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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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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 분할과 내부 쇄신 ===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파일:033d133533455f127320d197feb25028.jpg]] 서기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이론적'으로는 복수의 황제가 제국을 분할통치하는 개념이 가능해졌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제국은 [[사두정치]]와 같이 복수의 황제가 당연하게 각자의 통치권역을 장악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지 않았고, 대신 복수의 후계자에게 완전히 계승케 하진 않거나 만약에 하더라도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한 337년부터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사망한 395년까지의 58년 동안, 제국의 상황은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급격하게 ''''분담 통치 내지는 복수 정부의 관할 담당영역 분할 = 영구적인 분열''''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두 수도가 정식으로 수립되고 그곳에 두 원로원이 존속하게 된 상황에서, 광대한 면적의 제국 영토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국내외 문제들이 점점 복잡해지는 가운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생전의 군장교들과 로마 엘리트들이 공동 황제의 임명을 요구하는 등의 복잡한 사정이 맞물리면서 점점 더 시간 문제로 비춰졌다. 특히 동·서 로마 간에 상황 차이가 여전했고, 여기에 더해 3세기 말엽에 등장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제국 통일 이후 복수의 아우구스투스를 내세우기보다 제국의 복잡한 사정을 고치는 등 다른 부분에서 주안점을 뒀다는 점은, 후대 황제들에게 있어서는 자칫하면 분할 통치가 영구 분열로 인식될 가능성이 상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생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공교롭게도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이후로 로마 제국은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처럼 다시 동·서가 합쳐지지 못하였다. 동방과 서방을 관할하게 될 아우구스투스들이 별개의 정치세력에게 따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제의 두 아들들은 어렸고 그들의 능력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무능했다. 설상가상으로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온전하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사망한 것도 아니었고, 아직 서로마 일대의 정세는 동로마와 달리 여러 불안요소들로 가득했다. 그 결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과 그 후계자들 아래에서, 제국은 두 수도에서 각각 임명된 1년 임기의 집정관, 혹은 섭정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하면서 명목상으로 통일을 유지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제국을 방어하고 통치했다. 이와 함께 황제의 조각상 및 프로파간다 정책들 역시 나란히 전시되고 추진되었으며, 제국의 법률들은 두 황제의 공동 명의로 공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한 정부가 공표한 법률은 다른 정부가 복잡한 사정으로 호혜 원칙 아래 공표하지 않거나 온전히 집행되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고, 종국적으로는 동방과 서방의 행정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별도로 운영되게 되었다. -- 따로 국밥 -- 동방 제국은 [[아르카디우스]] 시기에는 [[서고트 왕국|서고트족]]의 침공을 받아 서로마의 실권자 [[스틸리코]]에게 도움을 받아내는 등 오히려 서방 제국에 비해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기나긴 통치를 거치며 -- [[훈족]]과 [[사산 왕조]]에게 금을 바치고 -- 안정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그의 치세에 그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2세#s-2.2.2|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이 지어졌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뒤를 이은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신의 채찍' [[아틸라]]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는 이에 안심하지 않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후 [[레오 왕조]]의 [[제노]] 대에 혼란을 겪긴 했지만[* 그의 두번째 치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476년).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는 [[오도아케르]]를 거쳐 최종적으로 [[테오도리크 대왕]]이 세운 [[동고트 왕국]]에게로 넘어간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하고 -- 동로마판 대동법 -- 여러 세제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고에 3년치 예산[* 금 약 32만 파운드.]을 채워놓은 채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에게 바톤을 넘겨주었다. 이는 6세기 중반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재정복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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