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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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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527~565)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주요 업적은 * 1. 고토(故土) 수복 * 2. 『로마법 대전』 편찬 * 3. [[하기아 소피아|성 소피아 대성당]](현재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건축 …등이 예로 들어진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즉위 직후 민중 반란[* 니카의 반란.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때 도망치려 했는데 황후 [[테오도라(6세기)|테오도라]]가 말려서 남았고 진압을 시도한다.]을 겪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고대 로마의 형법과 민법을 참고로 해서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도록 법학자들에게 지시했다. -- 실제로 일은 그들이 다했다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그냥 지시만 했다는 비판도 받지만, 이 법전이 르네상스 이후의 서유럽에 전해져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한 근대 유럽 헌법의 골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다. 또 하나의 업적인 고토수복 원정의 경우, 초중반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듯 싶었지만,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강타한 역병 때문에 제국 내의 인구가 상당히 감소하였고[* 당시 동로마 제국은 도시화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잘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더 심각했다.] 그 결과 세수는 줄어드는데 인력부족으로 군대 유지비는 대폭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어 제국의 재정을 지속적으로 소모하게 만들었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재정복이 이루어진 6세기 이후부터 다시 날려먹는 8~9세기 전까지, 해당 지역들이 동로마 제국의 재정에 기여한 바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재정복 직후'에는 역병의 영향으로 인해 제국 재정에 큰 부담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나, 제국의 중앙정부에게나 초반에는 다 손해였고 그나마 후자에 한해서는 중기 이후가 되서야 이득이었다는 것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다.][* 다만 동로마 입장에서도 이 재정복 사업이 완전히 헛된 짓은 아니었던 게,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지역은 예로부터 경제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복할만한 가치는 충분했고, 실제로 이 지역들을 탈환하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것이 아닌 영토의 중요성과 인구, 세수 등을 감안해서 결정한 계획적인 확장이었다.][* 실제로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래부터 풍요로웠던 지역이었고 외침의 위협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고토수복 전쟁에서 획득한 속주들 가운데 경제적·군사적으로 유일하게 정상궤도로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며, [[야르무크 전투]] 패전의 여파로 본토와 분단되고 몇십년 뒤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기 직전까지 동로마 제국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또 이탈리아 속주의 경우에는, 비록 북부 지방은 랑고바르드 족에게 날아가기는 했으나 [[라벤나 총독부]]와 남이탈리아 지역은 잔존해 있었으며 이는 제국의 본토였던 발칸반도를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동방 황제들이 [[교황]]을 비롯한 서방 지역에 상당한 압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751년에는 라벤나 총독부도 날아갔지만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일대의 남이탈리아는 여전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아있었으며, 덕분에 제국은 이탈리아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는 1971년까지 이민족들의 침입을 남이탈리아로 집중시켜서 효율적인 거점 방어를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목상으로만 봉신국이지 사실상 지나치게 성장하여 눈엣가시가 되었던 베네치아 공화국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한편 이전에는 로마 시를 비롯한 이탈리아 영토에 거주했던 이탈리아인들이 (동)로마를 고국, 옛 조국으로 생각했고 제국군을 해방자로 생각했다면[* 이는 서로마가 망한지 몇십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시기 이후에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쪽으로 입장이 복합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제국 서부와 동부의 문화·언어적 차이[* 서부는 그때까지도 [[라틴어]]가 사회 전반의 공용어였지만, 동부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병용되고 있었다.] 양 교회 간의 전례 양식과 전통 등의 차이, 제국 측의 로마 시와 이탈리아에 대한 관점[* 대강 요약하자면, "우리 로마 제국은 로마 시와 이탈리아 땅에서 출발했기에 그곳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어찌됐건 그곳은 '''옛''' 수도와 '''옛''' 본국이고, 지금은 동방으로 와서 새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곳은 이제는 다른 일반 속주들보다 의미가 깊긴 하지만 '''그냥 속주일 뿐이다'''" 정도.] 등의 요인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사]]에서 나온 2019년 수정판 동로마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Italy's integration into the empire did not imply reversion to the position of independence from the east which it had enjoyed before the advent of barbarian power, nor were its Roman inhabitants able to enjoy the positions of influence they had held under the Goths.[br][br]이탈리아가 제국에 다시 편입되었다는 것이 이민족(게르만인)의 지배 이전처럼 이탈리아가 누렸던 독립적인 위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았으며,[* 즉, 예전에는 서로마의 본국 내지는 중심지였던 이탈리아가,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이후로는 동로마의 한낱 속주 1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로마계 주민이 고트인 아래에서 지녔었던 영향력이라는 위상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었다.[* '옛 로마인으로서 문화, 문명적 역량, 행정능력과 같은 [[소프트파워]]를 보유한 집단이라는 이점이 게르만 치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보에티우스]]와 같은 숙청 및 불협화음도 있긴 했지만) 나름 적응하여 입지를 확보해서 살고 있었는데, 동로마 치하로 편입되면서(어찌됐건 동로마도 로마니까) 이러한 상대적인 이점이 사라졌다'라고 평가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조는 재정복 전쟁 당시부터 보였다는 분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Schwerpunkt라는 역사 유튜브 채널의 [[https://www.youtube.com/watch?v=RveoQvu7NyI|Rome between the Ostrogothic sieges '''(538-544 AD): the Latin-Germanic ties against Byzantine rule''']] 참조.] > ---- >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p. 215 이 부분은 후대 동로마에서 고대 로마적 전통[*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틀린 것이다. 그나마 아는 것이 원수정 로마까지거나, 혹은 넷상에서 한때 불었던 동로마 연구 붐으로 인해 조금밖에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 3~10세기에 걸친 그 중간 과정과 기원전 2세기 이전의 공화정 로마가 밟은 그리스화 과정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고대 로마적 전통이 곧 라틴적 전통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화'라면 무조건 로마가 아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념은 당대에도 없었다.''' 이는, 로마 제국이 영토가 크게 줄면서 옛 로마 제국 시절에는 같은 나라였던 서유럽과 구분되어 독자적으로 역사발전을 하게 되다보니 서유럽과 동유럽 양측이 서로를 타자화하게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화' 되면서 로마가 아니게 되는 시기가 아니었단 소리.]이 다소 퇴조하여 '그리스화' 되는 경향이 우세해지고, 제국 자체의 역량이 쇠퇴하며 더욱 심화되는데 이 부분은 아래에 기술하도록 하겠다.[* 이외에도 이 시기를 다룬 [[https://www.youtube.com/watch?v=NzsCbnssARg|Byzantine Italy: an introduction]] 영상에서의 20~25분경 즈음 내용에 의하면, 동로마령 주민들이 동로마의 과중한 세금을 피해서 세금이 가벼운[* 동로마의 행정체계의 수준이 높았던 만큼, 그 행정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도 높았다. 또 동로마가 고토수복 원정 도중에 발생한 손실을 매꾸기 위해 점령지에 과세를 매긴 점도 있었다.] 랑고바르드령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프랑크 왕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힘들여 완전히 제압하기보다는 [[완충국]]으로 남겨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될 필요성이 있는 게, 유스티니아누스는 3세기경 [[디오클레티아누스]]나 [[갈레리우스]]가 운용했던 예산보다도 훨씬 적은 예산만을 운용하여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였다. 절대로 유스티니아누스가 낭비벽이 있다거나 사치를 부렸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이전보다 세수가 훨씬 적어진 상태에서 원정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고 거기에다가 역병까지 겹치면서 재정 소모가 극심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유스티니아누스의 낭비벽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고쳐 생각함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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