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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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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상의 후퇴와 영토 축소 === 7세기 이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테살로니키|테살로니카]], [[이즈니크|니케아]], [[이즈미트|니코메디아]] 등의 수도와, 수도에서 가까운 몇몇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면 단 한번이라도 함락당하지 않는 도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전쟁 중에 영토가 뺏었다가 뺏겼다가 하는 것이 자세하게 묘사된 몇몇 유튜브 연도별 영상을 보면 , [[로마-페르시아 전쟁]],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674-678년]] 및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717-718년]]의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아나톨리아에서는 북부를 제외한 중·동부 내륙, 서·남부 해안 등이 대부분 침탈 혹은 일시적인 점령을 당했었다. 이에 따라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쇠퇴하여 사라졌으며,[* 예컨대 그리스 [[폴리스]] 시절부터 고대 후기까지 아나톨리아 서해안을 대표할 정도로 잘 나가던 [[에페수스]]는, 안 그래도 퇴적으로 항구기능을 점차 잃어가던 가운데, 사산 왕조와의 전쟁통이던 614년에 지진을 겪었고, 여기에 654-655년, 700년, 716년 등 [[https://en.wikipedia.org/wiki/Ephesus#Byzantine_Roman_period_(395%E2%80%931308)|영어 위키에 기록된 것만 해도 세 차례에 걸친]]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결정타를 맞아 쇠퇴하여, 그 이후로는 전혀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거의 언급이 안 되고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대표 도시로서의 위상은 스미르나([[이즈미르]])가 가져가서 오늘날에도 이즈미르는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튀르키예 내 인구수 3위, (두 대륙에 걸쳐 있으며 유럽 쪽이 메인인 이스탄불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반도 내 2위의 도시이다.] 살아남은 곳도 줄어든 인구와 방위 문제로 인해 시가지를 버리고 방어에 용이한 좁은 지역에 요새를 쌓고 그 쪽으로 이동한다든지, 구시가지의 잔해를 사용해서 임시 요새를 건축하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축소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타우루스 산맥 근처의 전방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역민들은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보장해주는 군대조차 믿을 수 없어 그 대신 산성과 험한 산세에 숨어 의지해서 살았다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Arab%E2%80%93Byzantine_wars#Raids_under_the_last_Umayyads_and_the_rise_of_Iconoclasm|Arab–Byzantine wars]]에는 이 시대 즉 중세 초기 이슬람 시대 전문가인 Hugh Kennedy의 저술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the frontier provinces, devastated by war, were a land of ruined cities and deserted villages where a scattered population looked to '''rocky castles or impenetrable mountains rather than the armies of the empire''' to provide a minimum of security"] 이로 인해 고대 로마부터 이어지던 소위 고전적(Classical)인 도시 문화가 거의 소멸되어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귀족들 또한 전쟁, 전염병으로 많이 죽거나 영지를 정복당해 뺏겨서 크게 힘을 잃었다. 이와 함께 소작농을 기반으로 돌아가던 [[라티푼디움|고대의 대토지 경제]]가 쇠퇴했고 자영농 베이스의 경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컨데 제국 서부였던 고대 이탈리아는 (5세기의 서로마 멸망기가 아니라) 비교적 단시간에 고트, 동로마, 랑고바르드로 주인이 계속 바뀌던 6세기 중·후반부에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서적이 있다. ([[https://www.amazon.com/Imperial-Tragedy-Constantines-Destruction-363-568/dp/1781256322|'Imperial Tragedy: From Constantine’s Empire '''to the Destruction of Roman Italy''' AD 363-'''568'''']]) 프랑스 사학자인 Bertrand Lançon 또한 저서 [[https://www.amazon.com/Rome-Late-Antiquity-Ad-313-604/dp/0748612408|'Rome in Late Antiquity: AD 313-604']]에서 이 고트 전쟁기가 로마 시에 있어서 고대 후기 중 가장 암흑기였다고 하였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Totila|Totila]] 중, 'French historian Bertrand Lançon described this period of late antiquity as Rome's "darkest hours."'] 