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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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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상 파괴주의|성상 논쟁]] (726~842) === [[파일:Clasm_Chludov (1).jpg]] 8세기 중반, 9세기 전반의 성상 파괴 운동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 보면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후 세 제국이 차례로 들어선 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이 이 세 제국에 해당한다고 여겼고, 마땅히 [[로마 제국]]은 세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수호자가 된 이후로는 로마 제국은 제국의 기독교인에게는 세상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성상 파괴 운동]]의 결과, 서쪽에 [[신성 로마 제국|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겪었다.[* 다만 제국을 칭하는 것은 서방에선 오로지 로마뿐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깨지고, 그래서 나온 개념이 혁명제국이다. 다만 영국은 무굴 제국의 제위를 가져오긴 했으나 유럽에선 끝내 제국을 칭하지 않았다.] 다만 성상 공경 문제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상 옹호파'와 황제 [[레온 3세]]를 중심으로 하는 '성상 파괴파'의 대립이란 건 틀린 얘기다. 서방 교회가 보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동로마 제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성상파괴주의라는 이단이 떡하니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 동방 교회의 관점에서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 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황제에 의해 유도되어 동방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투쟁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에서도 오히려 성상 옹호파가 전반적으로는 우세일 때가 많았고, 서방 교회도 성상 문제 자체는 황제가 갑자기 성상 공경을 이탈리아에서도 하면 안 된다고 생떼를 쓰기 전엔 이 문제에 큰 관심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의 성상 논쟁에서 서방 교회는 처음부터 동방 교회 내의 정통파(성상 옹호파)를 지지하는 보조적인 입장에 있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논쟁의 본질은 고갈되어가는 재정을 교회 재산을 털어서 보충하고 싶은데 핑계가 필요했던, 동로마 제국의 재정상 문제에 있었다. 물론 황제 개인의 성상 공경에 대한 생각도 일부 작용했지만, 진짜 문제라고 보기엔 너무 단순한 분석이다. 이 문제는 이슬람측과 보다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 탓에 성상 공경의 반대적 개념에 익숙해진 [[아나톨리아]] 지방과 그렇지 않은 유럽쪽 지역의 견해 대립도 크게 작용했고, 그 생명력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서기 843년의 유능한 섭정 황태후 [[테오도라(9세기)|테오도라]]에 의해 성상파괴주의가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성상 파괴주의는 제국을 내란 상태에 빠뜨리긴 했으나, 황제들이 그동안 많은 재산을 축적한 교회들을 털어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강제 결혼시켜 변방 속주에 배치하는 핑계를 만들어내는 효과도 있었다. 젊은 수녀와 신부들을 경기장에 강제로 끌어내서 옷을 죄다 벗긴 다음, 남녀 한 쌍이 손 잡고 경기장을 달리게 만드는 이벤트도 벌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손 잡은 남녀는 강제 결혼-합방한 후, 변방에 배치. 기독교 탄압에 광분했던 이전의 이교도 시절 로마 황제들도 이런 식의 AV스런 이벤트로 교회를 감히 모독하진 못했었다. 다만 성상 파괴 운동이 제국 서방의 라틴 로마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으로 서방 교회와 실질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보기엔 때문에 설명이 대단히 부족하다. 랑고바르드족이 마구잡이로 밀고 내려오면서 라벤나 총독부가 망가진 건 성상 파괴 탓이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이래로 계속해서 급여를 못대줘 이탈리아 야전군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탓이지, 성상파괴 논쟁 탓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전체가 일관적으로 성상 파괴주의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 재산과 인력을 정기적으로 털어대는 막장 황제들에 대항해 로마 교황과 연대하는 입장이었던 지라 서방 교회와의 골 운운은 설득력 없는 주장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샤를마뉴'''에게 붙은 명분은 당대 제국에 '황제'[* 당시의 여황제였던 이리니는 여성이었을 뿐더러 여러 행보로 인해 국내외 반발 세력이 작지 않았고 교황 그레고리오 3세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가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지 성상 운운은 전혀 관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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