지어 교역 물품의 가격 통제, 귀금속 유통 방면의 경제 활동을 건드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떤 학자들은 중앙정부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부터 중세 초기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9 ~ 13세기에 서유럽과 중동에서 농업 기술력과 생산성이 발전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은 상대적인 우위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중[[괭이]]와 가벼운 [[쟁기]]에서 멈추었지만, 이것은 굳이 깊게 땅을 팔 이유가 없는 동지중해의 자연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Angeliki 교수) 자연 환경에 농민들이 적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Oikonomides 교수) 반대로 프랑스 북부와 영국의 고지대, 독일을 위시한 여러 지역들은 충적토가 많아 고대부터 사용하던 '가벼운' 경형 쟁기로는 경작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 지역들에서는 새로이 개발된 중형 쟁기를 써서 단단하고 끈적끈적한 토양을 경작해 그 토양의 풍부한 양분을 온전히 활용하여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반면 지중해 일대와 프랑스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고 유지 비용이 높은 중형 쟁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깊이 갈이를 하면 수분이 지면으로 빠지거나 모래만 나오는지라 쓰지 않는 게 더 나았다. 그래서 농업과 관련해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북유럽인이나 동유럽인들이 대규모로 제국으로 이주해 왔음에도 중형 쟁기를 위시한 농기구들이 제국 내부에서 확산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로마의 노동 생산성은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토지 소유 형태와 경작 방식에서 노동 집약적인 경작 방식의 도입 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관개를 진행한 아랍과 달리 동로마 제국에서는 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 관개 수로를 설치하고 [[물레방아]]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동안에 서유럽의 생산성은 배로 늘어났고 아랍-이슬람 세계도 관개 공사를 해 수확을 두 배로 늘리고 동양의 작물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동로마의 농업 기술은 초기에는 앞서 있었으나 점차 규모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서유럽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같은 곡창지대를 잃은 후에는 인구부양 능력이 점점 떨어졌다. 8세기에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두환이라는 당나라 포로가 지중해 국가들의 풍습 등을 기록했는데 동로마에 대해 기록한 것에 따르면 아랍제국의 상업은 굉장히 활발하다고 명기했던 반면, 동로마인들은 금전거래나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아랍제국의 공습을 받아 쇠퇴기에 든 동로마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자급자족하는 변경의 테마들을 본 것일 가능성도 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