단적으로 포카스 재위기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기에 로마시의 [[원로원]]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는 로마적 전통이 사실상 붕괴했음을 뜻한다.][* [[테마 제도]]는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렇게 구성원 간 빈부의 차가 줄어들었던 점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물리적 거리가 멀기도 했던 非 칼케돈파, 非 그리스어권 영토의 대부분을 뺏기면서 남은 제국령 내 칼케돈파, 그리스어권의 비중이 더욱 올라갔던 점과 함께, 남은 제국령 내 구성원 간 응집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면 혼란기를 거쳐 종교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더 균일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줄었는데 내부 일체감이 강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곡창 지대였던 이집트를 상실함으로 인해 식량 부족과 물자 부족 역시 심각해졌고, 심지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도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충당하여 겨우 버티는 지경이었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각지에 토착화되어서 이때까지도 고질적으로 제국을 괴롭혔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50만 명에서 4 ~ 7만 명까지 감소했는데, 콘스탄티노플에도 정착되어 있었던 무료 식량 배급(소위 [[빵과 서커스]]) 제도를 이라클리오스 때 페르시아를 상대할 전비를 축적하면서 재정부담으로 폐지했던 것이 인구 감소에 큰 요인이 되었다. 이 줄어든 인구 또한 인근의 마르마라 및 에게 해의 섬 지역의 인구를 콘스탄티노플로 사민시켜서 채웠다고 한다. 재정 역시 상당히 피폐해졌고[* 6세기 전성기 때 제국 세수가 금화 500만~1000만 개였는데 8세기 말에는 세수가 160만 개, 즉 많게 잡아도 2세기 전의 1/3으로 줄었을 정도였다.] 경제도 과거로 되돌아가서 화폐 경제의 몰락으로 수도를 떠나기만 해도 물물교환이 대세였으며, 세금을 내기 위한 화폐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서 농민들이 고생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누구나 제국이 망해가고 있음을 절감할 정도의 대위기였다.[* 인구만 해도 제국이 약화되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775년의 동로마 제국 인구가 700만으로 최전성기인 2600만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니 당면한 생존 및 수비가 목적이 아닌 중장기적인 것이나, 고차원적인 국가기능에 자원을 투자할 여력이 많이 사라졌다. 이에 해당되는 교육·학술·문예 분야는 직격탄을 맞았다. 뭐 애초에 [[이라클리오스]] 때 전비 조달을 위해서 세르기오스 총대주교의 협조를 받아 그 전에는 손도 안, 아니 못 대던 교회의 보물, 패물들을 처분하거나 녹여서 전비에 보태썼던 것에서부터 예술 쇠퇴의 전조는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역사서도 부실하지다 못해 사라졌고, 제국 전체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많게 잡아 3천 명이었다. 관공서 기록도 부실해졌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도 글을 아는 자가 없어서 관리 임명에 곤란을 겪는다는 내용이 수록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교육 기능이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셈이다. 가문과 가계에 대한 기록도 상실되었다. 7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고위 관리에 수없이 기록된 아니키우스 가문[*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를 필두로 '''공화정 시기''' 부터 이어지는 씨족이다.]이라던가, [[프로부스]] 황제의 후손으로 동·서로마에서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프로부스 가문 등 기존의 명문가들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들은 사실 혈연뿐만 아니라 [[클리엔텔라]] 관계로 인한 가문간 동맹과 보호,주종으로 이름을 물려받은 경우가 많았는데, 전범위적인 행정,문화,학문에서의 총체적 마비로 인해 이러한 사회적 관습이 붕괴되어버린 것이다. 지방에 대토지를 가진 귀족들이 해당 영지를 상실하면서 몰락하여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들조차도 언제 정확히 자신들이 집권했는지 잘 모르는 막장 상황에 돌입하고 말았다. 물론 시장의 상인들과 직공들도 자신들이 언제부터 이 일을 했는지 감도 못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7세기 이후의 동로마 제국을 두고 현대 서양사 학자들은 기존의 로마적 전통이 동로마에서 사실상 사라지고 독자적인 제국으로 변모했다고 보고 7세기 이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절까지를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 그 이후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래로의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8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와 법률은 여전히 7세기에서 이어지던 연속체였고, 적어도 군부대들 거의 전체는 몇몇 타그마 부대들 외엔, '''7세기 이전은 고사하고 아예 기원전부터 시작되는 로마 군단들과의 강력한 편제 연속성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무려 네로 다음에 황제가 된, 갈바가 창설한 군단들에서 시작되는 부대들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몇 안 되는 예외라는 타그마 부대들도 대부분은 3~5세기 황제들이 창설한 부대들의 직접적 연속이었다. 그러니 그리스어 공용어만 갖고 7세기부터 로마 제국은 아예 로마 제국 아니라고 하는 관점은 편의적, 문학적, 수사학적 관념을 역사적 관념과 혼동한 것이라고밖엔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토, 국가 체계, 문화적으로 고대 로마와는 다른 비잔티움만의 체제와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건 이미 반박된 1970년대 이전의 관념에 불과하다. 물론 적어도 제국이 7세기 이슬람 제국의 흥기 이래로는 그 전과는 달리 지중해 문화를 혼자서 선도해나가는 절대 강국의 위치는 잃었으니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별도 구분은 결코 의미가 없진 않으나, 그렇다고 엄밀한 역사적 구분 및 분명한 정부 연속성, 법률, 군제 연속성 등을 부정하며 그것이 단히 동로마팬들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견해 또한 진지한 견해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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